뭔데?
뭔데?
뭔가 의미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막상 보면 뭔지 모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니면 모를 수 있는게 아니라 당연히 모르는 것이거나요
말을 해주는 듯 하지만 빙빙 돌리는 거 같고 주변만 맴도는 거 같고 딱 이거다 이런거다 이렇게 하라는거다 이렇다는거다라는 말이 아니라서 그다지 흥미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간략화는 나도 좋아하는 것인데 정말 이거라고 간단히 말하기가 너무도 힘드네요
도라고 하는데 도가 뭐냐 하면 전체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도가 뭐냐고 말한건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의미 맥락에 따라 이거다 저거다 말해서 진짜로 도가 뭐냐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보면 내 말은 정말 짜증나는 말들이지 뭔가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도를 정의하면서 말하지만 그런다고 개념잡힐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딱 이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식으로 보는 유익함이 있어서 이거든요
도가 전체성인데 전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성이라고 하면 그런 성향이, 경향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 그거라는 것이 이미 아닙니다. 하나의 성격이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정해진 고정성으로 보려고도 합니다. 그러면 곤란한데요
전체적인 성격으로 볼 수 있는게 있겠습니다.
우선 전체라고 말하면 어느 범위에서 전체냐가 됩니다. 그냥 전체라고 말한다고 정말 전체라고 안다면 이건 생각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서 혼나야 합니다.
우린 전체를 인식할 수가 없고 경계를 정해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스스로 정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의 개념을 들으면 말하는 사람에게 정확히 물어서 그 개념의 한계성을 인식하면서 사고진행을 하던가 자기가 추측해서 한계 지우면서 개념 정리해가야 합니다.
그러니 전체성이라고 하니 어느 범위에서 전체성이냐는 의문이 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정도의 전체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하는가가 그사람을 보게 되는 판단기준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판단기준이 있을 것인데 그중에 이런 것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상대가 말을 하니 그 말의 한계성을 인식해가며 들어야 해서 이런 판단은 합니다. 말의 범위인데 말하는 주제의 현실적인 적용범위, 그사람이 인식한 지식의 범위, 얼마나 의미를 보는가의 한계범위, 말들 사이의 일관성의 정도 범위, 정합성의 범위, 각 지식의 깊이 범위, 자각의 범위도 있는데 아는 지식에 대한 또 범위에 대해 얼마나 되돌아보며 누적시키고 숙성시킨 것인가입니다. 또 주체성의 범위식으로 하면 상당히 많죠 주체성의 범위란 사고하는 주체가 어느 정도의 자기 중심적인 위치에서 형성한 지식이냐입니다. 그리고 범위엔 차원이라는 다른 교차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더 나열하면 질립니다.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무수한 것들을 하고 있죠.
사실 이런 것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 때 합니다. 이유도 없는데 이러고 있으면 골치 아픕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굳이 의식적으로 하지 않아도 이미 심층에서는 하고 있습니다. 그건 내가 이런식으로 의미를 분석하고 나누고 합치면서 정리하고 해보는 것이라서 이런 사고의 길이 이미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죠. 그렇다보니 심층에서도 습관적으로 해가고 있는데 다만 의식적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식에 길들인 것으로 심층을 길들이는 것을 알면 이렇게 해가는 것을 의도적으로 합니다. 이런 심층을 가지기 위해 집요하게 물들인 것이니까요 의식이 안해도 되는 그래도 심층에서 하는 그런 방법이죠. 이걸 하면 감정도 재구성 하는데 감정을 억누르거나 참거나가 아니라 다른 감정의 체계로 재형성시키는 것입니다. 너무 조작 같아 보이지만 우린 살면서 자연적으로 이렇게 감정체계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무지인데 이걸 알면 이것이 사람이 사는 하나의 원리를 아는 거라서 오묘함이 있는 것이죠. 사실 이걸 알면 윤회를 초월합니다. 이걸 모르니 다시 나와서 헤메게 되죠. 그리고 이걸 알아야 참회나 자천이나 공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내면의 심층을 재구성하려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체성을 보면 어느 범위에서의 전체성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내 욕망의 한계를 알아야 욕망의 전체성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 그안에서 도를 정해갑니다.
전체성이라는 것이 모든 것이라는 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의도를 말합니다.
그냥 잡다하게 다 있는 것 식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는데 도라고 했으니 거기에 일관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일관성을 도라고 합니다. 무엇의 목적으로 또 기준으로 또 뭘 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러한 잡다의 전체가 되었느냐가 됩니다.
이런 도가 없으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곧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도가 있다는 것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도가 없다면 무존재입니다. 태어날 이유가 없으니 안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하면 윤회를 넘어가는 것은 이러한 전체성을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잡다하게 많은 것이 있을 때 어떤 기준을 두고 줄세우기를 합니다. 생태학에서는 자기 조직화라고 할 수도 있고 통일성이라고도하겠습니다. 이걸 도라고하는 것이죠
내 인생을 통일한 그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삶의 자기조직의 방향이 뭐냐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범위가 있다고 했으니 자기가 보는 전체가 있게 됩니다. 어디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고 그안에서 자기의 도를 전개하고 있으냐 자기의 삶을 이루고 있느냐 입니다. 여기서 어디는 다양한 장르랄까요 가지수가 있습니다. 그저 나하나 몸하나 먹고사는거 하나 가족하나 가정생활하나 공동체하나 조직하나 사회하나 세상하나이지만 공동체의 무엇, 어떤 영역? 예를 들어 예술이라고 해도 노래, 그림, 무용, 영화, 조각, 연주 아니면 새로운 예술을 만드는 또는 평론하는 또는 그걸 돕는 역할식으로 하나의 것에도 다양한 것이 있으니 어떤 범위란 어떤 것이 취향에 맞고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그것이 됩니다.
그런 세부적인 것에서 범위가 점 점 커져가는 것인데 하루 아침에 안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그 확장해가는 경계를 보게 되면 한계돌파의 의미를 알겠죠. 세부를 알아야 세부를 넘어서 상위로 가는게 보이고 이러면 만약에 노래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이 되며 조각이든 미술이든 뭐든 예술이라고 상위 범주가 되어갑니다. 이렇게 상위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난 예술이 아니라 노래가 하고 싶을 뿐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무나 하라고는 안하지만 한다하면 이런 도를 찾는 것과 그것의 범위를 확장해가는 것이 자천이 되겠구요
그런데 단순히 확장이라고 하면 자기성장만 말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게 아닌데 어느 정도의 전체성을 가지면 즉 나를 넘어 타인, 세상으로 확장해가면 나라는 것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내외를 보는 것이 이미 파조선의 단계에서 중요하고 거기서 사고의 정리가 덜되면 오래도록 헤멜 것인데 나만이거나 나를 위해서거나 나의 무엇 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단계를 넘어가면 나를 위한 성장이나 이기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하는 의미는 다릅니다. 정상적으로 공부했을 때이지만요 이렇게 정확한 사고의 확신없이 공부하면 성장이 혼란이 있어서 방황하고 방황인지도 모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의 전체성을 찾고 그 도를 보아야 하며 그것을 성장시켜가는 것입니다.
말이야 쉽지 행동이 어렵다고 또 말할 것인데 행동하지 않으려면 굳이 도닦을 필요가 없어서 이런 핑계는 다른 곳에서 하길 바랍니다. 변명은 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선 변명 안하면 무시하고 억압하는 못된 사람들이 많아서요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사실 자기의 인생의 목적이 뭔지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살다보면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 챙겨야 하고 그러다보면 오늘 이거 내일 저거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런 것을 처리하다보면 가만히 자기를 돌아볼 시간도 없고 그런 여유도 없으며 그런 것을 하게 하지도 않는 주변이기도 사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막상 내가 이렇게 말해서 뭔가 알려고 내가 왜 사는지 왜 이러는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싶어도 당장 알아지지도 않고 수년을 공부해도 사실 헷갈립니다. 또 난 이런 것을 위해서 태어낫다고 확신해도 정말 그런지 어찌 알겠어요 어쩌다가 그런 것이다라고 알게 되었는지 그게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안다고 그런 것이 아니니 그렇게 알게 되는 맥락 소급도 해야하고 따져봐야 하는 거라서 수월한 것이 역시나 아닙니다.
자기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본다는 것이 우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체적인 조망을 해야 하며 그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욕망들 만나는 사람들 해왔던거 하지 못햇던거 가족들 할 수 없는거 하지 않으려는거 가진거 가지고 싶은거 그런 것들에서 뭐가 주요한 것이고 뭐가 부수적인 것이지 쉽게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고 그러니 이게 내 의미인것도 같고 저게 내 의미인것도 같고 이거 때문에 사는 것도 같고 저거 때문인것도 같아서 당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눈딱 감고 이거 저거 가지쳐서 잘라내고 남은 그것일 수도 있는데 그러다가 그다지 내 인새에서 있는지 모르고 있던 것이 사실은 내가 추구하는 것이면 지금 결정 한 것이 엄한 짓이 된 것이 됩니다.
의식이 아는 그것이 아닐 경우가 많으니까요 의식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다른 무엇이 사는 거라서 의식은 항상 변죽이기 쉽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항상 해질 녘에 날아올라 자다가 봉창 두드르듯이 할 수도 잇으니까요 의식은 언제나 사건이 지난후에 변명을 하는 것 같습니다. 미리 이런 것이다 이렇게 한다 이렇게 된다 가 아니라 사건이 지나고서 이래서 했다 이걸 좋아한다 이걸 원했다. 이게 맞다 이건 그래야 한다고 하게죠 그러니 의식적으로 이거라고 해봐야 곡해가 있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도 찾아야 하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이걸 알면 사는게 훨 수월하고 많은 판단에 기준이 되며 욕망제어도 쉬워집니다. 그리고 이걸 제어하며 다른 것으로 재구성하기도 쉽고 스스로를 가게 하는 추진력도 됩니다. 살아가는 그 주도권을 얻는 것이라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