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21. 10. 18. 13:37
자유의지에 대해서 썼는데 뭔가 비판만 하면서 말하고 뭘 설명하려고 한 건가 하는 반성을 하면서 좀 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긴 한데 그런다고 상세한 설명이 될진 모르겠습니다.
글쓰기가 어려운 내용이긴 해요
우리 삶이 모두 결정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이긴 한데,
여기에 모두라고 말을 하면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어디부터 어디를 모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요
소립자까지 내려가면 이건 정해진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영역이니 뭐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건 내가 설명하기가 어려워서입니다. 그래서 이런 거까지 말할 순 없고 도 닦는 놈이니 그런 거로만 말하겠습니다.
일단 이세상이 결정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아니라고 해야 하고,
아니면 어느 것은 맞고 어느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거나
아니면 누구에겐 맞고 누구에겐 아니라고 해야 하거나
아니면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로 그리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고,
아니면 목적에 따라 그럴 수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 알아야 합니다.
이러면 골치 아프겠죠?
사실 하나의 원리만 알면 저렇게 다양하게 응용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의 원리를 다양하게 쪼갠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결정된 것이냐 아니냐라는 둘 중에 하나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그런 식이면 안된다고 해야 합니다.
돌멩이가 있거나 없거나 하는 식으로 그런 것이 있거나 없거나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돌멩이와 같은 있다 없다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범주니까요
운명이 돌멩이와 다른 방식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개념이 다르면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감각적인 것에서 머무는 사고론 인생이나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요원합니다.
사고에도 깊이나 넓이가 있고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들이 있는 것이니까요
돌멩이가 어떻게 있는 것인지 돌멩이의 정의는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돌멩이가 있다고 인식할 수 있는지
정말 있긴 한지 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이것도 난감한 길로 갑니다.
이런 것을 골치 아픈 거라고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는 거라면 뭐 욕하진 않죠 오늘은 참아야죠 ㅎㅎ
그래서 운명이란 결정되어 있다 없다가 아니라 결정된 것이기도 아니기도 한 것이라서 이건 조건이 붙으면 이거나 다른 상황이나 의미가 되면 다르게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슈레딩거의 고양이 같죠 그런 학자들도 대가리가 나쁜지 고양이가 살아있나 죽었나라는 단순한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내가 욕한다고 하지만 대개의 사람은 이런 단순한 사고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도닦기가 힘든 거죠 이런 것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거나 지지부진이 됩니다.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도 답답하지만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거나 극단적인 것은 마찬가지라서 이것도 이거나 저거로 나누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하면 중도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거나 저거나 그게 아니면 둘다이거나 중간이거나 이런게 다 같은 것이고 제 3의 길이라는 것이 아니라 물론 숫자적으론 그렇게 보일 순 있지만 그렇게 말고 실재 그 현상이나 사건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원론이나 일원론이나 다 확정지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같은거라서 그렇게 단정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정의하면 규정해서 틀 지우는 것인데 그렇게 사고하는 천박성을 벗어나지 않으면 곤란하게 됩니다.
적어도 도에선 절대적인 것입니다.
운명을 만든다고 방법을 쓰고 뭔가 술수를 하든 해서 바꾸었다고 하면 이것도 미친 건 마찬가지라는 거죠
운명의 정해짐이 어떤 원리인지 모르니 지 맘대로 바꾸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이 불을 켜고 끄듯이 바꾸고 못 바꾸고라는 단순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서 한심한 것이지만 이걸 사고하며 비판적으로 볼 수도 없어합니다.
그래서 그자가 누구든 부적이나 술법이나 어떤 식으로든 초월 능력이든 뭐든으로 뭔가 일어나게 뭔가 변하게 뭔가 다르게 했다고 하면 일단 안 믿습니다.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지만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 안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 그런 말 하면 그가 말을 다하지 않아서입니다. 변하긴 하지만 그가 말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말을 다하지 않은 이유는 다 알지 못해서겠죠
그가 아는 만큼 말한 것이라서 그것이 거짓도 아니고 뭐라 탓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 아니 그리 말하는 것이니까요
신이 와도 이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왜요?
지금의 상황을 바꾸려면 바꾸는 원리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냥 손바닥 뒤집듯이 해버리는 것을 원한다면 아마 그런 일은 평생 못 볼 것입니다.
결코 그런 식의 운명 변화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느낄 순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건 심리적인 착각인데 그 변화를 위한 노고와 애씀을 그리고 징조를 보지 못하고 맥락들을 모르는 것에서 일어나는 착각이고 무지가 됩니다.
왜 신이 와서 우릴 구원해주지 않을까요?
그건 불가능해서입니다. 신 따위가 날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신이 날 구원해주기 위해선 수천 년의 공들임이 필요합니다.
한 개인을 위해 수천 년을 공들일 호구같은 신은 없습니다. 그 개인이 대체 뭐길래 그런 허영을 가진 인간은 있어도 그런 응석을 받아줄 신은 없습니다.
기적을 바란다면 그런것이 가능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사이비나 환상속이나 맹신속으로 가야 합니다.
다 설명하지 못하는 무지와 착각에서 살고 싶다면 이것도 그리 사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니 찬성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를 것인데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해서 기적이나 이적 같은 것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없어야 합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선 그만한 희생을 하는 것이니까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자식을 죽이는 것입니다. 날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는 삶의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할 신은 없고 있다면 내가 대신 대가를 요구할 것입니다. 신의 죽음을 희생하라고요 인간을 하지 말고 ㅎㅎ
내가 한다니까 웃기나요? 내가 해야 할게 아니라 인간들이 신에게 요구하는 분별력과 용기가 있어서 스스로 해야 하는데 인간들이 아직 이런 것을 모르니 멍청함이 참나 아휴
다른 나라 신화중에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서 신이 요구한 대가는 그 사람의 목숨입니다.
이게 생명의 소중함이 되기도 하지만 기적은 그런 식의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가 어떤 현상을 바꾸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모르는 다른 곳에서의 누군가의 목숨을 또 인생을 파멸하고서 이룬 것이 됨을 우린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명리학이나 점을 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좋게 만들어 준다고 뭔가 술수를 써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운명의 희생과 파멸을 담보로 하는 것입니다. 분명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상한 수법으로 내 것이 되게 한 것일 테니까요 그것이 행운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행복이든 뭐든 그렇습니다.
술수는 편법이지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니 편법의 한계로 인한 대가는 있습니다.
운명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꿈으로 인한 것이 앞으로의 다음 인생에 결정된 것이 생긴다는 역설이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미래의 복을 가져와 지금 쓰는 것이라서 미래의 나를 희생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처럼 과거의 복을 대가로 치르기도 합니다. 나에게 올것을 다른 곳으로 가게 하는 것이고 다른 것으로 일어나게 하죠
그런데 이게 참 난감한 것입니다. 미래의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힘들게 할까요? 가족의 사고로? 이러면 자식이나 부모가 어려운 인생이 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미래의 나만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희생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타인을 희생하며 운명이 바뀌고 미래의 나와 주변인까지 담보가 잡히니 이중, 삼중의 대가가 있다는 것이 됩니다.
운명을 바꿈은 이런 복잡한 것이 됩니다. 이것도 그중에 일부를 말한 것입니다.
더 설명하면 내가 좋은 운명으로 바꾸고 싶어도 내 자식이나 부모나 배우자가 과거에 편법으로 운명을 바꾼 사람이었다면 그것이 되돌아와 지금의 내가 힘들고 있다면 이걸 또다시 좋게 바꾸려고 한다면? 그만큼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런 일이 흔하지 않을 예외적인 것으로 보나요?
기독교인인가요?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본인과 가족이 잘되라고 기도한 것이 없나요?
불교인인가요? 절에서 기도하면서 본인과 가족이 잘되라고 기도한 것이 없나요?
본인이 잘되라는 것이 남은 어찌 되거나 잘못되어도 된다는 전제가 있지 않던가요?
내 아들이 대학이 붙으면 남의 아들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축구에서 이기면 상대는 지는 것인데 기도는 기본적으로 상대나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 않던가요?
물론 강마을이나 도닦는 곳에서 이런 기도는 안 합니다. 하다면 징그럽게 잔인한 모지랭이가 되겠죠
도닦다보면 내 것이 되게 하는 것이 잘 안된다고 하지 않던가요?
내 호주머니에 돈 들어오게는 못하고 남 호주머니에 돈 들어 가게는 하기 쉽습니다. 그 남이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고 나라이고 그런 것인데 그런 건 돈이 흘러가서 사회의 현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왜요? 이건 개인을 위한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아서이고 그런 욕구를 하지 않아서이고 할 수 없어서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 못 버는 도닦음이냐면 그건 아니기도 합니다. 내가 돈이 있어야 되는 이유가 사회에 나라에 있다면 돈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마구들도 대가를 치르면서 합니다. 이타라고해서 대가 없거나 덜하거나는 아니죠 원리는 일반인이나 강마을이나 마구나 같습니다. 더 설명하긴 머하지만요
운명을 개척해 가는 거라고 하는 사람이 대개는 자기 인생이 좋아지고 행복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정도의 사고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학자라면 과학이라고 하면서 이걸 연구할 것이지만 같은 학자인데 누군 결정된다 하고 누군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학자의 성격에 결정된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말은 논리적으로 이러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결정되지 않는 거라고 할만한 근거나 이론이나 실험만을 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미 태어날 때 어떤 것을 주장할지가 정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냥 사후 논리라는 거죠 그 사람의 호감이 어디로 갈지 갈라지고 그 결정된 호감에 머리를 써서 이론적인 방법이나 주장을 하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결정된 것의 힘은 거역하기 힘듭니다.
이런 힘든 것을 보고 그것을 볼 수 있어야 그것과 다른 것을 결정해갈 수 있는 힘이 서서히 생기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자유의지가 원리로 있다는 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섭리가 그냥 있다는 것인데 이것도 결정된 섭리라면 결국 결정론의 다른 말이 됩니다.
물론 이런 자유의지를 확보해가야 한다는 것도 결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자유의지를 가질 것인지 아닌지 그런 선택의 기로에 우린 서있습니다. 뭘 선택하든지 그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선택권은 정해진 건데 뭘 선택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죠
그리고 그 첫 관절의 커다란 선택이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그 결정입니다.
이걸 과거엔 윤회와 윤회 벗어남이라고 했습니다. 윤회된다는 것은 결정된대로 사는 것이고 벗어남은 그런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의지가 생성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이 되는데 이건 지금 결정할 수 없는거라서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난 이렇게 결정하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결정해 가는 것이 운명이 변하는 그것이 될때까지의 고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자유의지를 가질 것인지 아닌지를 의식이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좀 난감하죠 ㅋㅋㅋ
이 글을 읽고 지금부터 난 자유의지를 선택하고 그것을 확보하고 확장해 갈 것이다라고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오해한 것입니다.
결정이나 선택은 지금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운명을 결정한 것이 아니지 않던가요? 그건 지금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지금 이 순간 자유의지로 뭔가 결정할 거라고 하지만 이미 정해진 성향이 그것을 결정하게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것도 지금 결정할 수 없습니다. 뭔가 결정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은 있겠죠
하지만 완전히 착각 아니고 완전히 못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결정을 이 순간에 못하는 거죠 이 결정이라는 것을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해갈 것입니다.
결정이야 하는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내려온 버릇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고 이미 과거에 결정하게 한 흐름을 지금 당장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랜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시간 결정해 가는 것이죠
지금의 내가 이루어진 것엔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니 그래서 맘대로 바꾸지 못하는 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자유의지도 서서히 만들어가는 것이지 지금 당장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단순 사고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미 과거에서부터 밀려온 것을 확인하는 것이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미약한 것입니다.
과거의 확인을 우린 결정한다고 아는 것이죠 그리고 그대로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아주 약한 미래 결정을 이런 식으로 해버리는 것이라서 미래 결정을 자기관찰로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과거의 확인을 판단이라고 착각해서 그렇게 살게 됩니다. 과거의 확인을 미래의 결정으로 하고 있죠 그래서 미래는 지금과 달라지지 않습니다.
살아온 대로 살고 살아갈 것이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