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21. 1. 17. 16:38

육해

육해라는 것이 안 좋은 의미가 많습니다.

우리 사는 인생에 좋은 것만 있을 것은 아니니 당연하다고 하는 것인데

행복을 느낀 사람은 그 반대편에 육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내가 행복할 때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이 가져야 할 것이 나에게 올 때 내 운이 상승기라고 하는 것이고

내 것이 남에게 갈때 운이 하강기가 된다고 이기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닥을 기고 있을 때보다 하강하는 시기에 더 괴롭게 느낍니다.

내 것이 뺏기는 거 같고 잘 나가다가 그것이 무너질 때 인정하기 싫고 이럴 수가 없다고 하면서 번영하던 버릇에서 달라지기 싫어서 조금만 원하는 대로 안되고 덜해지면 그 불편을 견디기 힘들게 되죠

위에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와서 불행해서 미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래에 있을 땐 더 아래로 가더라도 이 느끼는 감이 다릅니다.

내려가기 시작할때 그 고통과 현상이 더욱 크게 보이는 것이라서 과거에 이 시기를 삼재라고 했습니다.

역마가 시작이고 육해가 본격적으로 그렇고 화개가 되면 반은 포기상태로 스스로 접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심리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운을 보는 방법이 바뀌고 그 바뀐 방법으로 세상을 보면 다른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잘 나갈 때 내려갈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쉽게 들을 수 있는 명언입니다.

그 명언대로 했는가 안 했는가는 이 시기가 오면 알게 되죠

그래서 육해가 오는 이유는 당연한 인생의 주기입니다. 그걸 누굴 원망하거나 직접 피해를 주는 00 놈이나 년을 욕해도 번지수가 틀린 것입니다. 어느 기업, 기관, 세상을 탓하고 원망해도 결국 내 인생의 주기가 일차적으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 운 탓으로 돌리고 주저앉거나 포기하거나 순응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해가 죽는 거 같고 죽을 듯이 힘들지만 그 죽을 각오로 임한다는 것도 됩니다.

전쟁에서 말하는 배수진 치고 즉 뒤로 절벽이고 물이라서 물러나면 죽는다는 각오로 임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장 힘들때 죽기 살기로 대들고 뭔가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발 올리기 위해서 또 손님 오게 하기 위해서 육해 방향에 술을 올리거나 뿌리면서 기원했습니다.

인생에서 순응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거역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만 결 따라 뭔가 의도하는 것이 인간이 사는 이유인 것이지 그저 이런 운이니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피해준 그 당사자에게 따지고 대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안 그러면 그 당사자가 자기가 대단해서 또 그래도 되는지 알고 행하게 되니 그 견주고 견제하며 대립하는 타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자천으로 말하면 우린 이 육해라는 죽음과 언제나 대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하면서 사는 것인데 이것이 긴장하고 순간을 영원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절박함이 없다면 공부도 성취가 평범할 것이고 뭘 하려고 하더라도 이런 의지가 아니면 행운이나 바라는 자가 될 것입니다.

죽음을 언제나 염두하면서 일상을 사는데 욕심부릴 것도 집착할 것도 없게 됩니다.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을 행동과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니까요

 

바로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뭔가를 의도하려고 사는 곳이 육해입니다.

하강기니 찌그러져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이니 거기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순응이면서 순응이 아닌 것이 되죠

그래서 나온 능력이 속도 즉 스피드 입니다. 뭐든 속전 속력로 빠르고 간단하며 단기간의 치고 빠지는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오래걸리거나 장기간의 계획으로 뭔가 하려는 것엔 안맞으니 그보단 속도로서 지름길로 속성하듯이 하는 것에 잘 맞습니다.

그래서 여긴 위험한 돈이거나 목을 잡힌 돈이라서 급전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돈이니 그렇습니다.

속성법이고 빠르지만 그 대가가 큰 것이기도 하죠

 

과거에 좌천당해서 변방에 적을 막는 일을 하다가 공을 세우고 중앙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한 공을 세우면 다시 오를 수 있는 것이죠 아니면 그럴만한 자기과시나 결과를 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도 하는 절박함이 있다는 것도 되구요

 

육해가 장성에서 90도가 됩니다.

직각으로 내가 가려는 방향을 횡단시키면서 잘라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내 맘대로 되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잘리지는 않겠죠 원이 아니라 나선으로 상승하는 거라서 그렇습니다.

다만 그런 방향에 따라 서로 간의 간섭이 있는데 이 직각의 방향이 뼈에 아프게 찔러오게 됩니다.

자오묘유나 진술축미나 인신사해나 이런 것이 서로 간에 직각이나 180도로서 정반대이거나 하는 것인데 이렇게 서로 간의 진행방향을 간섭합니다.

이걸 충이나 형이라고 하는데 또 재밌는 건 이런 직각이나 대충이 밀어내려고 찍고 대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끌어당기고 기대기도 합니다.

직각이 있어서 서로 기대어서 서있게도 됩니다. 대충이 밀어내어야 그것이 인력으로 당기는 힘이 됩니다.

목적이 없거나 대상이 없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서 어떤 존재든 그 대상으로서의 뭔가는 존재하게 됩니다.

역학은 공간으로 하면 여러 방향의 다른 것과의 관계로서 일상이 진행되는 것을 말하며

시간으로 하면 시간이라는 흐름으로 순서적으로 들고나면서 일의 진행을 하게 됩니다.

역행이 공간이 되고 순행이 시간이 되는데 시간적으로 흘러야 일이 순서가 있고 성취되니 이렇게 흐르는 것이 있어야 하고 공간의 역행의 흐름이 있어야 물질화와 의미가 주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그것이 되지 않게 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살 하나로 모든 현상을 다 알 수가 없지만

이것을 방향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적용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 간의 사이에서 일의 진행을 보기 때문입니다.

 

육해는 삶에서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더 나은 삶이 되기 위해 애쓰고 즉 죽기 살기로 못 오를 나무를 오르겠다고 발버둥 치던 그 모든 영혼들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죠 누가 아래로 내려가는 인생이고 싶겠어요

남이 못한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내가 가야 할 목적이죠

그런 길을 가다가 성공하기도 하지만 실패도 하는데 그런 한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육해에게 잘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길을 가던 사람들의 아픔을 알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