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묘 2
아까 말한대로 묘의 좌향이 처음 갔을 때 당황하게 했습니다.
그건 내가 미리 잘 못 생각한게 있어서인거죠. 위성사진으로 보고 혼자 이런 좌향이겠거니 한 것입니다.
가늘게 한 붉은 선으로 해서 차가 들어와서 주차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향을 할거라고 보았던 것이기도 하죠.
그렇지만 그림처럼 묘는 좌향이 저쪽입니다.
청룡이 목성처럼 생긴 것이고 둥글게 감싸고 물 역시고 그렇게 감싸서 돌아가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식으로 둥근 동그라미가 수구이고 청룡따라 부드럽게 돌면서 나갑니다.
아쉬운건 위 그림처럼 보이는 것이 외백호입니다. 물개가 머리들고 기어가는 듯도 한 것인데 이렇게 수구쪽으로 가면서 머리들면 수구를 적극적으로 막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어 좋습니다. 백호가 머리드는 것을 꺼리는데 요즘은 사업하고 여성들이 드날리는 것이며 여성들 덕도 있는 거라 당연히 좋지요. 권력보다 돈인 것이고 여성들이 잘난 세상은 백호가 제대로 만난 것입니다. 아마 황희에겐 돈도 돈이지만 현실판단력일 것입니다. 물론 엄한 판단으로 좌천도 당하지만 남다른 설득력과 일종의 일머리는 타고났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전술능력이겠죠.
여기서 왜 굳이 물개냐고 하면 이날 돌아오는 과정에 성산대교에서 차가 막혀 한참을 있다가 넘어오는데 하늘의 구름이 물개가 물고기 잡는 듯한 모양이었습니다. 그게 이걸 보니 꼭 그거 같아서 굳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건너편에 옛날 집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는데 그리로 산이 내려오는데 그것으로 저 물길이 반궁수가 됩니다. 근데 그게 물개의 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와서 왜 물개냐고 하면 내년이 亥의 기해년입니다. 이미 저저번 달 부터 그 징조가 동하고 있습니다. 저번달엔 다른 나라에 계해일에 천재지변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년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 생물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청룡에서 나간 이 작은 노란색이 저 긴 노란선의 물길을 만나는 것이 확실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논이 있는데 논 수로라도 그것이 이어져서 명확하게 물길이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파란 선으로 그린 부분입니다. 물이 만나야 하는 곳인데 그게 없죠.
과거엔 그랬들지도 모르는데 지금 가서 보니 흐리멍텅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게 자기 것으로 하는 것에 좀 명확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까 차타고 저기 수구 쪽에서 올라와서 주차 한다고 했죠?
그쪽에서만 차가 들어오고 반대쪽은 산이 막혀서 출입이 안 됩니다.
지도를 보면 알지만 외백호가 크게 둘러쳐져 있어서 여긴 협곡처럼 되었고 외길입니다. 막다른 계곡인거죠.
그래서 생룡을 보는 방법을 말하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물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릅니다.
차타고 들어오는 것은 그 반대방향으로 들어오게 되죠. 물길이 있으니 길이 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지역을 가든 우선 볼 것이 물이 흐르는 방향입니다.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보고 용맥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위 그림으로 보면 물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데 청룡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거의 직각으로 물길을 갈라버리듯이 나있죠?
그림으로 설명하면,
검은 선 처럼 차를 타고 가든 걸어서 가든 어느 지역을 갑니다.
그러면 노란 선처럼 물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을 경우 붉은 선 처럼 산이 내려온다면 이걸 생룡이라고 합니다.
황희 선생묘를 기준으로 보면 붉은 선과 그 밑에 있는 두꺼운 산이 노란 물길을 막으려고 달려가듯이 합니다.
이런 방향을 우선수엔 좌선룡이어야 하고 여기가 그렇습니다.
좌선수엔 우선룡이어야 한다는 이론이 됩니다.
이걸 외울 건 없고 간단히 물과 산이 회전 방향이 서로 반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가도 우선 물길의 방향을 보고 산이나 건물이 서 있는 위치나 방향이나 자세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물길을 막으려고 하는지 보고 그 안쪽이 길한 장소가 됩니다. 가게나 집을 살때도 그걸 봐야 합니다. 물과 건물들의 배치죠. 요즘은 물을 도로로도 그렇게 봅니다. 도로를 보면 빗물이 흐를 경가가 어느쪽인가 봅니다. 그거와 건물이나 산을 같이 보죠. 서로 회전이 반대로 되어 사귀는가 입니다.
황희묘에서 붉은 선은 노란 물길을 막으려고 하는 듯한데.
보라색은 물길과 같이 흘러가는 듯하게 보입니다. 이걸 산수동거라고 산과 물이 같이 간다입니다. 이러면 이향이라고 하는데 고향을 떠난다고 합니다.
고향을 떠나면 됩니다. 너무 나쁘다고 할 건 없고 좋은게 있을 경우 고향 떠나서 성공한다도 되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아무튼 물길과 산을 보는 방법을 확실히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생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물과 산이 마주치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 명심하시면 됩니다.
물이 어디로 흐르나 어떤 산이 그것을 가로막으려고 하나 그러면 그 안쪽으로 간다가 됩니다.
그림에서 아래의 붉은 선의 산에 화살표 없이 선그은 것이 있는데 산이 이렇게 생기면서 끝나면 토성이 됩니다.
그 위의 황희의 청룡은 목성입니다. 목성 모양으로 끝난 것이죠. 목성산이 넘어진 것 같은데 넘어진게 아니라 이렇게 산이 끝나는 것의 모양을 보고도 오성으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청룡이 하나는 토성이고 하나는 목성이니 당연히 좋다 하겠죠.
그리고 파란선의 외백호가 끝에서 외수구를 막는 듯한 자세가 아니라 물과 함께 흐르는 듯한 방향입니다.
정말 아쉬운 곳이 됩니다.
아니면 아쉬울게 없기도 할지도요 ㅎㅎ
좌향을 정하는 것을 보면 이당시에 삼합수법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없었다면 이렇게 하는 것엔 다른 방법을 썼을 것인데 그런 방법이 아니라도 그런 원리는 있었습니다.
패철이 아니라도 이런 곳에 이런 향을 하는 것은 그다지 대단히 어려운 것은 아닌 곳입니다.
전에 말했듯이 물이 환포하면 향하는 곳이 있고 여기처럼 쳥룡이 원진수라고 하는데 이런 물을 끌고 와서 환포하면 당연히 그곳으로 하죠. 그런데 외백호쪽의 물길을 보고 거기로 할 수도 있는데 잘보면 약간의 반궁수 입니다. 이쪽으로 대들고 있져. 저 위쪽에 노란 동그라미 친 곳인데 그래서 때론 인생의 굴곡이 있습니다.
다만 후룡이 직살 즉 직선으로 내려오는 살이어서 혈이 한쪽으로 치우쳐 앉아있습니다.
살은 두 개 입니다. 직선인거하고 가파른 경사입니다. 이런 곳에선 혈이 한쪽으로 치우칩니다.(이건 도장법을 그렇게 하는 이론이 있기도 합니다.)
또 여기 청룡이 너무 낮습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나 할 정도인데 지금은 나무가 심어져있고 키가 커서 잘 보이지 않는데, 청룡도 도지목성입니다. (이건 옥수진경에 나오는 이론입니다. )
아까 말한대로 옆으로 누운 목성이라서 그리고 그다지 굴곡 없습니다. 이 청룡이 낮으니 묘와 서로 견주는 것이 되어 긴장감이 있게 됩니다. 이걸 나쁘다고도 하는데 굳이 높은 거만 좋다고 하는 거 같습니다. 이런 비슷하게 견주고 경쟁하는 듯한 용호가 있으면 능력있는 사람이 날지도요
묘앞에서 청룡쪽으로 가는 길을 가보면 낮아져서 묶인 곳이 있는데 아마 가족구성을 하는 것에 한차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묘의 혈장이 거북이 같아서 거북이가 산을 내려온다고 하던데 우리나라 거북이가 산에서 사는진 모르겠습니다. 그냥 혈장이 두툼한데 굳이 거북이에 갔다 붙이나 봅니다.
묘의 양쪽이 이렇게나 넓다랗게 선익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건 정말 보기 드뭅니다.
이걸 보고 거북이라고 하는 듯합니다.
금성이죠 솥이 엎어져 있는 것인데 요즘은 솥은 보지 못할 것이니 국그릇이 엎어져 있는 듯할 정도 입니다.
금성이니 돈이나 무사이고 요즘은 이공계입니다. 그리고 경영능력이죠. 판검사 처럼 좀 험한 듯한 것도 되겠죠.
이런 능력이어야 실무에 능합니다.
시를 짓고 글을 잘 쓰는 문학적인 능력은 판단력이 아니고 말 그대로 문학입니다. 문학을 잘하는 사람이 판단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위기를 극복하고 시비를 가리는 판단력이겠죠.
그건 백호입니다. 청룡은 사례에 따라 행동하고 백호는 현실을 보면서 사정에 따라 적용능력이 있겠죠.
이곳은 삼합수법을 적용해서 향을 따져 보았습니다.
수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곳이어서 경유파인데 경파인지 유파인지는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나무도 있어서 어느곳이어야 하는지 좀 그랬고 명확히 어느 선을 잡고 해야 하는지 미숙해서 그랬습니다. 물이 빠지는 딱 그곳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너무 생각이 많은 듯한데 의미론적으로 보면 수구가 이 국세에서 빠지는 그곳이어야 하면 외백호가 끝나는 곳을 해야 하지 않나도 생각해 봅니다. 다만 그러면 청룡끝이 아니라 좀 넘어서 이겠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데 대강 경유파라고 우선 하겠습니다.
그리고 향을 보면 절파로 곤신향 간인좌가 됩니다. 이것도 간좌곤향이거나 인좌신향인데 사실 기억이 안납니다. 참 이런 ㅠㅠ
아무튼 절파인데 태파에 절향이라면 좌선수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좌선수로 해야 하는냐도 헷갈립니다. 내명당으로 기준으로 하면 그렇게 하는게 맞는데 왜 내명당이냐가 있습니다. 외명당을 기준으로 하면 안되냐인데 황희가 내명당을 위해서 산 사람인지 외명닫을 위해서 산 사람인지가 있을 것인데 이정도 인물이면 외명당을 위해 산거 아닌가 합니다. 즉 사보다 공으로 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향태파를 하거나 욕향을 하면 너무 돌리니 그런데, 그러면 태향태파는 백보전란이라고 해서 백여미터의 내명당정도여야 합니다. 그것은 되는 듯합니다.
태향태파가 되면 시조이거나 뭔가 시발점이고 준비한 미래계획이 있는 것이 되는데 뭐 어떨지,
여긴 태파절향이니 결론은 태파라서 앞날의 전형이 되는 인생인데 절향이라서 절을 추구했는데 절은 끊어내는 것이면서 다른 것을 하기위한 관절넘기를 하니 뭔가 해결하기 위한 일이나 다른 전환을 하는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또 생각할 것이 왜 저 넓은 논이 있는 외명당을 내명당으로 하면서 앉아 있지 않느냐 입니다.
굳이 외명당 내명당으로 구분해야 하느냐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선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그렇죠.
청룡이 생룡이기 때문에 청룡의 원진수가 빠지는 곳까지가 내명당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집 샘물이라고 할 수 있죠. 왜 생룡이냐고 하면 외백호 따라 흘러가는 물을 청룡이 교차하면서 있기 때문에 이 청룡을 의지해서 이 묘자리가 형성된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청룡 안쪽과 바깥쪽은 다른 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내외의 명당이라고 하겠습니다.
명당이라는 것은 내 활동공간인데 내명당은 사적이라하겠고 외명당은 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문에서와 사회에서라는 식으로 구분하겠죠.
그러면 향을 청룡을 안산으로 하고서 있으니 이것이 가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고 향이라는 것이 그사람의 지향점을 말하는 것이라서 내명당을 지향한다가 됩니다.
내명당을 지향한다면 자기나 가족의 안위만을 위하는 것이 되어서 우리가 아는 청백리나 정치를 잘하는 그런 정승으로서의 모습은 아니게 됩니다. 공적이란 사회나 나라나 대의를 위해서 도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는데 이중에 어느정도의 크기로 사는지는 모두가 다르겠지만 우선 자기안위보단 공적인 부분을 좀 더 관심가지는 정도의 인물이 아닐까가 우리의 기대인겁니다.
그랬을때 우리가 아는 기대와 다른 것이냐가 있습니다.
황희의 일화는 우리가 아는 그런 청백리와 다른 모습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뭘까인데 간단히 생각하면 이중적인 것이고 청백리라지만 사실 구린 것도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끝내면 또 그런가 하고 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 중엔 이런것도 있습니다.
사실 도닦는 사람입장에선 이 황희의 일화들이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는 거 안 막고, 가느 거 안 말리며, 주는 거 거절 안 하고, 달라는 거 안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난 나만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공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는데 달라면 줄 것이고 간다면 가라고 하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집에 재물을 잔뜩 모아 두어도 누군가 배고프니 달라고 하면 줍니다.
소유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것이라고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배푸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렇게 이해할지 모르는데 그건 속새의 논리이고 도에선 달래서 주었다. 그럽니다. 이걸 그대로 봐야 합니다. 달라니 준다. 입니다.
내 호주머니에 있다고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요?
오히려 왜 내 것인지가 모르겠습니다.
내 호주머니이니 당연히 내꺼다!!
사실 이거도 이데올로기라고 봅니다. 그렇게 우리가 교육받았고 그렇게 알고 산거지 이건 이상한 논리라고 봅니다.
게다가 도닦는 곳에선 공이고 무위적인 것이 있는데 속세에서의 가치관이 더 기이한 것인데, 난 그런데 다른 분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도닦는 입장에서라고 했습니다.
황희가 얼마나 도를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개념을 알았다고 봅니다.
불경에도 있고 그당시에 고승도 있고 사실 도를 배우는 다른 기인들도 있었습니다.
접촉이 그리 우려운게 아니죠.
황의희 어떤 사람이냐는 내가 할 말은 아닌데,
묘에서처럼 지향하는 것은 자기위주이고 내명당적이라고 하는 것이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는게 남을 위하는 것이 된다는 개념도 있으니까요.
이게 자본주의 논리이기도 한데 그들은 그것으로 기만하면 자기배를 채우지만 도의 입장에선 나를 위하는 방법이 소유욕이나 탐욕이나 자기 생계나 감정 편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닌거죠.
날 위합니다. 그런데 나의 무엇을 위하느냐 그것이 문제인거죠.
내 무엇?
내가 남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을 지향하면? 이런 내 깨우침을 위하면? 이런 내 지식을 위하면? 이런 내 가치고나을 위하면? 이게 다 같은 말입니다. 나를 위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무엇을 위하는 것이냐이고 이런 것을 형성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런 지식을 가지기란 쉽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나를 엄청 위할 수록 남을 위한 게 되죠.
이런 것이 웃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엔 아무도 안그러니까요.
그런데 그래서 도닦는 곳에선 도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기도 아니고 어설픈 이타도 아니고 내외가 이미 일치되는 경지를 알면 또 그 이치를 알면 그리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걸 천인합일이라고 하는데 이말이 신비한 것으로 왜곡되었지만 아무나 이해할 것이 아니라서 그렇죠.
이것이 나를 위하는 그것이 남을 위하는 것으로 소통이 되는데 그때의 내가 위하고자 하는 나라는 것이 일반적인 자아나 자기나 자기 가정이나 자기위주의 어떤 것이 될 수 없게 된 경지가 있는거죠.
우린 이치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이치로 자기자체를 구성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도덕이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식의 공부인데 지금은 이걸 납득시키기가 참으로 힘든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면으로 보면 황희의 일화가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고 이런 사람이 적은게 이상한 것입니다.
이런게 그 당시에 또 그 이후에도 많아야 합니다. 이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이니까요.
그래서 세종은 황희를 이해했나 봅니다. 세종도 그정도의 인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