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22. 8. 7. 11:14
내가 나이 들어간다.
처음 하는 짓도 아니면서 이렇게 생소하니 그래서 우린 망각을 해야 하는 존재인가 보다.
나이 들면서 푸념을 해야 하겠는데
과거엔 나이 들수록 자천하기 수월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땐 그런 맥락에서 말한 것이고 그럴 수 있기도 한 것인데,
이젠 나이 듦이 자천하는 것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다고 말하려고 한다.
내 글이 이런 의미 저런 의미를 쓰고 앞뒤가 안 맞거나 상반된 것을 쓴다고 초창기부터 말했던 것인데 이제 또 그전과는 다른 말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변명도 불필요하지만 글 읽는 분들이 말을 해놓지 않으면 말한 대로만 읽기도 해서 곡해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것도 된다하고 저것도 된다한다. 우린 여러 중층이고 복잡적이라서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는데 이게 관적으로 만들지를 않았다.
나와의 차이인데 난 이런 것을 일관적인 체계로 만들어 놨는데 사람들은 이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게 일관성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방대한 체계이니 부분적으론 모순으로도 보이는 거라서 이 모순적인 것만 보면서 비난하기도 한다. 그수준에선 모순인데 다른 수준에선 아닌 하나의 흐름이 있는걸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난 이런 말 저런말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의 체계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걸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은 서로 간에 일관성이 되지 않는 상반된 감정이나 지식을 가지며 있는데 이런 것을 일일이 찾아서 그럴듯하게 조합하지도 않는다.
자기 안의 기만과 복잡함과 뒤섞임의 혼란이 너무도 심하지만 아니라고 알고 살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런 것을 들추는데 급격히 거부하는 반응을 한다.
내가 들추는 것을 봐야 그것을 해소하든 자기 것으로 하든 어떤 능동적 행위를 할 것인데 있는지도 모르고 감추려고 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하고 이러면 심리적인 왜곡이 되어 상처가 된다. 그건 분명 인생에서 부정적인 사건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한 심층들이 인생을 만드는 것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들추어서 대처할 수 있고 삶의 방향을 정할 판단 기회를 주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듯하다.
도를 배우러 와서 도에 대한 조언을 하는데 왜 거절하지?
초창기엔 나이 든 분들의 이런 고착화되고 보수화 된 선입견들을 대놓고 말하면 지적이고 나무라는 것 같아 돌려서 말하고 완곡하게 하고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집중하지 않거나 곡해하거나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아 또 다른 어려움이 되기도 했다. 이제 날 좀 아는 분들에겐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마음 열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건 본인 그 자체가 된 것이라서 자기를 꾸짖는 것이 되어 상당히 거부감이 들게 되어서이다.
의식이 분리되면 그러한 자기로 알고 있는 것에서 한 발을 물러날 수 있는 것인데 이조차 이미 세간의 지식이나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잘 다루지 못한다.
나이 들면 좋은 것은 그전에 썼는데
그게 아닌 것은 이런 부분도 있는 것이지 이게 다는 아니다. 우리가 일반화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나이 들어 공부하기 좋다는 거냐 아니라는 거냐 식으로 단정 지어서 말하려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럼 뭐가 힘들게 하는 것인가 하면
이걸 간단히 보수화라고 하기도 한다. 나이 들면서 우린 보수적으로 된다.
이걸 정치적으로 쓰는 보수라고 말할 건 없다. 이건 예외가 없는 거라서 나이 들어서 진보적으로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런 정치 성향의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고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이미 보수적으로 자리 잡아간다는 것이다.
진보정치인도 이것에 진보이지만 저것은 보수라서 어쩌다가 그런 입장이 된 거지 사람 자체가 진보라고 할 수도 없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진보라고 했던 전 정권이 얼마나 보수적이었던가?
이런 정치적인 것을 말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 그런 거 말고 우리의 성향에 대한 것이고 도를 배우는 것에 대한 것으로만 한정해서 이해하자
물론 이런 것이 정치든 문화든 예술이든 경제든 외교든 다 적용 가능한 것은 그것도 사람의 일이고 도라서인데 그래도 난 일단 도로서만 말한다고 한다. 다 아는 척하는 건 건방지니까 헤~~
어릴 때 청소년에 사회초년기에 배우고 듣고 본 그리고 접한 다양한 것들이 있고 그걸 중심으로 사고의 체계가 이루어져 간다.
그러면 30이 넘고 40이 되어가면서 그러한 자리 잡아간 사고체계가 더 이상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사고의 총합을 늘리려고 하기보다 이미 기존의 사고하는 것에서 판단하고 새로운 것을 봐도 기존의 것으로 대치해서 보려고 하는 습관을 가진다.
이런 우리가 나이 들고 늙어가서 하는 짓이다.
신체를 더 움직이기보다 덜 움직이고 효율적인 것을 따지고 좀 더 안정성을 찾으려고 하면서 살이 찌는 것과 같다.
나이 들면 나잇살이 찌게 된다.
(활동하는 것과 에너지 쓰는것이 달라져서라는 하나의 이론이지 이것만이 살찌는 이유는 아니다. 100의 에너지 쓰는 활동에서 90으로 쓰는 활동으로 조금은 게으르다거나 사는 것에 요령이 생기면 남은 10이 살로 가서 찐다는식의 간단한 이론)
살만 찌는 것이 아니라 사고도 효율성을 찾고 쉽게 판단하고 결론 내는 것을 하다 보니 그럼 그전에 또 기존에 사고하던 대로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사고에 살이 찌는 것이 있고 이걸 보수화 된다고 한다.
이걸 무조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이런 글 쓰는 방식이 보수화 된 하나의 내 방식이다. 글 쓰는 틀이 너무도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게 내 보수화의 한 단면이다.
그럼 이걸 버려야 하는가?
버릴 수도 있다. 이런 것과는 다른 글쓰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글을 쓰면서 뭔가 의도하는 시기는 지났기도 했고 내가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건 지금의 기준이고 그래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면 또 다른 것이니 일단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하다. 다만 다른 것이 되어야 하면 또 달라지기도 해야 한다. 단정은 안 된다고 항상 하는 말이니 말이 단정하듯 말한다고 오직 그것이라고 내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그거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이유를 말하면 '아 그래요?' 하고 인정할 건 하고 다시 변해가야 한다.
즉 나도 보수화 해가고 있다. 다만 그러면 안 된다고 이러 걸 또 해야 하고 저걸 알아야 저걸 할 수 있다고 하면 보수화 된 사고나 감정을 버릴 것이다. 항상 이런 가정을 하고 산다.
왜냐하면 살다 보니 만들어진 틀이고 고착인데 이게 뭐 대단할 거 있다고 고집하고 집착하겠나
난 이렇게 쉽게 말하지만 남들은 이게 화가 날 말이 될 것이다.
달라지라고 말하면 말은 그런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을 항상 보는데 그건 이해가 가긴 한다.
<내가 되어 있는 그것을 내가 아닌 것으로 하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냐?>
이런 것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그래야 도를 배우는 거지 그럼 도를 뭐로 알고 있는 것인가?
기를 운행하면 도인가? 계제가 오르면 도인가?
계제가 오른다는 것이 그전의 나를 갱신한 것인데 그 갱신이 지금 그대의 그대를 버린 것이 아닌가? ㅎㅎㅎ
내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서 이게 변덕으로 보이거나 지조 없어 보이거나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고 말하려고 한다면 일단 나같이 보수화 되는 자기의 모습을 아는 사람인지 궁금하다.
자기가 보수화 되어가는 것을 아나?
도를 배움에 첫 관문이 자기 관찰이다. 그리고 최후의 관문이기도 하다.
단전이 생성되든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해지든 그로 인해 성취되는 것은 스스로의 사고와 감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 의식 분리라고 하든 나를 볼 수 있는 의식의 힘이 강해진 거라고 하든 관조가가 만들어진 거라고 하든 제 삼의 눈이 만들어진 거라고 하든 유체이탈이고 시해라고 하든 말이다. 말하나 만들어 온갖 의미를 때려 넣어서 그럴듯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 허실이나 본 의미를 알기 참 어렵다.
그러면서 중첩되는 의식의 관찰도 하지만 일단 스스로의 관찰은 심히 인간이 발견한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한 한 발의 나아감이다.
그런데 보수화가 되면 이게 뭘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보는 가치관이 있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반하는 것을 보면 감정이 동요한다.
나이 들으면서 가치관을 너무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이것이 내 몸의 일부로 되어 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어서 어떻게 형성된 건지도 모르고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고 그저 휘두르고만 있는 몸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성향이 이러하다고 말하는 것이 이미 그러한 성향으로 보수화 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니 자기가 어떤 몸을 생성했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본다는 것인 그저 본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분석의 대상 즉 타인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나? 물론 서구에선 없다고 했다. 근데 없나? 이걸 얼마나 깊이 할 수 있는가가 공부의 깊이도 된다는 걸 혹시 알까?
분석하고 분류하며 다루는 것이어야 하지만 사고와 감정을 분석하고 다루는 사람은 없다. 즉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 타인화는 어렵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과거부터 하는 말이다. 자기 점이나 가족의 점이나 선입견이 들어간 점은 틀린다. 왜? 객관화가 안되서이다.
내가 넌 왜 남을 시기하느냐 하고 말하면
난 그런 적 없다고 말한다.
그래? 나도 하는데 넌 안 한다고? 인간이 아닌가? 시기라는 것을 하지 못하는 덜 성숙된 영혼인가?
시기심 그것이 나쁜 거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런 걸 내가 사고나 감정을 분석도 안 하고 개념도 모르고 다루지도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관찰을 해야 하지만 시작부터 삐그덕 거리는 것이다.
자천으로 의식이 분리되어 자기 관찰하는 힘이 생기지만 거기까지이다. 또 다른 감정은 난 이제 자천이 성취되었다. 난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다른 감정이(우월감이기도, 이런 우월감을 가진 이유가 열등감이 깔려 있어서나 시기심이 있어서나 이유는 또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 분리된 의식을 통합하며 또 다른 보수화를 진행한다. 그 고착화하고 고정관념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희열도 느끼고 뭔가 이룬 것으로 착각도 한다.
나이 들면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리거나 하는 것을 보는데 이건 누구나 다 그렇다.
나도 새로운 것을 접하지만 젊을 때 같이 그것을 알려고 하거나 따져보거나 하지는 못한다. 그런 게 있구나 하는 것 정도이다.
그래서 내가 쓰는 것은 전망이다. 새로운 것이 나온다지만 이미 난 어떤 것이 나올지 대강의 전망이 있다.
그래서 그것이 나온 것을 보면 이런 식으로 구현되었구나 하는 것이 된다.
그 새로운 것의 구조나 사용법이나 또 사용하거나 지식을 알지는 못한다.
다만 이런 시간적인 선후의 전망과 기대 그리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건 하나의 방법이지 이렇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새로운 것이 지금 있는지 그걸 다 알 수도 없다.
그래서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 보수화를 견디면서 어떤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는지 찾아야 하고 새로운 게 있는지 찾아야 하고 알아야 할 새로운 현상이나 사물이나 사건을 보려고 해야 한다.
내가 거부하는 순간 스스로는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라 마음을 열어야 한다.
보수화에 끊임없는 저항을 해야 한다.
보수화 하는 이유도 살펴야 한다. 누구나 같은 사건이나 사물이나 대상에서 보수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서 그렇다.
왜 난 이것을 보수화하는가 그걸 찾았나?
왜 난 이걸 이렇게 대하나 이 감정으로 이걸 보나?
그런 것엔 자기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 이걸 찾아야 한다.
동기의 시작을 스스로에게서 찾지 못하면 언제나 남 탓을 하거나 운명의 굴레에 헤매게 된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뭐지
거부하는 사물은 뭐지?
불편한 감정을 주는 대상이 뭐지?
이런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화가 안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이러한데 이걸 어떻게 다루고 해결하고 내가 바라는 긍정적인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것으로 이끌어 가는 것인가이다.
도의 성취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것으로만 있는 거라서 항상 긴장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난 이걸 성취했다고 말하는 그것이 이미 보수화이고 이러면 바로 그 성취는 나락으로 굴러간다고 누누이 말했다.
단정하지 말고 오로지 하지 말고 보수화 되지 말고 고정되지 말고 이런 것이 도의 기본이다.
그러면 무조건 안 되냐?? 앞에 말했듯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을 어떻게 다루면서 살지 그것에 대한 나름의 합리적인 사유가 있어야 한다.
그 합리적인 사유 역시 단정되면 안 되지만 말이다.
내가 어릴 때 알던 지식이 지금도 유효한가?
이걸 이렇게 알았는데 지금은 지식이 발달해서 다르게 된 것들이 있는가?
이걸 일일이 다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것을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전제를 하고 살아야 한다.
내가 알던 그것과 같은가 다른가?
내가 고정된 과거의 지식이나 감정으로 대하고 있지 않는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감정은 정당한가?
이런 감정은 예전부터 일어나던 건데 아직도 이런 감정을 해도 되는 것인가?
또 이런 사고를 하나 또 이런 감정으로 대상을 보나?
이제 나이 들어서 보니 내가 알던 것들은 10대, 20대 그 당시에 접한 지식과 정보나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인데
지금은 그 당시가 아니고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것인데 이런 지나간 시기에 형성된 내 감정과 사고와 몸의 구성을 지금도 여기 이 시간대에 적용해도 되는 것인가
구식이 되고 골동품이 된 내 영혼을 자꾸 현재에 구겨 넣으면 망령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난 아직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 왜 아직 이런 말투이지? 왜 아직 이런 단어를 쓰지? 왜 아직도 대화 주제가 이거지?
왜 감정은 반복하지? 그전에도 이랬는데 이 감정은 정당한가? 감정이 나인가? 감정을 행동의 동기로 쓰는 것은 합당한가?
이 감정은 누가 언제 만든 거지? 또? 또 이 감정이야?
깊이깊이 오래 만들어진 습관과 성향과 고정된 것들을 일일이 끄집어내서 다시 재점검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내가 하든 사고나 감정이나 행동에서 낯섦이 보여서이다.
이거 예전에 만들어진 사고이네 어릴 때 배운 지식이네 이건 이런 동기로 만들어진 감정이네 나에게 아직 이런 게 남아있네 내가 이런 걸 해오고 있었네 그런 것들이 자꾸 보인다.
나이 들어서 보니 내가 하든 사고나 감정이 골동품으로 보인다.너무 구태의연해서 먼지낀 사용하지 않는 버릴 물건이 되어 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나.
이런 판단 감정 습관도 지겨운데 다른 식으로 살아야 하나
대체 난 언제 죽어서 이런 쓸데없는 고정된 것들에서 헤어나나
난 나에게 일어나는 내적인 외적인 많은 것에서 원인을 궁구 하는 것이 습관이라 내가 이런 식으로 태어나서 이걸 해가야 하는구나
이걸 어릴 때 가져서 배워서 성격이 되어서 이걸 지금 해야 하고 이게 또 돌아오게 되고 이런 게 너무도 수월히 보이는데 그러면서 지나치게 삶이 각본으로 되어서 다른 각본을 만들까 하니 그거 역시 각본인 건 마찬가지이고 수월한 삶이나 좋은 거로만 하려고 하는 것도 어디서 나오는 감정인지도 있고 이생에서 만의 욕구 인연 성향 운명이 아쉽다.
얼마 안 있으면 의미도 모르는 상황이 오는 이런 것이 왜 이리 질기게 얽매여서 다가오게 하고 있는 건가
나에게 보수화 되는 것을 보면서 그 유효기간의 짧음도 역시 보는데........
그 감정의 유효기간 그게 있으니 그렇게 흘러가도 되겠지만 나 혼자 이래 봐야 홀로의 일이고 다 같이 흘러가는 것에 그들의 변화를 보려고 하니 서서히 그리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에 응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