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18. 9. 25. 18:37

앞에선 반복속에서 차이를 알아채는 것을 말했다. 사실 아는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인데 그렇게 살기위해선 그것을 알기도 해야 해서 또 아는 것으로 말한게 있긴 하다. 모르고도 하는 것이 있는데 지금은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많이 힘든 세상인거 같아서 좀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오행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알아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어보아야 한다.

지금은 이런 것이 최첨단의 철학이 되고 있다.

그러니 뭔가 개념이 있는데 그 개념이 왜 중요한지 그게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다면 결국 서구철학을 연마할 수밖에 없다. 그런면에서 서구철학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은 함축적이어서 하나의 개념에 어떤 것이 들어있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고, 또 이런 것이 명확하게 이러한 것이냐라고 정의내릴 수가 없어서 제각각인데 그로인해 문제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서로간의 해석의 다름과 관점의 다름으로 싸우고 살인하고 나라를 망치는 일이 생기는 이게 병이다. 그래서 결국 서구철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 게 된다.

하나하나 자세한 구분을 해야 하고 의미를 차이 내어야 하고 확대 해야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개념이라는 것도 탄생시켜야 하고 성장시켜야 하고 확장시켜야 하고 유지하기위해 가속도 있어야 하고 관성도 있어야 하고 고집도 있어야 하며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참고 견디어야 하며 새로운 것이 나오고 사라져가는 것도 봐야 한다.

개념이든 뭐든 살아있는 것마냥 성주괴공을 반복하는 것이고 그러한 반복속에서 다름이 있게 되고 또 있게 하기위해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행론을 보면 차이를 알 뿐만아니라 서구철학보다 더욱 상세하고 적용하는 것에도 그 세밀함과 드넓은 것이 놀라울 지경인데 역시 문젠 이걸 알아보는 눈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점치는 곳에서 점치는 용도이고 동양철학자들이라는 자들은 학술적인 것이 되고 의학에서 의학에서만 쓰고 풍수에선 풍수로만 쓴다.

다들 지식이 편중되어서 그 전체적인 일관성을 얻은 경우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그래서 남의 철학이나 학문에 경도되어서 자기의 눈마저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비난이야 나역시도 그다지 아는게 없어서 말하기 뻘쭘하다.


그리고 다른 것으론 의미부여라는 것이 있다.

이건 만약 목형의 산이 있다고 치자 (고깔형의 산이다. 끝이 조금 둥글하게 된 것이다. 뽀죡하면 화형이다.)

그냥 삼각형의 산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목형이라고 오행이라는 의미체계로 보려고 한다.

이게 하나의 무한한 거리의 지점을 건너는 것이 된다.

즉 건널 수 없는 것인데 우린 너무 쉽게 건너간다. 비약이라고 한다.

전혀 논리성이 없고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간다.

이걸 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오행이나 역학을 백안시 할 정도로 무시하고 비난한다.

넘는 사람이나 넘지 못하는 사람이나 다 맞을 것이다.

그 넘는 것에 또 못 넘는 것에 나무라거나 상대가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다.

나도 그러면서 못 넘는다고 능력부재의 비난식으로 말하니 중간자적인 입장이기보다 넘는 것에 더 손을 들어주고는 있다. 흐흐 나도 그다지 성질이 좋은 것은 아님을 자주 보는 것이라서리

그렇지만 또 넘는다고 해서 꼭 오행이냐도 있다. 우리가 사물에 어떤 방법으로 지식을 가질지는 선택에 의한 것인데 그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그것을 아는 경우는 없다. 결코 이런 것임을 설명해준 역사도 없고 지금도 없으며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 해서는 안되는 불경한 생각이라고 한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것이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지만 이것이 조선의 주자학에서도 적용된 것을 보면 우리가 그 종교가 들어오는 것에 환장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말이나 하는 행동이어서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을 말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서구철학책을 자주 읽지만 정말 지겹고 짜증나는 것이 그다지 별거 없는 기독교의 이론으로 철학에 들이대는 것이다. 이젠 그리스식 철학도 지겨워서 죽을거 같은디 기독교적인 설명이나 그것을 예로 드는 것을 보면 철학자가 한심해 보일 정도이다.

동양에선 순이나 요나 공자나 맹자나 주나 무왕이나 문왕이나 이런 것만 들으면 경기날 정도이다. 너무도 흔하게 들어서 너무도 그런 것만 들어서 ㅠㅠ 이건 개인적인 승질 하소연인데 ㅠㅠㅠ


다시말해서 어떤 방법론으로 사물을 해석해서 볼 것인지 그것을 정해야 하는 것인데 

정할 때 하나의 것만 정해서 보라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장단점이 있고 적용할 곳이 다르고 적용할 때가 다르니 적절함을 필요로한다.

즉 산을 볼때 과학적인 지식을 써야 할 때가 있고 풍수적인 것을 쓸 때도 있으며 그냥 아무 관점없이 그냥 느낄 수도 있고 그냥 볼 수도 있으며 입산수도나 관광이나 다른 목적이 있다면 다르게도 보는 것이다.

무엇을 목적으로 보는지가 결정되면 어떤 방법으로 볼 것인지 정하면 되는데 이게 어려울 것은 없어 보이지만 대단히 어려웠다. 자기가 이런 방법으로 사물을 본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다양한 관점을 배우지도 못했고 평생을 하나의 관념이 주는 방법으로만 보고 살고 행하며 살고 알고 살며 그렇게 사육되어서 시키는 대로 하다 죽는 것인데 이걸 자랑삼아 말하기도 한다. 한심하지 말야 ㅜ

근데 지금도 별반 다르진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떠드는 것이고 이런 다양한 관점을 다양한 용도에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시도하며 그런 것이 일반화되면 이게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이 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해서이다.

내 눈을 내가 떠서 보는 것인데 누군가의 의도적이거나 강요이거나 이유없는 것이거나 납득 되지 않는 것이거나 내 의지가 아닌 눈으로 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을 목형의 산으로 볼때 여기서 생기는 것이 이런 목형의 기질이 나하고 맞는 것인가이다.

내가 정치를 하고 싶고 공무원이 되고 싶어야 이 산이 거기에 응해주거나 도움을 줄 것인데,

이때 응하거나 도움이라는 것이 약간의 차이를 준다는 것이다.

이런 산이 없는 곳에 살거나 태어난 것보단 차이가 있다는 것이고 그런 차이를 보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크냐는 것은 다르 것과의 연관에서 따지는 어려운 이론이다. 다만 산 하나만 두고 보면 가장 클 경우 꼬장 꼬장한 공무원으로 사시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이러한 응함이 온전히 받게 되는 것에 무엇이 있냐면 우선 부모나 조부나 증조부에서부터 이런 것을 원하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 그 소원을 이어받을 의지가 있는 자가 후손으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 된다.

이런 이어짐이 아닌 경우의 응함엔 그 차이가 다소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없지는 않다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으면 어떻게 되느냐면 오른다. 목형이니 오르는 것에 도움이 있다. 다만 무엇에서 오르냐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향에 따라 다른 것이 된다.

왜 조상부터의 소원이 있어야 하면 그러한 의지가 그러한 땅에 살게 하고 죽어서 그러한 의지에 해당하는 곳에 묻히게 된다. 이걸 명당에 묻힌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 의지가 본심이면 그런 의지에 맞는 곳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즉 의지의 일관성과 맥락이 이어져야 후손이 이어 받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혈은 한사람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땅이 그냥 주는 것도 아니며 하나의 가문이 오랜 세월의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그저 우연히 묘를 잘써서라고 일화에 말하지만 그런 것은 잘 읽어보면 그런 의지가 있엇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줄 기이한 인연이 있어 그런 혈을 가지게 된 경우이다.

그렇지 않는 우연히 이루어진 경우는 없고 그러면 결국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있는 것은 흔하다.

즉 차이를 만드는 것이며 그 차이는 한 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누적이 있으면서 차차 진행된 것이 결실이 된 것이다. 명당은 기본이 삼대후 발복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대 발복이나 당일에 당월에 당년에 발복되는 말도 많다. 그런 것은 그런 일만 그렇게 된다.

그런 일이란 오랜 세월이 필요지 않는 것이고 오랜 세월 유지하지 않다도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면장이고 아들은 스포츠 선수 손자는 그림 그린다. 이런 경우가 요즘 다들 그런다. 아버지가 하는 것을 아들이 안한다. 손자는 당연히 다른 것을 한다. 이런것에 과거식의 명당이 무슨 의미가 있나 다 지 맘대로 하는 것인데 아무 혈이나 들어가서 아무 것이나 되고보는 것이다. 한때의 발복을 바란다. 한 십년 이나 한 번의 대박이나 한번의 끝발을 추구하면서 그런 곳에 살면 그게 그리 된다.

그런 의지가 있으니 그러 의지가 있는 곳에 살고 그런 것이 응하면서 그리 산다.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그런 유목민이 되었다. 이게 나쁘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을 알고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떤 것이 어떻게 응하는지 알아야 그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햇듯이 우리가 여러 방법을 알고 그것을 적절하게 판단하며 그때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라서 그런 것을 해가면 된다. 오랜 가문의 유풍이 좋고 오랜 보수와 전통이 좋고 영광을 원한다면 그런 것을 선택해가면서 만들어가고 그보다 지금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다음은 다음이니 그에 따라 사는 것이면 또 그렇게 한다.

뭘 할지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거나 부러워하거나 그런 나약한 심리보단 뭐든 내가 선택한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면서 능동적인 활동이면 된다.


그리고 목형의 산이라는데 정말 그것이 목형의 산이라서 그러한 영향이 응하느냐 이러면

이것을 안다면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다. 의미란 그렇게 보고 그런 운이 오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이것을 알면 오지 않게도 한다. 내가 목형의 산으로 보고 목형의 운이 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목형으로 볼 수도 있고 난 그저 산으로보거나 풍수에선 목형이라드라 하지만 풍수적으로 볼 경우이고 난 지금은 그런 것을 하지 않으니 그냥 산으로 삼각형의 산으로 멋있고 아름다운 비례가 좋아보인다고 보면 목형의 운이라는 것이 오지 않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했을 뿐인 것으로 운이 섭리가 그러한 천지 이치가 무의미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 말했지만 무엇을 아느냐로 어떤 능력이 되고 어떤 일이되고 어떤 운명이 되고 어떤 영향이 되고 어떤 것이든 되다고 하면서 지식의 위험이든 위대함이든 무서움이든 이로움이든 원리든 힘이든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즉 베이컨 말대로 아는게 힘인데 아는대로 된다가 된다.

내가 아는 그것이 이루어진다.

사주식으로 하면 누군가 영향을 주려고 내 사주를 이용해 뭔가를 한다면 

그 년월일시의 사주가 지구상에 나혼자인가? 우리나라에서만 50-60명이 있고 세계적으론 2백배는 더 있을 것이다. 근데 그 영향이 나에게 오나 왜 오나 저 많은 사주에 굳이 나에게 오나 내가 그러한 영향이 올 때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 내 사주 아니다. 라고 그럼 그 영향은 다르게 된다. 그럼 내 사주 아니냐면 맞다. 다만 년월일시가 맞다는 것이다. 그 사주로 사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말은 그 사주로 살아가면서 내가 이룬 것은 같은 사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내가 이룩한 것이 어찌 저 사주만으로 다 되느냔 말이다.

겨우 년월일시일 것인데 거기에 내 정신이 내 마음이 내 이상이 영혼이 들어 있느냐 말이다.

넓게 잡으면 쥐띠면 나인가? 쥐띠가 한 둘인가? 이것하고 그 사주가 한 둘인가? 라는 것이 뭐 그리 다른 것인가 분명 다를 수도 있다. 사주에 해당하는 사람이 적으니 나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차이라는 것이 있다. 작은 차이가 이미 다른 것이 된다. 어긋나는 운명의 갈림길을 보게 된다고 했다.

즉 내가 운명이나 신의 섭리나 그러한 것을 어떤 원리를 알게 되면 그 섭리는 어긋난다는 것을 말했다.

그 작은 어긋남이 생명이 왔다갔다 한다.

그러면 박재봉이라는 것이 있다. 이름인데 이러면 어떠냐?

이름으로 뭔가 영향을 주려고 한다면 역시나 비슷하다.

한국에 박재봉이 나 혼자인가이다. 그래서 위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근데 만약 박재봉이 나 혼자라면 어떤가?

그래도 비슷하다. 즉 그 운명이나 영향이 올 때 박재봉이 내가 아니라고 한다.

난 살면서 이름을 쓰지만 그 이름이 내가 아니다.

왜 아니냐고? 왜 그 이름이 나이어야 하냐고 되묻고 싶다. 

난 사람이고 바로 나! 지금 글쓰고 배고프고 머리 지끈거리면서 뭔가 쓰것다고 이러고 있는 이 나!!!

이 바로 나를 어떻게 규정하려는 것인가

박재봉은 태어나서 이름 붙인건데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가?

그런 어리석음이 어딨나 40년 넘게 살아왔는데 어릴 때의 내가 지금의 나인가?

전혀 다르고 같은 것이 그다지 없는데 왜 내가 박재봉인가

박재봉이라고 이름 짓는 그날 이미 난 박재봉이 아닌게 되었다.

난 어떤 것으로 부른다는 것에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신관이나 현실에서 이름을 묻지 않는다.

대화하기 위해서 지칭을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혼자 떠올릴 때는 이름을 안 부른다. 사실 일상에서도 내가 이름 부르는 걸 들은 분들이 별로 없다. 왜 안부르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름에 그다지 관심도 없고 그것이 그사람을 아니라서 씰데 없는 것이다.

이건 신관들과 대화하면서 알았다고 했다. 이름을 물으면 지어서 대꾸한다.

내가 알아서 불러도 대답한다. 매일 다르게 불러도 알아서 대꾸한다.

이름은 그런 것이다. 그사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영향이 오면서 박재봉을 찾는다면 못찾는다. 난 이미 그이름과 다른 사람이 된지 한참이다.


의미부여라는 것이 이런 것이 된다.

그렇게 본다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봄으로서 의도하는 것이고 그런 운이나 응함이 있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고 적용하고 쓸지는 그 사람의 의지이다.(굳이 운용이라고 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 이름이다.)

의미 그자체에 절대적인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규정도 없으며 그런 것에서 자유롭지 않으면 않을 수록 그런 영향에서 더욱 벗어나지 않게 된다.

어긋나고 벗어난다고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병을 떨어뜨리고 문지방을 발로 차는 정도로 지나가고 사고날 것을 피 한 방울로 퉁치고 다른 것으로 액땜하면서 지나가게 된다. 아주 그 영향이 없게 한다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볼 필요 없다.

운명을 어긋나게 한다는 것이다.

살짝만 어긋나도 죽을 운명이 산다.

죽음과 삶이라는 것이 반대가 아니다 약간의 차이,

그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