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19. 8. 5. 15:28

감각확장

이런 글을 쓰면서 그전에 쓴거 같은데 또 쓰는 것이어서 그다지 신선함은 없을 수도 있는데,

내가 달라진게 있으면 다른 부분도 있을 것이고 달라진게 그다지 없으면 정말로 쓴걸 또 쓴게 되어 지겹긴 하다.


감각확장이라고 하는데 그럴 듯하지만 좀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가 오감이 되는 것은 다들 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육감인데 이 육감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것이 일반화가 된 단어인지 아니면 반농담이거나 흥미로서의 단어로 쓰이는지 그건 모르겠다.

누구나 귀신을 말하지만 귀신이 일반화 된건 아니다. 불신도 있지만 믿고 싶지 않는 심리도 있고 믿어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애매한 입장을 가지기도 한다. 뭘 믿거나말거나 그런건 개인적인 취향인데도 남의 취향에 간섭이 좀 심한 나라이다 보니 남눈치보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다.


육감이라는 것이 오감 이외에 다른 감각이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여기선 여섯번째 감각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감 이외에 다양한 감각이 더 있을 것인데 그것이 하나일지 둘일지 그건 모르겠다. 수십가지라고 하든 수백가지라고 하든 그냥 통틀어서 육감이다.

즉 6감, 7감, 8감, 9감, 10감.......

사실 이렇게 많을 것인데 왜 오감에서 멈추어서 이게 감각기관이 다인양 아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5라는 숫자에서 저항감을 느끼나? 인체의 이목구비피부라는 것에서 저항감을 느끼나?

무엇이 사고의 확장을 막고 있는 것일까? 신체기관이 명확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저항감인가?

불교 유식에서 놓은 6식인 사고작용은 왜 감각이 아닐까? 무엇을 기준으로 한 분류인지 모르지만 이미 한번 알게 된 개념을 전혀 의심하거나 분석하거나 그러면서 자기가 보는 관점을 가지긴 어렵다.

이런 사고를 거치면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면 이런 것을 6식이라고 한다. 사고해서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지만 불교도가 아닌 사람은 이것을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고 이런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러면 그들은 5감이 있을 뿐이고 불교도는 6감이 있게 된다.

그러면 전혀 다른 세계를 살게 된다. 6감으로 감각 된 세상을 구분하면서 산다면 이것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것을 모르게 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6감을 모른다고 안쓰는 것은 아니다. 쓰면서도 모르니 별난 것이다.

안다고 잘 쓰지도 못하는 불교도들을 보면 이것도 별나다.

세상은 6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지배되어가는데 아무도 이걸 모른다면 웃기지 않을까?

시각이 세상을 만들고 지배하나? 청각? 후각? 누구나 대가리 써서 만든 세상이 지금의 세상인건 다안다. 종교든 과학이든 망치라는 단순한 도구든 무엇이든 대가리가 만든 것인데 대가리가 하나의 감각기관인 것을 모르면 되나? 뭐든 결국 대가리가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받아들이고 말고 하는 판단이 감각이 아닌가? 사물이 뭔지 알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인정하기 어려우면 감정도 7감에 해당하는 감각기관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더 어렵겠다.

맘에 들어야 내 것으로 하고 맘에 안들면 안하는 그런 호불호가 받아들이고 말고하고 무엇인지 알게 되고 안되고를 좌우하는 것인데 그리고 사물이 무엇인지 감정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 정의를 할 수 있는데 애인이라도 감정이 움직여야 애인이고 아니면 그냥 친구라고 할 것인데 사물을 정의하는 것이 아닌가?

이다음은 8감인데 8감은 선천성이라고 한다. 그냥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이다.

이건 이해가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닌데 쉬운 것은 그냥 운명적으로 되게 되어 있거나 안되게 되어 있거나 식으로 보면 되지만 어려운 것은 일상에서 응용하기는 또다른 부분이 있어서 어렵다.

또 9감이 있다면 나 혼자만이 아니라 어떤 부류나 조직이나 함께 만든 감각이다. 그들만이 느끼는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동양과 서양이라는 식으로 나누어서 말하는 것을 예로 들면 쉽다. 동양인이어서 더 수월하게 감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있고 서양인이라서 그런 것도 있는 식인데 이것도 응용으로 들어가면 대단히 복잡해서 골치 아픈 이론이다. 또 10감으로 가면 시공적인 감각도 있는데 이건 긴시간을 두고서 감각하는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5감으로 6감으로 그 어떤 감각으로도 들어오지 않는 것을 감각하는 것인데 계절의 변화 자전이나 공전으로인한 변화 지구라서 생기는 규칙성이나 그런 시공으로 나타나게 되는 내 삶의 감각이 있다. 내가 어쩌지 못하지만 또 어쩌지 못하면 안되기도 한 맘대로 변화시키기 힘들지만 그안에서 나름 변해가야 하는 그러한 것인데 이걸 감각하기란 힘들 것이고 그렇지만 감각하면 그만큼의 감각확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가면 자유롭게 확장하면서 새롭게 정의하며 만들 수 있다.


더 세분하면 6감이라는 것도 더 잘게 쪼갤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사물, 사실, 정보, 사건들을 다르게 변화시켜서 보거나 다루는 것이라고 우선 정의하고 너무 다르게 하면 기발한 것이고 창조나 창의가 되기도 한다. 뭐든 있는 거에서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인데 없는 것에서 하지는 않는다. 없던건 그냥 거기서 끝이다. 있던 것에서 없는 듯한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일 것 같다. 그러면 없던 것이 생성되니 유에서 무로 창조하는 것도 된다 할 수 있고 너무 유연하게 말해서 정밀하지 못한 정의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알아서 생각할 것이고 이런 상상력이 감각이 되는 것은 그러한 자유로운 사고가 되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서 뭔가 알아내기란 즉 감각하기란 불가능하게 된다. 어떤 것을 아는 것은 변화하는 것을 알기 위함이다.

그전에 있던 것을 다시 보려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는 것이 일상이니 그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고 대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못하면 위험하기도 하니까 외부가 달라지는 것에 따르지 못하면 변화에 뒤쳐지고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달라진걸 모르게 되면 생명이 위험하다. 그러니 우린 달라지는 것을 감각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상상력이라는 그전과 다른 것이 되는 것에 익숙해야 하고 이런 것이 기관으로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상력은 6감다음의 7감이던가 이게 10감이던가 11감이던가 아무튼 또다른 중요한 감각이다. 이게 둔하면 사고가 보수적이게 된다. 새로움이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달라져가는 외부에 적절한 대응이 어려워 힘들게 된다.

거기에 누구나 상상하지만 상상력은 다르다. 그런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눌 수도 있다.

시력으로 말하면 누구나 동체, 즉 움직이는 것을 인식할 수 잇는 시력이 있지만 동체시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어으정도 뛰어난 사람에게 쓰는 말이 있다. 이건 질이 좀 달라진 의미이다. 동체를 인식하는 것에서 남보다 좀 더 잘하는 것이 되어 동체시력이라면 누군 동체시력이 있고 누군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분류이다. 그리고 이런 구분도 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구분이 가능한 차이를 잘 인식하면 역시 또다른 감각기관이 있는 것이 된다. 사물이나 정보나 관념들을 잘 구분하고 정리하며 분석하는 것이라서 이것이 남다른 능력이 되니 이거 역시 감각기관이다.

그리고 동체시력이라고 하면 이것도 눈의 기관이 확장된 것이다. 눈에서 감각기관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기관이 하나 더 생겨난 것이다. 그 기관이 있으면 감각하게 되고 감각하면 활용하게 되며 그러면 이해득실이 발생한다.

그렇지 못하면 못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누구나 알듯이 큰 것이다.

그러니 그냥 눈에서 감각기관을 정의하고 끝낼 것이 아니다. 눈에서 어떤 기관이 더 확장되어 가는지 봐야한다. 그래서 감각기관 확장이다. 그래서 귀나 냄새나 다른 것들도 다른감각으로 확장되는 것들이 있다. 이런건 각자의 능력이다.

이런 기관이 더 있고 뭐가 있을지 모르는 것인데 이건 안보이는 것이 아니라 못보는 것이다. 못보는 것이니 보게 해야 보이는 것이고 기관으로 생성시켜야 하는 것이된다.

이런 것에 기나 영적 감각이라는 것도 잇는데 이런 것도 감각기관이다. 다만 이것을 특별취급하는데 그건 오해이다. 다른 감각기관처럼 실수하고 속고 틀리기도 하며 안되기도 하는 그런 불완전한 기관들이다.

이런 것을 초능력이라고 해서 완변한 능력이거나 신의 능력이라고 해서 완전해야 한다는 집착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건 상상력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오해이다. 상상력의 기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여러 기관이 있는 것이고 없는 듯이 있다가 발현되거나 발현시키거나 한 것이기도 하고 우린 훈련을 통해서 전혀 다른 본적없는 기관을 생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감각이라는 것은 내가 사물을 어떻게 보고 또 그 본것으로 어떻게 살것인지가 되는 것이어서 그사람의 삶의 유형에 따른 세상이라는 외부와의 관계가 되는 것이니 우린 모두가 다 사는게 다르니 다르게 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감각기관으로 어떻게 감각하고 어떻게 살지는 각자의 사정이다. 그러한 각자의 감각에 보편이라는 잦대로 모든 것을 통일하고 일반화시키면서 획일적으로 할 것은 없다.

모두가 차이나는 발랄한 삶을 뭉개고 지워서 모두 같은 것으로 하게 되면 그게 얼마나 살벌함인지를 인식못한 것이다. 이것도 이걸 감각할 기관을 발달시키지 않아서 그렇다. 너무도 감수성을 또 감각기관을 정밀하고 세분화 하지 못하는 짐승같은 것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아는 것이 이런 감각기관을 생성하는 것이 그만큼 힘든 것이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라서 그런데 차차 이런 감각기관을 인정하고 납득하며 발달하는 시대가 될거라고 본다.

시민들이 사람들이 무엇을 알게 되고 무엇을 인식하고 무엇을 감각하기를 원치 않는지 그런 불순한 권력자가 없다면 우린 더욱 확자하면 무한한 감각으로 저 먼 이상의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예로 든 것들이고 언제나 내가하는 말은 이렇게 하는 예이니 더 많은 것을 찾을 수도 더 깊게 들어갈 수도 더 다양한 분류를 할 수도 있다고 해야 한다.


어떤 이론이든 하나 알아간 것인데 그걸 보고 읽는 분들도 또하나 알아가고 거기에 하아 더 나아가는 앎이 있을 것이어야 한다.

정재지기보다 정해가는 중임인 것이 공부이다.


8감을 말하면서 선천적으로 주어지거나 아니거나로 말했는데 이건 나에게 주어진 것과 감각하는 것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전제가 있다.

감각은 감각이고 주어진건 소유같은 거라서 존재론이라고 생각하면 이건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런데 주어진 것과 감각하는 것을 연관해서 생각하면 내게 주어진 것만 감각한다가 되고 감각한 것만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6감이고 누군 7감이라면 누군 6감으로 감각하는 사물만 주어진 것이고누군 7감으로 된 사물도 주어진 것이 된다. 인생에 남보다 하나 더 감각할 수 있다는 거시 남보다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지는 것이고 사물이 주어지는 것이고 사건이 주어지는 것이라서 그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예로 든 동체시력이 있고 없고가 운동선수가 되고 말고가 된다고 할 수 있을 좀 극단적인 예로 하면 이 차이는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얼마나 감각기관을 확보하고 있느냐로 그사람의 수준을 논한다면 이상할 수도 있으나 꼭 이상하지도 않을 수 있기도 하다. 그 감각기관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느냐가 있어서 간단한 분류는 아니지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