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18. 10. 9. 20:26

식상은 접속과 만남 또는 관계를 합니다.

접속이라고 그냥 면과 면이 만나듯이 가까워지고 붙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남 역시 어색한 만남같은 것도 아니고요.

식상이 뭔가와의 만남을 해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 만남이 하나의 일이 됩니다. 사건이 벌어지요.

손이 숟가락을 만나면 뭔가 먹어야 끝납니다.

숟가락이라고 먹는 것만 하는 도구는 아닌데 대체적으로 먹는 것을 기대하게 우린 습관 되어 있습니다. 이 습관은 인성이겠습니다. 그렇게만 하게 하는 것이니까요 식상은 제멋대로 하고 싶은데 인성은 습관처럼 그것이어야 한다. 그것만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식상은 뭔가와 접속하면서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그리고 관계를 자유롭게 바꾸면서 빗겨갑니다. 이 빗겨가는게  인성들은 싫겠죠.

숟가락으로 우린 뭘 하고 싶은 걸까요?

요즘은 숟가락을 태생의 다름을 말합니다.

금수저 흙수저 하면서요 이런 말을 만드는 것도 식상입니다. 이런 기발한 말이나 행동이나 그런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숟가락의 재질로서 태생의 등급을 말하는 것이 만난다는 것이 꼭 사물은 사물끼리가 아니라 사물과 개념들이 뒤섞으며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들어갑니다.

이거 역시 숟가락과 접속한 것입니다. 그 접속으로 뭘 할지는 자유이니까요

이렇게 금수저 하면서 접속이 다른 의미로 만들어져 가면 하나의 개념이 생성된 것이고 이러면 또 인성이겠습니다. 식상생인성이네요. 이런 말은 없는데 오직 식상은 재만 생한다는 것이 오행론인데 그거야 그런 것이고 전에 말했듯이 한정된 원리고 더욱 창발적이 사고를 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생의 논리에 어긋나지 않으니까요. 생이 목이 화를 생한다고 하지 화만을 생한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목이 토를 생하기도 하죠. 그것을 토는 목이 있어야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이해한다면 참으로 상상력의 결핍이 아쉽습니다. 그냥 생합니다. 오행은 자연물을 말하게 아닌데 이걸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목하면 나무이고 토하면 흙을 떠올리죠. ㅎㅎ

암튼 접속이 개념을 만듭니다. 이걸 관계라고 합니다. 사실 접속이라고 다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거와 저것이 만나서 다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접속이라는 단어로 관계와 의미 찰출까지 다 의미한다고 하든 이걸 일일이 나누어서 설명하든 그거야 아무렴 어때요.


합이죠 사주론 육합이라고 합니다. 병과 신이 합해서 즉 만나서 접속해서 관계해서 수가 된다고 합니다.

병과 신이 만나는데 전혀 다른 수가 되는 것은 참 별난 것이이죠.

이거와 저것이 만나서 제 삼의 다른 것이 됩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합해야 뭔가 이루어지고 생산하며 새로움이 나옵니다. 건설적인 것이죠 그래서 합이 없으면 더이상의 새로움은 없을지 모릅니다. 음양이 만난다고만 하면 안됩니다. 이런 육합이 만나는 것입니다. 또 이걸 확장해서 무엇이든지 만나면 다른 것이 되어 이거저거 이세상의 무엇이든 만나게 해서 다른 것으로 나타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더욱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식상은 이렇게 만나게 하고 관계하게 해서 다른 것으로 나오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고 그걸 식상이라고 하는 것이며 다시 충하고 헤어지고 풀어져서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이완을 합니다.

부서져야 다른 것으로 만날 수 있고 떨어져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접속만 말할 수 없고 절단도 말해야 합니다. 이런 접속과 절단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식상이겠죠.

이것과 만나기 위해 저것과 절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만들기 위해 저런 의미와 절단해야 합니다. 그런 절단과 접속을 자유자재로 해갑니다.

다른 사상을 만들려면 그전의 사상과 절단해야 하며 다른 더 나아지는 것을 얻고 싶으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식상은 소유하는 것도 버리는 것도 아닌 그런 소유와 버리는 것을 이용해 다른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것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자식이 나오는 것은 상식이고 역시 습관입니다. 개연성인가요 그런 기대인가요?

남녀가 만나서 싸울 수도 봉사일을 할 수도 도둑질을 할 수도 만화를 그릴 수도 있는 것인데  현실이 이게 더 많지 않나요? 남녀가 만나서 그냥 만났다로 끝나면 을경이 금이 되는 것처럼 그게 그거 될지도요.

아무튼 식상은 만나는 것입니다.

또 만나야 더욱 식상으로서 활동이 됩니다. 다시 헤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긴장하고 언제까지나 그럴거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뭔가 또하려고 움직이고 달라지려고 하는 절박함을 줍니다. 이런 긴장과 절박함이 없으면 나태해지고 오히려 수명이 줄어듭니다.

혼자 있으면 공상을 하겠죠. 공상을 인성으로 하지 말고 식상입니다. 심심해서 뭔가 재밌는 걸 하고 싶어서 건설적인 것이라고 해도 식상입니다. 식상이 그냥 노는 것으로 보이지만 관을 극합니다.

그러니 식상은 가장 무섭고 어쩌지 못하는 관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법이나 윤리나 규칙이나 위사람이나 공권력이나 뭐나 그러든가 말든가 난 나라고 하는 그 자유로움입니다.

이 혼자 놀고 구속받지 않고 아무 것도 안하든 하든 제멋대로인 이것이 바로 관을 이기는 원동력이니다.

난 나이고 싶고 미치도록 혼자이고 싶고 그냥 놀고 싶다는 것의 무서움을 사주는 아는 것이죠.

그것이 관을 이기는 힘이라는 것을요.

어떻게 접근 할것이냐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풀리지 않는 문제에 어떤 숙제에 어떤 명령에 어떤 고민에 그무엇이든 해결해야 하고 뭔가 이루어야 하고 말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고 결론을 이끌어야 하고 뭔가 보여주어야 하고 이런식으로 뭔가의 일을 하려면 어떤 접근을 해서 즉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를 합니다.

즉 어떤 것을 풀어서 어떤것에 이어 붙일지 어떤 것을 비판하면서 어떤 것을 옹호할지 그런 것입니다.

그런 접근 방법, 이것이 접속이고 만남이며 관계가 되고 절단하고 파괴하며 거칠기도 합니다.

숟가락을 무기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면 폭행이 되고 살인이 됩니다.

식상은 뭔가 결과를 만들기도 아니기도 하는데 접속을 하면 결국 결과는 나옵니다.

그결과를 재성이라고 하는데 그건 결과를 지향했을때 입니다. 이 지향을 재라고 합니다.

극도 하는데 관을 극하죠. 기존의 것으로 지속적으로 뭔가하려고 하고 틀에 매여있고 고정되면서 그안에서 썩어들어갈 때 불필요한 것으로 힘들어 할때 그냥 힘들게 하는 것이나 뭐나 해결사는 식상입니다.


극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식상은 관을 극하는데

식상이 활동을 하는 것이니 활동이란 움직이는 것이고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고 다루는 것이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활동이라고 합니다.

피를 돌려든 뭔가를 가지고 장난하든 어딘가로 이동하든 지식을 가지고 공부하든 뭔가를 한다는 것은 뭔가를 다루는 것인데 그 뭔가는 관입니다. 일상의 모든 주위의 것들은 관인데 관이란 그런 체계이고 형식이며 일상이라는 것이 됩니다. 일상이란 그렇게 규칙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니까요.

규칙이 되지 못한 것은 우리 일상으로 들어오지 못하는데 그런 들어오지 못한 뭔가를 관심가지는 것이 식상입니다. 관을 바꾸고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그것이 극이고 활동입니다.

재는 인을 극하며 다른 인으로 바꾸려고 하고 관은 비겁을 극하며 다른 것으로 되게 하려고 하며 인은 식상을 극하며 다른 것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극하는 것을 하면서 준재의 이유는 만끽하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