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바꿈
어릴 때 본 소설에 어디에서 스님인 분이 남의 몸으로 전생한다고 할까 신체를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그건 그다지 부럽진 않은 재주였는데 이유는 비위가 상해서입니다.
남의 신체에 들어가면 음 불쾌감부터 드는 것은 좀 내가 이상한 건가 ㅎㅎ
비위가 그렇게 좋지 않은 내 입장에선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것이긴 합니다.
영화나 만화 소재로 쓰면서 남의 신체로 뒤바뀌는 설정이나 신체를 옮겨 다니는 술법을 쓰는 것들이 있는데 그러면 그 자아가 온전히 유지될지가 궁금하긴 합니다.
신체의 달라짐으로 인해 성격으로도 차차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인데
얼굴이 어떻게 생긴 것만으로 성격에 지대한 영향이 있는 것입니다. 잘생기고 아니고 와 호감을 줄 수 있는 신체이거나 아니거나로 인해 대인관계나 사는 것에 그 영향이 크니까요
소설에서야 스님이니 그러한 감정들에게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금욕적인 것을 잘하지 못하면 그런 술법도 잘 안되었을 것이니까요
그런 술법을 하려면 그만한 감정을 끊는 것과 같은 의지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만큼 사회와는 멀어지는 것일 텐데 이 사람은 그로 인해 더욱 사회적인 영향이 커지게 되는 것을 보면 다른 것이 있긴 합니다.
신체를 옮겨서 더 할 것이 있는 거라서 그리 한 거 같고 원래대로라면 그런 사회적인 영향은 감정의 끊음으로 인해 사라지는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마 그 민족적인 또 종교적인 부대낌이 있어 보이긴 합니다.
즉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이겠죠
이 사람의 영향이 지금도 여기저기 있고 그 나라도 그 이득을 많이 보고 있으니까요
한 삶의 기행이 세계문화에 미치는 영향이나 그 민족의 사활에 미치는 영향이나 재미있긴 합니다.
자천의 입장에선 일단 저렇게 내가 말하는 마구의 한 방법으로선 그럴 수도 있는데 그 한 사람의 인생은 보기에 따라 비참한 것이기도 한데 이런 것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 말해주지 않고 어쩌지 못하는 운명의 흐름에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알게 한 욕망에 따라 산 듯이 하는 것이긴 하죠 실제로 그 주인공도 자기가 뭘 하려고 하는지나 왜 이래야 하는지를 다 아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준비된 스승을 만나고 공부를 하고 역시나 당연한 듯한 인연에 따라 서양으로 가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누가 사는 것인지 누가 그리 살게 하는 것인지 애매한 것이긴 하죠
자기 욕구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자기 욕구인지도 애매한 것이니까요
모르면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그것이 다라고 알면 되고
알려면 그 전체적인 의미 이해를 하면 좋지만 그건 언제나 더 더 상위의 일이니 참여되지 않는 설정에 기웃거리기도 어렵겠죠
자천의 다른 입장에선 이런 것은 그다지 권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신체 바꿈의 목적이 정확히 뭔지 애매한데
시해법 같이 신체 밖으로 나가서 뭔가 원하는 것을 이루거나 주변에 흐름을 변화시키거나 다른 의도를 하는 것 중에 이런 것도 있다고 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겠죠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하게 혼이 나가서 다양한 변화를 추구한 건 있으니까요 어느 나라에서도 신체 바꿈은 있었을 것입니다. 둔갑이라고 짐승 몸에 들어가서 돌아다니기도 하는 것은 전설로 내려오기도 하니 생각보다 일상일 수도 있구요
사람 신체만이 아니라 짐승 속이나 나무 속이나 살아있는 사람 속에서나 이런 건 흔히 나오는 전설이죠
여인의 꿈에 들어가 그 여인과 성교하거나 현몽으로 인연인 거처럼 속이고 혼인하거나 귀신의 장난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시해법으로 헛짓을 한 것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나도 당해본 것이 있고 또 다른 것도 있어서 이런 건 흔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헛짓거리 때문에 권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어느 정도 익힐 것을 권해야 합니다.
이유는 말 그대로 기본적인 자천의 능력이나 효과 중에 하나라서 이런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이런 것으로 뭐가 되고 어디까지 되고 그 원리와 작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걷는 것을 배우면 다리 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다리로 누굴 차거나 때리는 것을 한다고 걷는 것을 배우지 말라고 할 순 없습니다. 다리를 어떻게 쓸 수 있는 것인지 그에 대한 이해를 하려면 이것저것 다 해볼 것도 권하긴 하는 것이죠 이런 것보다 자천해서 뭘 하려고 하느냐라는 그 지향성이 명확하길 바라죠 이런 것이 저런 술법이나 개인적인 수준에서만을 위한 공부를 하려는 것이라면 계율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고 윤리를 말해주는 것이지요
이런 것도 지식이라서 알면 아는 것을 어찌할지가 되는 것이지 모르면서 그런 것에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겠죠 알아야 그다음의 할 것도 보이게 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에서도 다양한 길을 볼 수도 있는 것이고 무엇으로 덕행을 해갈지는 알 수 없으니 미리 이건 안되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판단을 남이 해줄 건 없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일차적인 공부이니 알아가면서 또 해보면서 자기의 길을 개척해 가야 합니다.
간단히 좋은 곳에 쓰면 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유치한 윤리관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것도 자신이 왜 그런지 알아내고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걸 이렇게 하면 다른 이득이 있을 거 같다고 하는 것이든지 어디에서 뭘 보고 성취할지는 해가면서 스스로 찾을 일이죠
물론 그렇게 간단한 윤리나 계율이나 선함으로 전파하는 것이 지금의 여러 곳에서 하는 것이긴 한데 그래서 그런 건 굳이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은 없고 그보단 다른 의견을 말해야 이것도 발전이지 않을까 합니다.
남 하는 말을 따라 하면 안 해도 되는 것을 하는 것도 되고 여러 의견을 말해야 발전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일단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합니다.
안 죽겠다고 남의 신체로 넘어간다는 것은 치졸한 것이고 그런 식으로 사회적인 욕구는 충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혼자만이 아니라 남과 해야 하는 모든 욕망은 사회적인 욕망이라고 일단 규정합니다.)
자천과는 상관없거나 아까 말한 그것이라면 모르는 것인데 그걸 제외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런 것도 이 방법뿐이냐고 하면 이런 거 아니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목적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아주 많습니다. 이러한데 굳이 이런 방법을 쓴다는 것은 그로 인해 해로움도 있고 득도 있을 것인데 그런 건 그걸 계획한 자들의 지적능력의 문제겠죠
대개는 공부할 수준이지 대의를 논할 수준은 아니라서 저런 술법이 공부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가르침에서 생을 넘어가도 전생을 기억하거나 과거의 혼이 계속 신체를 바꾸어가면서 수 천년을 이어왔다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자천의 성과가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자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공에 대한 이해가 치우친 것이 됩니다.
니가 누구였는지 그건 관심 없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으로 살아갈 건지가 중요합니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그리고 새로운 신체로 태어나면 새로운 신체로 태어나는 것이고 그렇게 항상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가면서 해야 할 것을 해 나아가 가는 것이고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진행되어가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내가 뭔가 하는 것인데 세상은 달라지고 있는데 난 달라지는 것을 거부하는 억지를 쓰면서 새로워지는 세상에 뭔가 한다면 이 모순을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뭔가 할 수 있을 거라는 두려움이나 불안함을 가진다면 너무도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무지이기도 합니다. 의지는 심층에서 관여하면서 달라지고 변화하는 외부에 따라 대응해 가는 것이지 그걸 의식으로 한다고 하면 순간의 상황에 현혹된 것이라서 왜곡된 인식을 가진 것입니다.
추상과 상위에서 사물을 대하는 것이지 그렇게 즉물적으로 사물에 접근해서 뭔가 하는 것이 아닌 것인데 오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재작년에 뭔가 하려고 했었는데? 하면서 뭘 하려고 했었는지 잊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이런 것이 잊으면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서 그런 것은 잊어도 되고 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은 그것을 잊어도 이후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발견하거나 관찰이 된다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이후에 내가 하고자 하거나 해야 하는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전생에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 이 생에서 그것이 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죠 지금의 의지는 과거에서 오는 것인데 지금의 의지는 다시 이후에나 다음 생이나 이어지겠죠 기억할 건 없죠 뇌로 자아로 의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과 상위의 흐름에서 하는 것이니까요
또 내가 과거의 기억을 안 하는 이유는 근친상간 같은 짓을 안 하려고 해서입니다.
내가 나이고 또 나였고 나일 거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나하고만 교접하면서 살아가는 이미 병이 된 것이고 변태이고 지독히도 외골수인 것입니다. 이건 도태됩니다. 자기이기만 하겠다면 자연에선 독입니다. 이런 건 사라져야 다른 자연들과 서로 쉽게 융화되고 도움되면서 살아갑니다. 잘 썩어야 거름이 됩니다. 안 썩는 건 고집이 센 거고 이건 독이고 쓰레기일 뿐이죠 사람도 영혼이 잘 사라지고 흩어져야 합니다. 아니면 귀신이거나 악령이 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생을 이어간다는 것은 참 독한 인간이기도 한 것이죠 귀신입니다. 세상에 해로움을 주는 것이죠
내가 다른 사람의 신체로 태어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배우고 익히고 이런 과정이 우리가 사는 것인데 그건 근친상간을 방지하고 다른 유전자, 다른 가문, 다른 조직, 다른 인종과 혼인하고 교접하면서 더 나은 신체와 정신으로 진보를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혼혈이 되어야 하고 잡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 순혈이나 순종이나 이런 것은 근친상간입니다.
신체도 뒤섞이고 혼도 뒤섞이고 난 잡종 주의입니다.
오직 남이 있어야 하고 적이 있어야 하고 나와 다른 것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그로 인해 더 나은 자로서 성취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니라면 그런 비위 상하는 사상은 거절합니다.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난 다른 나입니다.
전생으로 날 보는 것은 비참하죠 달라진 게 없다는 것만큼 괴로운 거나 허무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의 위에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나아가는 것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 과거의 것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내가 한심한 것이니까요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변화하면서 어느 순간 난 그전의 나와 전혀 다른 내가 되어있겠죠
이러려면 내가 나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더욱 나를 버리고 또 지우고 해체하면서 다른 내가 되는 것이 수월하게 해야 되죠
그런데 계속 그 자아를 유지하려는 것은 무아라는 것조차도 모르는 것이라서 이런 건 자천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아의 일관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의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지금의 자아의 일관성을 원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하려고 별짓을 다하는 것이죠 기억을 옮기고 새로운 신체를 만들고 하면서 이런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그런 탐욕적인 발상이 잘못이라고는 못하겠습니다. 자연스러운 발상이니까요
그런데 일상에선 자연스럽지만 자천에선 공부가 떨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자신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웃기는 일입니다.
때 지난 것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것이 자라나니까요
인류가 영생하는 날이 오면 그날이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 되겠죠 더 이상의 새로울 건 없을 것이니까요
새로움이 없으면 이미 죽었다는 것인데 그런 의미 없는 세상이 되어가면 얼른 이곳을 떠나가야죠
아침에 뜨는 태양이 두려운 건 어제와 다른 일이 일어날까 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어제와 달라진 게 없다고 하면 이건 두려움보다도 더한 공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