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2
날 극하는 것이 관이라고 했는데 날 극한다는 것은 날 가르치는 것이고 날 다듬는 것이어서 이 세상이 나를 뭔가를 위해 단련한다는 것이 됩니다.
너무 세상을 의인화 하는 말이지만 그런식으로 우린 극당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적응하며 자기 능력을 기르고 헤쳐나가며 사는 것입니다.
극한다는 것이 또다른 생이어서 극하면서 주는 것이 됩니다.
극을 받지 못한 것은 그 힘이 나약하고 어려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극을 받고 살면서 극을 배우고 극으로 타인이나 세상에 활동하기도 합니다.
극을 쓰려면 극을 당해봐야 하고 극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관이라는 것이 누구나 되고 싶은 것이고 또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무관도 있고 그런거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있는데 그런 것도 장기적인 시공으로보면 결국 관이 되기위한 과도기이지 그것이 모든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개체가 된 그것이 이미 하나의 관을 형성했다는 것이어서 하나의 체계적 순환이 되지 않는다면 개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서 조직적인 흐름과 체계와 구조가 있다면 관이 됩니다. 그중에 인간이라는 또 생명이라는 것이 가장 복잡한 체계이고 구성된 관으로서 본보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개체는 다시 개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체계가 되어야 하고 초월하고 도약해가며 확장하는 것이어서 또다른 전체로서의 나아감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개체로서의 전체가 있고 그 다음의 전체가 되는 구조나 환경이나 시공이 있을 것인데 그러한 것으로의 나아감을 멈추지 않겠죠.
자천에선 확장하고 성장하려는 것을 노골적으로 하려는 것인데 누구나 해가는 보편적인 흐름이라고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관을 우선 자기 틀, 신념, 관념, 철학, 주관이나 고집이나 이런 것이 되겠지만 이것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이것이 현실에 나타나는 방식은 너무도 다양합니다.
무관도 관이 나타나는 방식이라서 그 응용은 복잡합니다.
사업을 하려고 가게를 내어도 하나의 관을 만든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이념이 있는 것도 그러하고 하나의 관계를 만들어 유지하는 것이면 또 그것이 어떤 외부와의 구분이 되고 자기 완결되는 것이면 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관에 따라 사는 방법이 다른기도 하는데,
남의 관에 사느냐, 내 관에 사느냐가 있게 되는데, 대개 지금은 관을 직장으로 씁니다.
내 직장이냐 내 회사냐이고, 내 직장처럼 다니느냐도 되며,
남의 직장에서 사느냐 남의 직장처럼 다니느냐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오면서 관이 겨우 밥벌이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과거에 그런 것을 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어서 세상을 지배하는 종교, 철학, 체계, 국가, 도덕, 윤리, 규율, 법, 명령, 예법들을 의미했다는 습성이 내려와 직장을 이런 것과 혼동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관인건 같기도 하니까요.
직장을 위한 교육이고,
직장을 위한 가정이고
직장을 위한 학문,
직장을 위한 생활 환경,
직장을 위한 대인관계,
직장을 위한 영혼,
직장을 위한 종교,
직장을 위한 정부 정책,
뭐든 직장이 기준인데 우리의 기준은 밥벌이가 전부이게 되었습니다.
이 기준이라는 것도 관입니다. 지표이고 잦대이며 가치관이고 인생관인데 이런 것이 관입니다.
도덕이나 규율이 관이 된 시대는 이젠 아닌 듯하고 앞으로의 숙제가 될 것인데 이런 세상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오기는 할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어떤 도덕이냐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거의 도덕이나 종교, 철학이나 신념, 이념, 논리나 규율을 무턱대고 따라하려는 것은 곤란하게 됩니다.
왜 그런 도덕이고 누구를 위한 도덕이며 누구나 행할 수 있는 도덕이며 언제나 수정할 수 있고 의문을 가지며 비판할 수 있고 문제 삼을 수 있으며 모두에게 열린 도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관도 이런 것이어야 하겠죠.
이런 세상이 되기위한 지금의 혼란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이게 관인데 그래서 관은 좋은 경우와 나쁜 경우가 있습니다.
법이라도 나에게 좋게 작용하거나 좋게 다루거나 좋게 보거나 좋게 강요하거나 좋게 활용되면 정관이고,
나쁘거나 힘들고 불편하며 고통이 되어가면 편관입니다.
관이 호불호나 길흉이나 시비를 논하게 되면 정편관이 나누어집니다. 정관, 편관 이런식으로요.
또 체제 순응적이면 정관이고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체제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 편관입니다.
둘 다 관인건 맞습니다. 그래서 관에 순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개가 관에 따라 행동하려는 것이 있고,
그 행동에 정당한지 따지기도 하고 비판도 하려고 하며 그로인해 힘겨움으로 보게 되는 것도 있고 현실적인 사정을 이해해보려는 것이 편관입니다.
그래서 정관은 법을 비판하고 따지려는 것이나 저항하려는 것이 아니고 법을 지키고 다루고 법에 따라 뭔가를 하려는 것이며 편관은 법이든 뭐든 그것이 실재에서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적용하며 그 대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가 편관입니다.
정관은 직장이나 관념이나 그 관의 태두리나 환경내에서 활동하는 것이고
편관은 그 관이 다루는 대상에 신경쓰는 것인데 소비자를 만나거나 대민업무식이거나 직접 발로 뛰고 현장에서 일하며 일선에서 일한다는 그런 식입니다.
크게는 운명이나 천지가 되어 전염병이나 천재지변이고 운명적 상황이나 국가나 세계의 흐름이나 그런 것이 편관이고 무조건 아프고 힘들고 불행하고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라서 세상을 더 큰 체계나 조직이나 즉 관공서나 대기업이나 그런 조직체계들도 그러하고 운명이 천지가 힘들게 하는 듯한 건 다 편관입니다.
또 그런것을 내가 다루거나 내가 원하거나 내가 편관이 되면 이런 것을 하고 싶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편관이 되거나
세상의 편관을 원하거나.
이런 것이 좋게 작용하면 정관입니다.
그런 정관은 유지 관리하고 이런 관안에서 안주하며 실행하는 것이지 관자체를 보는 안목은 없습니다.
관을 위하면 정관이고 관이 원하는 것을 하려는 것은 편관입니다.
경찰이나 판사나 검사나 군이나 경제나 의사나 정치나 철학이나 이런 것이 편관입니다.
세상에 안 좋은 것을 다스리려는 것이고 안좋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것을 개혁해 보려는 것이고 더 나은 체계를 원하는 것이고 체계로 뭔가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라서 이런 것이면 다 편관이 됩니다.
소설을 써도 이런 목적이면 그건 편관입니다.
편관이라는 직업이나 사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편관이라는 개념을 숙지할 필요가 있는데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충 그런 것이면 편관이라는 것으로 어떤 개념인지를 이해하면 됩니다.
다른 십성도 어떤 개념인지가 있는 것이어서 정해진 십성이 있어서 이건 꼭 이 십성이고 이건 꼭 이런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법이라도 인성으로 쓰는 사람도 있고 재로 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관이다라고 하는 것이기 보다 이런 것을 관으로 보면서 살아간다를 봐야해서 어떤 것을 관이라고 하는가를 외우는게 아니라 어떤 개념이면 관이다.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말하면 주로 이런 것이고 어느 정도 이것에 치중한 것이지 꼭 이렇게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중요하니 염두에 두고 판단 해야 합니다.
어느정도 관에서 편관적인 것으로 조금 치우친게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정관으로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관이 직접 대상을 대하는 것이 편관인데 경찰이라면 시민들이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 과거엔 무서워 했습니다.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안전하게 살게 하는 것인데 이런 안전이라는 것이 편관이 칠살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해서 불안한 것인데 불안함을 제어해주는 것이 경찰이고 이렇게 불안하고 불편하고 힘들고 아픈 것을 제어해주는 치료해주는 사라지게 해주는 것이 편관을 제어하거나 제살하거나 억제하거나 다루는 직업입니다.
그러면서 그들도 힘들게 업무를 보게 되는데 편관에서 일하니 결국 편관입니다.
그렇다고 정관이 이런 것을 안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이 더 편관에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정관은 더 정밀하고 깐깐하게 행동하고 일처리를 하겠죠.
상대의 사정에 더 관심두기 보다 규칙을 어기고 잘못한 것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법에 따라 행동한다거나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더 치중합니다.
사정이 있고 나름의 여러 실재상황은 다름이 있어서 그에 따라 융통성을 가져야 하는 것인데 그건 편관입니다. 그러니 편관은 하나를 해도 힘들고 부담감을 많이 가지면서 일하게 됩니다.
정해진 거나 시키는 거나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게 편관입니다.
정관은 고정된 상태에서 일처리하려고 하고 그렇게 환경이 주어집니다.
안정적인 운영이 중요하면 정관적인 것이고
실재의 적용이나 현장에서의 일처리가 있어야 하면 편관이다.
여기서 하는 말은 어떤 사람이 정관적이 성향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주어지는 환경이나 진행되어 가고 결과나는 것이 그런 정관적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의도하든 안하든 그렇게 되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운명이 되고 그런 사건이 일어나고 그런 상황으로 몰아져 가는 것입니다.
십성이 성격이기도 하고 운명 흐름의 방법이기도 하고 주어지는 배치나 환경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론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게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인데 십성이라는 것이 전에 말했듯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우리가 성격으로 받아 들이기도 하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사물을 그렇게 보기도 하며 상황을 그렇게 인식하기도 합니다.
이건 전혀 다른 범주인데도 그것을 십성이라는 원리 하나로 다 설명하는 어림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엉성하고 어찌 보면 현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체계이고 그 내적인 구조와 방향과 흐름을 알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순행해서 온 과거가 역행으로 가는 미래로 가는 것을 알게 하는 기묘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편관이든 편재든 상관이든 편인이든 편자가 들어간 것인데 치우친다는 의미의 한자입니다.
한쪽이나 변방이나 일선이나 현장이고 구체적인 실재성이며 대상과 이루어지는 교류이고 부딪히는 문제이고 즉 누군가가 있고 물건이 있고 다루는 것이 구체적으로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람 눈치 보고 무엇을 가진 것인지 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보고 무엇을 원하는지 봅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상이든 기업이든 정부든 뭐든 그것의 상황과 활동과 흐름과 지금 변해가는 것을 봅니다. 언제나 현실직시의 모습입니다.
타인과 함께 하면 편이 되고,
그런 거과 상관없이 하면 정이 들어갑니다.
편인 정인이라면 편인은 다른 사람을 신경쓰면서 생기는 감정이고,
정인은 자기 감정을 중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편인은 걱정을 하고 정인은 편안합니다.
식신 상관도 그러한데 식신은 자기 하는 것이 중요하고 상관이 남이 날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