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21. 11. 6. 15:11
울감술
왜 이런 이름을 이었는지부터 말해야 합니다.
술은 정형성인데 정해진 틀이나 규칙입니다.
제단을 만들고 어떤 손 모양을 하고 자세가 어떻고 하는 것에서 자천하는 방법이나 자세나 또 운동할 땐 역기를 들어 올릴 때 허리나 발이나 손이나 그런 동작들의 자세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어떤 순서를 지켜야 하고 자세가 정확하거나 규칙의 엄밀성이 중요한 건 그런 규칙이 주는 효과가 있어서 인데 구기 종목을 할 경우 자세가 정확해야 공을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이 쉬운 것과 같이 규칙을 잘 따라야 원하는 효과가 쉽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 됩니다.
왜 그런 자세나 규칙이 되어야 하는지는 경험이 알려준 것도 있고 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기초에선 그런 순서와 자세나 규칙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세라는 것의 원리나 이유를 알게 되면 좀 더 요령을 가지게 되어 자기만의 규칙이나 자세나 정형화를 가지게 됩니다. 일단 누구나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가 기초이지만 사람 따라 다르게도 되는 것이 그다음의 방법이 되겠죠
그래서 자기식의 틀이나 규칙을 얻으면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다음 이런 정형화가 꼭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생략이나 간략화나 그런 것인데 해야 할 규칙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에 따른 시간이 소요되거나 성취가 부족하게 되거나 어떤 결핍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지켜야 하는 규칙은 또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말이지만 없는 규칙에 규칙을 주는 것이 규칙이라는 것이죠
그런 맥락을 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라고 몰아가는 것이어서 그 전제로선 무정 형성이 있는 것에 정형성을 주어서 형태를 만든다가 되겠죠
그래서 분명 어떤 것에도 규칙이 없어도 되는 그런 방법은 또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천에도 가부좌다 결가부좌다. 호흡이다. 호수(주문)이다. 어떤 심법이나 기타 다양한 방법들을 가지지만 그러한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해야 합니다. 아무런 것에도 걸림이 없을 수 있는 그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다만 정해진 것을 하지 않을 경우에 원하는 것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선 시간이 걸리거나 조건이나 방법의 어려움이 동반할 수 있습니다. 되기만 하면 된다면 아무래도 되겠지만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려면 그에 따른 규칙이 또 생성된다고 하겠죠
물론 규칙대로 안 한다고 무조건 손해 보는 것이 생긴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가 많은 거지 단정할 순 없죠
술이 기술이나 과학이론이나 합리성이나 논리나 규칙이나 법칙이나 원리나 그런 정해진 것을 말하는 술이 됩니다.
이건 이야기 일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이야기이죠 그것이 되게 하기 위해선 그냥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되니까요 암시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암시되는 조건이나 환경이나 배경을 정해야 더 쉽고 그렇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그런 식이 되기도 합니다.
추워지는 것이 그냥 추운 것이 아니라 겨울이라서 그리고 옷이 없어서라는 이야기가 있어야 더 쉽게 됩니다. 성냥팔이 소녀 같은 길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지식입니다. 어떤 지식을 그렇다고 아는 것에서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들면 더욱 강한 실현과 실천을 할 수 있는데 명리학을 공부할 때를 예로 들면 책에 그렇게 쓰여있는 것보고 그렇게 해석하면서 말해줄 수도 있지만 내가 직접 그런 원리를 보고 경험을 하고 그러면서 알게 된 지식은 그것이 책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결론의 지식이라도 그건 다른 힘이 있게 됩니다.
그냥 아는 것과 내가 확신이 들게 된 앎은 다른 정형성이 되는 틀이 되고 규칙이 됩니다.
그래서 운명이나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에 그런 운명이나 의미나 저주의 방법이나 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지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죠 확신하는 만큼 강한 구현성이 주어진다면 신뢰하지 않는 만큼 그 구현성을 다시 떨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영감이나 신기가 둔한 건 믿지 않아서이기도 합니다. 무심함이 둔함이 되는 것이기도 하죠
관심 있고 그렇다고 알 수록 그것의 영향에 더 민감하게 되는 거죠
감은 즉흥성인데 정해진 것에서 정해지지 않거나 응용력이나 그때에 따른 적응력을 말합니다.
정해진 것이 있지만 항상 현실에 일어나는 것은 그런 정해진 것과는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 다르게 나타나는 일상의 현실에서 적응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정해진다는 것은 이러했을 경우 이렇게 한다가 되는 거라서 이미 조건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원할 경우 이러한 것이 나타날 경우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이러한 상황일 경우처럼 정해진 조건에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하면서 정해진 해결법이나 해야 할 행동이나 취해야 할 방법이 정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당해보면 막상 이론과 다름을 보게 됩니다. 이 다름에서 어떻게 대쳐 할지를 생각하는 것이죠
매일 같은 시간에 오랜 정좌하면서 자천하면 좋다 하지만 그것이 안 되는 사회생활이고 실재 일상이면 이걸 어찌 해결할까요?
제단을 차려서 해야 하고 그리고 자시에 부적 쓰고 어떤 붓으로 어떤 주사로 어떤 괴황지로 어디를 가야 하고 뭔가 준비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정해진 대로 할 수 없을 경우 이런 규칙이 있는 이유나 원리를 알아야 그것에서 벗어나고 다른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적용력이 있어야 하겠죠
정해진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 그것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봐야 하고
애초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정해서 본 것이라는 것도 있으며
하라는 대로 정해진 대로 하는 그런 생명력 없는 행동에서 사항에 맞게 적절한 능력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이 즉흥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선 규칙이나 틀에 대한 원리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 그런 규칙을 하는지를 알아야 그에 따른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게 되니까요
이유를 알면 대체할 수 있고 다르게 변용이 가능하며 시기나 시대에 따라 변칙성도 가지게 됩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하면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입니다.
그래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면 그 원리를 알아서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원리를 알았을 경우이죠
자천에도 여러 자세들이 있습니다. 어떤 수련법을 고집하기도 하고 몸의 자세나 생각법이나 수인법이나 문파라든가 유파에 따라 다양한 것이 있고 꼭 그래야 한다고 하면서 고집하기도 합니다.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그럴 필요 없습니다. 꼭 그래야 하는 자천법은 없었습니다. 대단한 이유를 들면서 그래야 한다고 강조할수록 내가 보기엔 전혀 의미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원리를 알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내가 없다고 남들도 없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내가 없다고 다른 분이 이걸 따라 하면 그것이 이미 또 하나의 틀이 됩니다. 그런 거 필요 없다더라라는 틀이죠 난 내가 보는 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인데 남들도 역시 나름의 의미를 알고 알아낸 그것에서만 자기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반복해봐야 엉성한 따라 함이 될 뿐이죠
울은 주체를 말하는데 우리이기도 하고 울타리이기도 하는 복수의 자아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난 단수가 아니라 언제나 이거 저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다양한 자아의 복합체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엔 행동하는 나가 있지만 목적이 있어야 행동이 되어 타자가 있습니다. 내가 있는 동시에 외부가 함께하는 것이라서 우리가 됩니다. 날 이루는 것조차도 결국 외부를 선 그은 것에서 나눈 것이지 나라는 것이 애초 있던 것은 아닙니다. 선 그은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정형성을 할지 즉흥성을 할지 둘을 배합할지 어떻게 활용할지를 판단하는 그 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결국 이 주체 정하는 거라서 주체의 능력이 우선되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누구냐 이걸 말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