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편
선진
자왈 선배들에 예악에 있어서 야인이고
후배들은 예악에 있어서 군자인데 누구를 쓰냐고 하면 난 선배들이다.
用 이 있어서 쓴다고 번역했는데 아마 선택한다거나 누구와 함께 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번역하는게 일반일것도 같다.
원리를 알면 야인이되고 정보를 알면 군자가 된다. 뭘 하는지 알면 아는 것을 하면 되니 군자처럼 화려하고 대단하게 보일 수 있고 근원적인 원리를 알면 해야할 그것만 하면 되어서 다른 것은 소홀히 하는 것이 있어서 야인같다. 이둘이 다 맞아보이지는 않고 그때그때따라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데 뭐 여긴 이렇게 써있다.
자왈 안회는 나에게 도움은 안된다. 내말을 기뻐하지 않는게 없어서다.
이게 안회를 탓하는게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탓한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를 긴장시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고 뭘 해야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이걸 혼자 해야 하는데 그건 그만큼 힘겨움이 된다.
공자 정도면 위대해서 홀로 다 알고 행하니 그런게 필요 없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이런식으로 사고를 진행하면서 상상속으로 들어가는 거라서 논리적 사고가 아니라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과거 주석들이 안회를 꾸짖는게 아니라고 굳이 해석하려는 것이 다들 공자에 대한 노예근성이 우선 전제되어 있다.
또 이러면 안회를 폄하하는 것이 될거라고 할 수도 있다. 홀로 묵묵히 깨닫는다고 하는 것인데 이건 무슨 망상인지 모르겠다. 홀로 그렇게 알려면 굳이 스승을 왜 두고 도반이 왜 있고 사회와 공부하는 지향성이 어디 있는 것인가 공부의 원리를 몰라도 이렇게 모른다는 것이 좀 그렇다. 어설픈 선종같은 것이나 신비함이나 인간에 대한 지나친 이상론은 경계한다.
이 선진편이 이후에 어떤 학파에서 편집해서 만든거라는데 이런 신화같은 글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자왈 민자건은 효자이다. 사람들이 부모형제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이부분은 사람들의 번역이 좀 다르다.
1. 부모형제의 말을 사람들이 헐뜯지 못하니(이렇게 번역한 것도 있는데 이게 뭔 말이야ㅜㅜ)
2. 외간 사람들이 그 부모 형제집안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는 말에 조금도 트집을 잡지 못하다니(이건 거의 외국어인데 번역이 더 어려워 ㅠㅠ이렇게 돌려 말하는 게 왜그래야 되는거야)
아무튼 민자건이 계모에게 학대받고 자란 것이 있나본데 그래도 잘지냈다고 한 거 같다.
남용이 <백규>라는 시를 하루 세번 이상 외웠다.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백규라는 시의 내용이 이렇다.
너희들 인민을 질박하게 하고 가르치려고 들지 말고
근심없음을 경계하고 대화는 신중히 하며
위의 보이길 조심하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하라
(이러면서 드럽게 가르치려드네 ㅠㅠ)
백규의 흠은
갈아서 없앨 수 있다.
말의 흠은
그럴수 없다.
(백규라는 것이 일종의 옥인가보다.)
계강자가 물었다. "제자들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 합니까?"
자왈 '안회가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단명했다. 그래서 지금은 없다.'
호학이라고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왜 안회만 그렇다고 말하고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을까
두먼이나 죽었다 없다.식으로 반복하는데 강조인가 제자가 그리 많았다고 하는데도 그중에 굳이 이런다.
안회가 대단하다는 것처럼 될지도 모르는데 다른 제자들이 별볼일 없다는 것도 되는 것이다.
근데 호학이 뭐길래 그렇게 인색한가
배워서 이룰 경지가 있어서 이룬자를 말하자는 것인가
다른 제자들이 배우기보다 행세하기를 더 하려는 것이어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가르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답답해서인가
안회가 죽자 안로(안회의 아버지)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 덧관을 장만할 것을 청하니
자왈, '제주가 있건 없건 다 자기 자식인데 아들 리가 죽었을 때도 관만 있었지 곽은 없었다. 곽을 만들어 주고 걸어다니지 않은 것은 내가 대부와 같이 다니는 사람이라서 걸어다닐 수 없어서이다.'
리는 공자의 아들 백어이다.
이게 아마 체면일 것이다. 대부의 체면상 걸을 수 없는 것이다.
또는 대부는 대부로서의 행동하는 예법이 있는 것이다. 또는 요즘의 체면유지비가 있다는 식이다.
이게 나쁘다곤 할 수 없다. 공자가 체면유지하기위해 돈쓰고 좋은거 타고 다녀도 된다. 그정도의 인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럴 만한 짓거리를 하고서 체면유지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항상 과거의 좋은 의도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서 악용되는 것이기 마련이다.
지금은 체면이라는 것이 서구인들이 비난하는 듯해서 이것을 안좋은 것으로 알거나 또는 체면차리려는 변명으로 자기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변명하거나 비윤리적인 것을 덮으려는 간악한 자들이 있어서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저 갑질이거나 꼰대짓으로 될 뿐이다.
체면엔 있으면 부족한자들에게 가는 것을 체면상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함부로 나쁜 짓을 할 수 없는 것이고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고 함부로 비난받고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을 하면서 체면 유지 하기위해 그에 따른 대우를 받거나 요구해도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하면서 그에 대한 대우를 요구하냐 이런 앞뒤의 일관성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 자기가 받을 것만을 요구한다면 웃기는 놈이고 이건 체면으로 볼 수 없는 나쁜 놈이다.
체면상 할 수 없는 것이고 체면상 하면 안되는 것이고 체면상 해야 하고 체면상 그래야 한다.
이게 나쁘다고 하면 안된다. 누구나 유혹이 있고 흔들리는 것인데 그러한 것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것이다. 결코 자기의 체면에 반하는 것을 당해서도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이건 스스로의 인격을 가지는 것이고 자존감이며 자긍심이라서 그렇다. 자기의 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격을 맞추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과 그것을 하기 위한 격식이 일상의 생활에서 공적인 생활에서 그 방식이 있게 된다. 내가 하는 일에따른 복식이고 다니는 방법이고 말투이며 행동이다.
이걸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겸손한척 하면서 지나치게 검소하게만 하고 사양만 하는 자도 있고 격에 안맞는 것을 맞다고 우기며 지나친 꾸밈을 하는자도 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격이 안맞는 것이다. 그 하는 일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격식으로 활동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그 격식이란 그 일을 하기위한 것이고 그 일에 따른 것이고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한 것이고 그 일을 편하게 집중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체면에 해당하는 것을 하겠다는 스스로의 결단을 보이는 것이다. 난 이런 사람이다가 아니라 난 이러한 것에 걸맞는 것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사실 평소에도 난 사람들을 이러한 격을 보기 때문이다.
그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위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고 그에따른 격이 되고 있는가를 보며 그 간극에서 그사람의 성향을 알게 된다. 비루한지 허영인지 그런 것을 보는데 이건 그사람의 감정이 부정적으로 흐르는 사람인지 긍정적으로 흐르는 사람인지를 보게 되고 그로인해 같은 말이라도 어떤 방향으로 해석해가는지를 알기도 해서이다. 사람을 볼때 말을 보는 것도 아니고 단기간으로 간단히 보는 것도 아니다. 그 하는 행동의 장기간의 맥락을 보고 그 격을 보고 처해진 상황의 공교로움을 본다. 그 모든 것이 전부 그사람이라서 그렇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신체가 아니라 그로인한 전체를 보는데 이런 것이 포함된다.
대하는 사람이나 일에 따라 그리고 내 격에 따라 복식을 정하고 상황에 따라 주변을 배치하는 것이고 대하는 방법을 정해가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걸 신경쓰지 않는다면 참으로 둔한 것이다. 우린 모두 격이 있다. 그 격을 착각할 뿐이다.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아~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셨구나"
안연이 죽자 공자가 통곡을 했다. 모시고 간 제자가 수근대며 "선생님이 통곡한다" 고 하니
자왈 '통곡한다고? 이 사람을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누굴 위해 한단 말인가?'
슬퍼하는 것도 지들끼리 속닥거리니 제자들이 뭐 이래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경박한 건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안연이 죽자 문인들이 그를 성대히 장사지내고자 하니 공자는 "안된다" 했다. 그런데 문인들이 후하게 해버렸다.
자왈 "생전에 안회가 나를 아버지처럼 대했는데 나는 자식처럼 대해주지 못했으니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너희들이 한 것이다."
그렇게 제자 탓하며 도망가지 못한다. 니 잘못이다. 그걸 잘못이라고 생각하니 분명 니 잘못이고 그런 제자들만 있는 것도 니 일이다. 어찌 회피하겠나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것이니 자기 일인 것이지 남에게 덮어씌울게 아니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물었다.
자왈 "사람섬기는 일도 못하면서 무슨 귀신 섬기는 일을 묻나"
계로가 또 묻기를 '감히 죽음을 물으면요?' 하니
자왈 "사는 것도 모르면서 죽음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사람을 섬기는 것을 알면 귀신 섬기는 것을 알게 되나로 볼 수도 있고 또 삶을 알면 죽음을 아나 하는 것도 된다.
아니면 뭔저 사람이나 사는 것을 알고 다음으로 귀신이나 죽음을 알아야 하는 건가도 되겠고
아니면 귀신이나 죽음을 알 필요 없다고 해도 되고
그저 사람을 모르니 귀신을 알기 힘들고 사는 것을 모르니 죽는 것을 어찌 알겠나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아니면 이런 것이 전부 내포되었다고 해도 되겠다.
지금으로선 아무렇게나 해석해서 자기 주장에 힘을 실을 증거자료로 쓰면 된다.
이걸로 공자는 귀신을 말하지 않거나 죽음을 몰랐다거나 하면서 이상한 비약을 하면 좀 그렇다.
위 내 해석은 그냥 계로가 사람이나 삶도 아는게 없으면서 쓸데없는 것에 더 관심있는 놈으로 보고 해석한 것이다. 역시 어느시대나 요상한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 있으니까
이게 안되다는 것은 아닌데 그로인해 사고의 체계가 황당해지는 것이 되고 옆길로 새는 경우가 많아서 경계하는데 너무 말 안해주거나 부정만 하면 그것도 역효과가 나서 어려운 문제다.
노나라 사람들이 장부(재물창고)를 새로 지었다. 민자건이 말하길 "옛날 것을 쓰면되지 왜 이러는가 굳이 새로 지어야 하나" 자왈 '저 사람은 평소 말을 안하는데 말하면 정확한 말을 한다.'
재물창고 하나 짓는데 굳이 왈가왈부할 것인건가 하는데
아마 재정구조가 바뀌거나 창고만들고 더 수탈하거나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이되어서 그러는가 보다.
새로운 시도가 좋은 것이라면 더 하게 해야하는데 그게 아니면 말리기도 해야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때의 일이 뭔지 잘모르겠다.
자왈 "자로가 슬(현악기 거문고 비슷한 것들)을 타는데 굳이 내집에서 탈 필요가 있나"
문인들이 이걸 듣고 자로를 공경하지 않자
자왈 "자로는 당에 오른 사람인데 다만 방에 들어오지는 못한 것이다."
자로의 슬을 연주하는 것이 별로 였던 것인지 폄하했는데 그건 그럴 수 있기도 하다.
악기 연주를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 것인데
문젠 다른 사람들이 이걸 빌미로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시한다는 말이 된다.
괜시리 남을 평가 했다가 뭔가 이게 아니다 싶게 한 것이다.
그래서 변명을 해보는 것이 승당은 되나 입실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평가방법을 그후에 여러 곳에서 따라하는가 보다.
문안으로 온다거나 마당에 있다거나 승당하거나 입실하거나 좌석했다거나 하면서 응용하면서 남 평가하는 것을 즐기는 못된 버릇을 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로인해 선입견이 생기고 사람을 규정하는 애초에 논란이 될만한 짓 말이다.
규정이 뭔지 알고 해야 하는데 항상 겉멋으로 남 따라하려는 섣부른자가 있다.
그리고 자로를 우습게 보려는 제자들은 자로가 얼마나 맘에 안들었으면 이 한마디에 이때구나 싶어 이걸 빌미로 자로를 무시하게 되나, 뭐가 문제인가, 자로가 너무 사람들을 막대한 것인가, 사람들이 너무 무지한 것인가.
자공이 묻는데 "사(자장)와 상(자하)을 비교하면 누가 더 현명합니까?"
자왈 '사는 과하고 상은 불급 즉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사가 더 나은 건가요?"
자왈 '과한게 미치지 못한 거 보다 나은건 아니다.'
자공이라는 놈이 남들을 비교시키면서 떠보는 짓을 한다.
그걸 시시콜콜히 대답하는 공자도 한심하고
이런 한심함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자공이 교활한건가
자장이 더 나은건가라고 되물으니 이미 자공은 자장편인 거 같다.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거지 그걸 보고 물타는 공자도 힘들다.
과유불급이라는 것인데 그게 그거라는 것이다.
계씨는 주공보다도 부자인데 염구가 계씨를 위해 세금을 더 걷어 계씨의 부를 더 늘려주었다.
자왈 "내 무리가 아니다. 북치며 공격해도 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이지 글케 가르쳐 놓았더니 한다는 짓이 이따구니 승질이 나지
겨우 학문을 배운 것인데 계씨의 배나 불리는데 자기의 존재성을 드러내면 남 돈이나 벌어주는 것이 그리도 대단한 사업이라고 지금껏 공자 믿에서 배웠나
공격해서 때려죽여도 된다. 이런 인간은
자장이 선인의 도를 묻자
자왈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지도 않고 이룰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선인들이 행한 것을 해보지도 않고 뭔가 듣기만하고 남의 비판이나 설명을 보고 그렇게 쉽게 안다는 듯한다고 그들만큼 되거나 그이상을 가는 것은 어렵다. 지름길이나 찾으면서 뭔가 더 숨은 비법이 없나 하면서 남의 그럴듯한 말에 될거 같은 것은 없다. 선인이 한 걸 나도 해야 하고 앞에서 해본걸 나도 해봐야 한다.
직접 해본 것과 이론을 듣거나 정보를 알거나 지식을 익히는 것은 다르다.
자기 것이 되고 자기만의 경지를 가는데 당연히 그만한 시간과 공들임이 있는 거것다.
자왈 "말이 진실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 군자인가 꾸며대는 것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대개는 이렇게 하는 것이지만 판단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기준이 다르면 다른 분별이다.
이 기준으론 능력있고 저 기준으론 착하고 다른 기준으론 범죄자이고 또 어떤 기준으론 음치이고 또 다른 어떤 기준으론 골통이다. 한사람이 이렇게 다양하게 분별된다.
그럼 군자라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보는 것일까?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판단하기 어렵다.
자로가 물었다 "들은 것은 곧 행해야 하나요?"
자왈 '부모형제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나'
염유가 물었다 "들은 것은 곧 행해야 하나요?"
자왈 '들었으면 행해야지'
공서화가 물었다. " 자로가 들은 것은 행해야 하느냐고 물을땐 부모형제가 있다고 하고 염유가 물을땐 들었으면 행하라고 하니 미혹되어 감히 물으니 무엇 때문에 그리 답하나요?"
자왈 '염유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하라고 한 것이고 자로는 너무 나서니 좀 물러나라고 한 것이다.'
이 대답이 그리도 어려운 것인감
자로가 물은 것하고 염유가 물은 것이 문자로는 '들은 것을 곧바로 행하느냐' 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자로가 이 질문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하고
염유가 이 질문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다르다.
누구나 대개 말은 비슷한 것을 한다. 그건 관용어라서 그렇다. 남의 말을 따라하고 복사해서 하는 것이니 다른 것인데 비슷하게 알고 질문하고 말하는 것은 말을 그렇게 밖에 할줄 몰라서이다.
자기의 사정에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말은 누구나 하지만 잘하는 건 다른 것이다.
자로는 지나치게 나선다.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명에 못죽는다는 말도 공자가 한다.(이 제자를 평하는 것은 내가 생략했다.)
이런지경이니 부모형제 생각해서 너무 나서지 말라는 것인데 그건 잘못하면 그러다 다치거나 죽는다는 것이다. 자로는 들은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공자가 말하면 공자가 그랬다고 말하면서 더 설치고 다닐 것이고 그러다 정말 큰일 치른다.
염유는 상당히 우유뷰단한 사람같은데 이사람이 자로와 같은 것을 질문했겠나 거친 것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뭔가 나서서 일 만들자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말은 같지만 다른 것을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답이 다르다.
말을 넘으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말은 다들 비슷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자기가 문장을 만들고 구성하며 조합하는 것을 하는 것은 어렵다.
대개가 습관처럼 쓰고 남들이 사용하는 말을 따라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이 같은데 하고자 하는 의도는 다른 것이다.
근데 문제는 말이 같으니 같은거라고 듣는 것도 문제이다.
말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듣는 건 더 어렵다. 남이 그 사람만의 어떤 사정이나 개념이나 의미를 그러한 말로 하고 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어서이다.
공자가 광 땅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안연이 뒤쳐지게 되었다가 뒤늦게 돌아오자 자왈 "난 니가 죽은줄 알았다."
'스승이 있는데 제가 먼저 죽을리가요'
스승보다 부모보다 배우자보다 가족보다 먼저 죽지 않는 다는 것이 남을 가슴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겠지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세상은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
계씨 집안의 계자연이 물었다. "우리집 가신인 중유와 염구는 대신(훌륭한 신하)인가요?"
자왈 '난 뭔가 남다른 질문일까 했는데 중유와 염구를 묻나 대신이라는 것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고 그것이 안되면 그만두는 것이다. 중유와 염구는 그만한 사람은 아니고 신하 머릿수나 채우는 정도것지'
계자연이 또 묻는데 "그러면 그들은 따르기만 하는 자들인가요?"
자왈 '아버지를 죽이고 임금을 시해하는 것 까지는 따르지 않겠지'
전체적으로 봐서 이 계씨 일족을 공자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놈들 밑에서 섬기고 있는 제자들이 또 맘에 안드는 것이다. 먹고 살려고 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래서 막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잘한다고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일지도.
그런데 이런 놈이 와서 염장 지른다. 니 제자가 내 밑에서 일하는데 그사람들 어느정도 사람이냐 한다.
근데 그 대답이 참 맘에 안든다. 도로 섬기고 도가 안되면 그만둔다는 것인데 이게 이후에 너도나도 이걸 사용하면서 나라에 도가 행해지면 일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그만둔다는 말을 씨부린다.
공자도 보면 상당히 언짢아서 던지는 말이고 변명인데 이걸 대단한 말로 알고 공자처럼 말하면 좀 그렇다.
만약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에선 그냥 숨어 지내거나 일하지 않으면 그동안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걸고 싸우고 실재로 피흘리며 안타까운 어린 생명들을 희생하며 이루어 온 것은 뭐가 되는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가 도가 아닌 세상을 도가 되는 세상으로 되게 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저절로 도가 되는 세상이 되는가 도가 되는 것이 저절로 되면 그후에 일하러 나오는 놈들이 무슨 소용인가
없어도 좋아졌는데 있어서 뭐하나
도가 되지 않은 세상일 수록 더 도가 되게 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고 도가 되면 물러나는 것인데 도가 되어가니 내가 아니어도 수월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거꾸로인 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하는 공자도 참 어이없다.
그래서 임금이나 부모를 죽이면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막아야 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때려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만둔다니 그게 어디 할말인가 미필적고의이고 방조한 것과 뭐가 다른가
제자들도 형편없고 공자도 변명이나 뇌까리고 돼지세끼들이 나라의 수장들이고 참말로....
자로가 자고를 비의 읍재로 취직시키자
자왈 "남의 자식 망치겠구나"
자로왈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니 정치를 하면서 배우는 것도 되는데 꼭 독서한 후에 배운다고 할 수 있나요?'
자왈 "이래서 말잘하는 놈이 싫다."
일하면서 배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건 아래에서부터 잡일이나 쉬운일 하면서 배워가는 것이 되고 정치이고 마을을 다스리는 수장으로 가는 것이고 게다가 비라는 마을이 좀 거친 곳이라고 하는데 아직 아는 것도 부족한 자고를 수장으로 하니 전도된 것이 될 것이다. 배우는게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냉정하고 여러 유혹에 걸리고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것에 스스로 길을 찾아가고 결단하며 일관성 가지면서 처리해갈 수 있을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독서하고 배운다는게 그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처럼 알것인데 그건 배움이 아니다. 머리에 때려넣고 말재주 배우고 아는 척하게 만든건 실천이 아니다. 능숙하게 행할 수 있게 되고 인격적인 성숙도 된 것을 말한다. 자로는 성질이 급해서 머리가 떨어질것도 같은데 말을 잘하나보다 교묘한 변명을 하는 것이 변명자체를 나무라기보다 변명해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 문제다.
변명하지 않을 일 처리가 아니라 일을 저지르고 나서 꾸미고 확대해서 없던 설명을 하면서 처음부터 그랬다는 식이고 의도가 없었으니 변명하는 것인데 있었던 거처럼 뭔가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한 거처럼 속이는 것이라서 나쁘다. 그리고 그 이유들도 한두번의 비판이면 설자리가 없는 허술한 것이어서 별다른 생각없었던 것인데 말로만은 끝까지 우기며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안되게 할 수 있는 것이 배웠다 하는 것이고 그래야 일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누구나 감정이 동기가 되어서 말하면서 말을 그럴듯하게 논리적이고 고상하게 말하면서 꾸미는데 이런 것도 해당된다.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다.
자왈 " 내가 나이가 더 들었다고 어려워 말고 너희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는데 만약 알아준다면 어쩌겠느냐"
자로가 대뜸 나서서 말하길 '천승의 나라가 대국사이에 끼어 곤란하고 전쟁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여도 내가 3년이면 용맹하게 하고 바름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듣고 웃었다.
"염유 너는 어떠하냐?"
대답하길 '사방 6.70리 정도나, 5.60리 정도 되는 작은 나라를 제가 다스리면 3년이면 백성들을 풍족히 할 수는 있고 예악은 군자를 모셔와 하겠습니다.'
"공서화 너는 어떠하냐"
대답하길 '제가 능히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배우길 원합니다. 종묘의 제사나 제후의 크고 작은 모임을 예복을 입고 치뤄보고 싶습니다.'
"증석 너는 어떠하냐"
그때까지 슬을 튕기고 있었는데 탕하고 소리내고 마치면서 말하길
'저는 저 세사람과는 다릅니다'
자왈 "누가 상처받나 각자 자기말을 하는 것인데"
증석이 말하길 '늦은 봄에 봄옷을 입고 성인 5.6인, 아이 6.7인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대에서 바람 쐬고 노래 부르며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가 듣고 감탄하며 "나도 증석과 함께 하겠다."
세사람이 나가고 증석이 남아서 물었다. '세사람의 대답은 어떠한가요?'
"각가 자기의 뜻을 말했을 뿐이다"
또 물기를 '왜 자로의 말에는 웃었어요?'
자왈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로써인데 그말에는 겸양이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또 물었다. '염구가 말한 것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닌가요?'
자왈 "사방 6.70리나 5.60리나 나라가 아닌가 나라이지 그걸 아닌 척하며 말하는게 그렇지"
증석이 또 물었다.'공서화가 말한 것 또한 한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닌가요?'
자왈"그렇지 종묘와 제사와 모임이 다 제후의 일이 아닌가 그일이 작은 일이라고 하면 뭐가 큰일이라고 하는가"
좀 웃기는 단락이다. 이런 비슷한게 다른 곳에도 있는데 반복해서 이러니 뭔가 의도를 가지고 편집한게 분명하다. 게다가 증석이 하는 짓을 보고 개그하는 것 같아 얼마나 웃었는지 이게 뭔 지랄인지
남들이 진지한 대화하는데 슬을 켜고 있다는 것도 웃기고 탕하면서 시선집중 시키고 난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입때는 것이 거의 영화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누구의 몫인가?
그리고 다들 나간 후에 누군 어땠나 누군 어땠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려고 자꾸 공자를 찌르며 묻는 것이 가증스럽다. 이런 놈이 봄에 목욕하고 바람쐬며 무욕 한 듯하고 소탈한 듯이 하니 이런 개지랄이 어딨나 그 드러운 욕구를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공자도 그렇다. 이걸 일일이 답하는 것이 이것도 멍청한 것인가 이걸 즐기는 것인가 것참
하긴 자로가 천승지국 어쩌구 할때 비웃는 거 보면 속이 탔것다. 저런 것도 나에게 배우고 있나 싶어서 말이다.
천승지국이 허영이고 교만이라는 것이라서 염구는 그걸 사방 6.70리의 작은 나라식으로 하니 이건 또 뭔 물건인지 답답하다. 거기에 종묘에 제사지내고 제후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관리 책임자가 되는 것이 이미 벼슬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하는 것인데 겸손한 척하는 것이 가증스럽다.
에나 지금이나 공부하면서 허영이고 교만함이 참으로 힘들게 한다.
겨우 책상이나 쓰는 빗자루를 익히면서 세상의 악을 쓸어버리겠다고 떠드는 것이니 이건 맞아야 하는데 나이든 것들을 때릴 순 없으니 힘들지 힘들거야
도올
남회근
배병삼의 글을 참고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