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21. 5. 20. 14:32

내가 명리를 공부하다가 기문둔갑을 배우면서 드는 생각 중에 처음에 든 건 육친의 의미이다.

명리를 처음 공부하다 보면 육친 십성을 이해하려고 한참을 붙들고 있게 된다.

그래서 이건 비겁이고 이건 관성이고 하면서 의미를 이해하려는 것이 너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이런 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도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일상의 생활을 하나의 범주나 의미로 개념을 정리해서 다루는 것이 생소한 것이다.

내가 언제 부모를 부모의 의미로 보게 되었을까

친구는 어디까지라고 정의를 한 적이 있을까

그런데 십성적인 의미로 온갖 사물을 다루는데 육친은 그중에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고 거기에 사물이나 사건이나 의미들까지 십성으로 하는 것이 또 생소하다.

부모와 공부나 문서나 부동산이나 같은 것으로 인성이다.

왜? 이게 같은 것으로 다루지?

이것도 힘든 이해가 되는데 거기에 이것이 식상을 극해서 자식이나 활동성에 제약을 준다고 한다. 정말?

땅이 많으면 자식이 안되나? 공부 많이 하면 활동이 약해지나?

또는 남자는 관이 자식인데 관이 인성을 생하니 자식이 많으면 부동산이 늘어나나?

이게 웃기는 것처럼도 보이는데 이런 게 사실로 우리 인생에서 언제든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정말? 하던것이 어라! 이렇게 되나? 하는 야릇한 사고 충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명리적인 십성에 빠져들게 되면 사주를 세우고 거기에 있는 십성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난 식상이 있다 인성이 있다 하면서 존재적으로 무엇이 있다 난 뭘 가지고 태어났다. 하면서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의미 이해를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숙명적인 명리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기문을 처음 접하면 그래서 내 사주를 토대로 포국을 하다 보면 이상한 것을 보게 된다.

식상이 명리에선 있는데 기문에선 없네? 어? 없네?

내가 식상이 없어? 갑자기 당연히 팔다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없다고 하니 이건 뭔 개소리야 하는 당혹감을 가지게 된다.

이게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하는 사고혼란을 가지는 것인데 이게 왜 그런지 알려면 명리나 기문둔갑을 해석하는 방식의 잘못을 알아야 한다.

난 명리나 기문둔갑에서나 식상이 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어딘 있고 어딘 없는 경우가 있다.

명리에선 식상이 없고 전혀 지장간에도 없는데 기문에선 중궁에 딱하니 있다. 그것도 제일 중요한 중궁에 있다.

중궁은 뭘하든 참견하고 언제든 참견하는 것인데 이건 명리와 차이가 너무 많아 보인다.

말을 이렇게 하면 이상한 것이 된다.

그런데 말을 다르게 하면 또 다르다.

명리에선 식상의 이로움이 혜택이 없다. 기문에선 중궁이니 일일이 식상이 대입이 되는데 식상이 식상으로서 활동이 이로울 게 없는 상황을 말해준다. 그건 육합을 하거나 인성이 충시키는데 육합은 그거 외에 다른 것을 안중에 안 두게 해서 생산적으로나 대인관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세상과 담쌓고 있게 한다. 나가면 인성이 충으로 때려 부순다.

명리는 없는 것으로 다인데 기문은 그것이 있는데 사사건건 그 식상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기는 과정을 다 설명한다.

그러니까 기문과 명리의 차이는 기문은 무엇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라서 이것이 못쓰거나 써서 오히려 이렇게 힘들게 쓰거나 하는 그 상황적인 설명을 해준다.

사실 이건 명리를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라서 무엇이 있고 가 아니라 이러이러해서 이런 관계라서 이런 식으로 전개되고 일어나고 하는 식의 해석으로 해야 하는 게 나은데 이렇게 되려면 한참을 공부해야 하는데 기문은 처음부터 그렇게 끌고 가니 쉽기도 어렵기도 하다.

명리도 다른 글자들과의 조건이나 간섭이나 유정하고 무정하고 하는 글자끼리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고 어떻게 진행되는 과정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보기란 어려움이 많다.

그러니까 내 경우엔 식상이 많다. 글자 수로도 네 개가 되고 반합도 해서 다섯 개가 되기도 하고 하니 식상이 강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천간에선 임이 두 글자로 있어서 우선 순하다. 남 말을 잘 듣는데 오래도록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만을 하고 뭔가 과거의 것을 이어서 자기 것으로 하려는 시간을 년월의 시간 내내 하게 되는 지연이 있다.

거기에 병과 충하는 작용이 되니 관을 청한다. 규칙이나 법이나 그래야 하는 사람들의 사고나 남이 만든 관을 친다.

즉 남을 비판하면서 자기 입론을 세우는 짓을 한다. 

식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식상이 이런 식으로 있다고 한다.

년월이 있으니 오래 뭔가 혼자서 추구하고 병을 관을 치니 그런 식으로 자기 존재를 드려내려고 한다. 

서술적인 관계 설명 작용하는 방식 활동적인 해석으로 해줘야 한다.

기문둔갑은 그냥 간단히 식신이 편관 하고 충하는 궁에 있다.

그것도 인신충으로 수미 복배 한다. 반음식이라서 아주 지랄하고 있다.

그 상황을 간단히 설명한다.

과거를 이어서 한다는 것은 간 궁에 있어서 그렇다. 월지라서 이게 직장을 가지기 힘들게 한다.

이렇게 일단 십성을 보면서 그것이 옆에 것과 어떤 식으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받는지 보는 습관을 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인생이 진행되거나 그런 식으로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사건을 해석하게 되는 거지 단순하게 어떤 육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년월에 식신이 있어서 직장 다니기 힘들게 되는 게 이렇게 정해진 게 아니라 식신을 직장 안 다니는 것으로 의미 부여할 뿐이다. 식신을 써서 직장을 다닐 수도 있다. 식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신이 작용하는 환경에서 자기가 하려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식신이 아니라 인성이 년월에 두 개가 있어도 인성으로 내가 하려는 것을 추구했을 것인데 결과는 같은데 과정이 다를 것이다. 기문에 보면 년지에 인성이 있다. 그러니 초년 시절에 인성 작용이 있다. 명리로는 전혀 없는데 기문으론 인성이 있는데 수화로 개박살 난다. 

그래서 십성이 무엇이든 내가 살아서 해야 할 것은 할 것이다. 다만 그런 영향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거나 다루는 힘듦이 다르고 과정상의 고충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난 식상이 있는 게 아니라 식상이 지연을 주고 관에 저항하고 다르게는 편재를 격각 해서 먹고살기 힘들게 하면서도 먹고살기 편한 듯이 살게 한다.

즉 식상이 있다가 아니라 식상이 년월에 두 개이고 그래서 이렇고

편관을 쳐서 어떻고 편재를 격각 해서 어떻고 하면서 있다고 해야 한다.

거기에 다른 육친을 사지에 또는 생지에 들게 하고 욕지에 들게 하고 식으로 하면 더 어려운데 결국은 이렇게도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즉 그 글자의 존재 식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주위에 다른 글자에 영향을 주어서 어떤 환경을 이루고 삶의 한계 설정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살아가게 하고 그런 것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십성의 해석이 정해진 것이 없는데

어떤 인생의 과정을 식상으로 설명할지 인성으로 설명할지는 하기 나름이다.

하나의 사건이나 사물을 식상으로 볼지 인성으로 볼지도 역시 하기 나름이다.

부모가 인성이라고 하지만 인성적인 작용을 하는 거지 인성이 아니다.

부모를 재로 다루기도 해서 돈 안 주면 버린다.

돈주머니로 보는 것인데 그러면 재극인이라서 부모를 하찮게 여긴다. 지금같이 돈이 더 중요한 시대가 재극인을 하게 한다. 돈을 위해 인성의 도덕을 버리게 한다.

우린 이미 이런 재극인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여자만 재인가 남자도 재이다. 기러기 아빠는 돈만 벌어오면 된다. 남편으로서나 아빠로서의 관은 불편하다. 그냥 재이다. 돈일 뿐이다.

즉 그런 육친이 있다가 아니라 그런 육친으로 보면서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일진이 무진이다. 편인인데 그래서 글 쓴다고 편리하게 해석하는 것이지 편인이니까 글 쓴다가 아니다.

편인의 글쓰기로 자기 지식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면 상관이다. 잘난 채로 흐뭇하다. 상관의 욕구를 편인으로 드러낸다.

진진형이니 비판적으로다가

편인이 식신을 제어하니 이 식신이 더 큰 목적이다. 욕구 충족이 있어야 한다. 편인이라서 그동안 묶인 것이다. 이 글을 쓰려고 생각하다가 그냥 미뤄둔 것인데 오늘 기어이 꺼낸다.

사실 편재로도 글 쓴다. 글 쓰는 게 인성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과정이 그거라는 것이고 욕구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뭔가를 그것으로 드러낸 것이지 그것이 욕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무엇을?이라는 것을 관심 가지면 그 당사자가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가 되어 드러난 십성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알려고도 한다.

그건 육합으로도 한다. 식신이 년월에 있는데 임정합이니 정이 본래 목적이다. 정관이다.

내가 식신으로 허송세월을 보낸 건 정관을 위해서이다. 즉 뭔가 세상에 옳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것의 육합으로 속마음을 볼 수도 있다. 

진유합이니 오늘 욕망은 양인이다. 글로 칼 휘두르고 있다. 왜? 명확한 구분을 위해 결단이 필요해서이다. 정의하는 것이 생각보다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개념의 구분이 양인 같은 간단히 그럴듯하게 자신 있게 해야 한다.

내가 말이 험한 건 상관 때문도 있지만 지식적인 것에서 그러는 건 이 진유 합의 양인 때문이다.

근데 신유 공망이라서 그렇다는 거지 정말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자유파가 되어서 말이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한다. 친구와 동료와 관계가 상처 주고받는다.

귀문도 되어서 도 닦는 곳에서나 잘난 척이다.

인유가 되어 원진이다.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이걸 지금껏 한다.

무엇이 즉 양인이 있는데 어떻게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인데 다른 것도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계하고 간섭하면서 있다고 한다. 그냥 그런 거지 나에게 그게 있다 난 그렇다가 아니다.

육친의 해석은 그렇게 해석해서 보는 관점이 있는 것이라서 명리적인 관점이 있고 기문둔갑적인 관점이 있고 다른 역학도 그 나름의 관점이 있다. 이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내 인생 기간에 그것을 어떤 육친의 관계로 설명할지는 어떻게 해도 되는 거라서 명리적인 관점도 있고 기문적인 관점도 있고 다른 것도 많다.

그러니 하나의 육친이나 하나의 글자로 뭔가 내 숙명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글자나 육친이 다른 것과 연결되면서 진행되어가고 그것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나 내가 해석하고 싶은 관점이나 고정된 시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가른 학문으론 다른 해석을 하고 다른 관점으로 사건이나 인생을 설명하고 있다는 다양한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내 어린 시적을 식상으로 할지 인성으로 할지는 무엇을 볼 건지가 다른 거지 무엇도 아니다.

해석의 다양함이 있는 것이지 정해진 하나의 관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난 상관이 있어서 범법을 허용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관이 있다는 핑계로 자기 범법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기문둔갑에선 상관이 없다. 편관 하고 식신이 충을 하면서 골치 아픈 것이다 범법을 하지고 또 안 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것으로 갈등하며 사는 것이다.

원래는 명리로서도 상관이 있어서 범법을 허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없고 진에 입묘 해서 인성적인 갈등으로 힘든 길을 간다가 된다. 해석은 다른 것과의 연관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로만 일어나는 것은 없다.

내가 타인과 관계해야 뭔가 사건이 일어나는 것처럼 다른 것과의 연관성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고립된 의미일 뿐이다.

그것을 기문이든 구궁이라는 다른 환경으로의 이동으로 하는데 다른 육친과의 관계도 다른 공간과의 만남이라는 식의 전제로서 설명하게 된다.

난 쥐띠이다. 기문에선 그래서 난 인성을 극하면서 부모와의 관계가 문제가 생긴다.

명리에선 상관이라고 해서 가문을 몰락시킨다.

어느 부문을 어떻게 볼 건지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보면 

운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정해진 것이 아닌게 된다.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보고 그다음의 것을 짐작해 보려는 논리적인 방법인데 이걸 단순하게만 보니 그렇게 정해져 있다고 받아들이는 미숙한 사고들이 있어서 그렇게 알려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을 하나의 관점에서 그 이어져가는 맥락을 유추해보고 그럼으로서 앞날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보는 방식에 따라 다른게 보이고 다른 방법을 취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비슷한 결론을 내는 것은 있다.

이리 보고 저리봐도 인생의 관절에서 비슷한 결과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한 다음의 과정이나 의미이해는 다를 수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른 해석을 하며 다르게 해석하니 다른 전개를 보게 하기도 한다.

분명 우리가 겪는 인생 사건은 정해진 해석법은 없다. 어리숙하게 다 같은 사건이나 이해를 할거라고 보는 정도이면 이해못하겟지만 말이다.

사회에서도 뉴스에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대개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같은 말하는 것을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보는 관점이 다르면 다른 사건이고 다른 여파가 되고 다른 전개를 할것이다.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 사건이 무엇이고 어디로 갈지는 정해진게 없다.

이걸 알아야 뭔가 내가 할 무언가를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