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18. 10. 30. 21:28

보임

보인다는 것에 대개는 눈을 위주로 한 시각적인 현상을 말합니다.

그것으로 지식적인 이해도 보이는 것으로 말하게 되고, 집중하는 것도 보인다고 하는데 내가 보는 것이라고 할 경우 눈으로 본다는 것 말고도 내가 주로 관심가지는 것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래서 본다는 것이 감각되어지는 수동성하고 내가 감각해가고 활동하기 위한 능동성을 다 말하는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더 세분하면 조심하라는 의미로 그것을 봐야 한다고 할 것이고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쓰는 것이어서 이런 것을 말하다보면 너무 지난하니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감각으로 보는 것이 안이비설신의 이외에 영안이라는 것도 있고 기감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자천을 하다보면 결국 언젠가는 당면하는 현상이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기감을 포함해서 어떤 것이 보이고 느껴진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때 무조건 좋다고 해서 덮어놓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너무 거부하거나 비판적이거나 회의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타날 때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을 지금 말고 다음에식으로 유예하거나 원할 때 나타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을 무조건 억누를 수 없고 그런 억누름도 자천에 도움되지 않으며 집중력을 흐트려 트리는 것이 되어서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거부할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 이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런 현상을 혼자 겪게 될 경우 대개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면 대인관계도 힘들고 사회생활도 어긋나게 되며 인생의 진로에 크나큰 관절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지도를 받는다고 이것이 정상적인 방향으로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전부터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그분의 조언에 귀기울이고 마음을 잡아가지만 이런 현상이 일어난 후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라면 이미 자기가 느끼고 보는 것에 경도된 것이 있어서 조언을 신뢰하지 않게 되고 자기 식으로만 해석하게 되는 서로간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게 됩니다.

순서대로 공부하면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에 이미 준비된 마음이나 지식이 있고 감당할 자신감을 축적하면서 해간다면 좋겠지만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급하고 불시에 뭔가 접촉되고 나타나는 현상들에 압도되는 것도 있게 되는 거라서 이런 현상들이 통제 되면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제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렇게 자꾸 말을 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느껴지고 어떤 것이 보이고 어떤 것을 경험한다고 해도 무조건 절대적으로 그건 그사람의 의지가 그러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그런 것을 바랬다는 것입니다. 바라지 않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것이죠.

즉 왜 이런 것에 단언까지 하느냐면 나에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아니고 나에게 입니다. 내가 보고 겪어야 하는 것이라서 내 일이고, 내 인생이,고 내 문제이고, 내 것이고, 내 심층이고, 내 심리이며, 내 마음이고, 내 영혼이고, 내 짐이 됩니다.

그러니 내가 마음에 동하게 하는 것이 있고 그 동하는 것에 따라 응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뭔가 보인다면 그건 니가 그걸 보려고 해서다 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난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뭘 바라는지 뭘 바라고 있는지 그 바란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공부는 해보았을까요?

안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세밀하게 관찰 한 적이 없고 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막말로 자기에게 일어난 것은 자기가 바라기 때문이라는 이런 단순한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내가 그것을 일어나게 할 만한 것을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원인을 만들어서 입니다. 이걸 인과응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내가 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겪은 것도 입니다.

내가 한 일의 응보가 있기만 한게 아니라 내가 해야 했던 것들 외부에서 다가온 것으로 한 것들 주위에서 일어난 것들 그 시대와 사회에서 일어난 것들 그런식으로 내가 그 시점을 지나면서 주변과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이 나에게 응축이 되고 그것은 어느 다음 시점에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러면 이건 뭔가의 현상, 뭔가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것 중에 영적인 현상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은 뭔가 특별하거나 예외적으로 받아들일려고 합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든 초월적인 것이든 그 무엇이든 역시나 내 인생의 하나이고 과정이며 사건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의 연합이고 이어짐이며 인과이고 작용들의 결과들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물리현상입니다.

내가 과거에 한 잘한 일이 지금의 하나의 기감각으로 와서 기분을 좋게 할 수도 있고 그로인해 공부의 진전이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아니면 공부를 방해할 수도 있는 것이며 아무튼 시간을 건너오는 것인데 우린 대개 기라는 것으로 이런 시공의 초월성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감이나 영적 현상이나 느낌이 꼭 그런거 같다고 해도 그건 감각의 한계로 인한 것이고 예를 들어 그 기감각이 하나의 공부로 하나의 인생의 사건으로 또 의미로 진행되어가는 것을 추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의 느낌 즉 스물거리는 것이나 뭔가 다가와서 머리로 들어오거나 팔이나 다른 곳에 접촉하는 것 같거나 어느 신체부위가 열기나 전기나 시원한게 흐르는 듯한 것들이 기감의 전부인데 즉 피부가 느끼는 다양한 감각입니다. 결국 감각기관의 한계로 인한 감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운명의 다가옴이며 인생의 변화이며 사건의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느낌은 피부느낌이지만 운명의 일어남이라는 것을 서로간의 연관성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건이 기로서 오고 다시 현재의 나와 합쳐지면서 다른 것으로 진행되어 미래로 기가 되어 갈 것이고 그것은 미래에 다시 기로서 느끼게 되어 그 미래에 뭔가의 결과를 만들 것입니다.

기만이 아니라 영적인 어떠한 현상이라고 그것은 내가 부른 것이고 내가 부른다는 것은 내가 저지르고 행동하며 일으키는 것으로서 생성된 것이고 변화되어가며 다른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 그것이 뭐든, 그건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랐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로서 입니다. 즉 크게 보면 내가 지은 업이고 그것이 이런 업으로 즉 현상으로 사건으로 인생으로 진행되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보이는 것들이나 느끼는 것들에 대한 정확도를 높여가야 합니다.

그냥 느껴지기만 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자기 감각의 하나로 발전시켜서 감각기관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일 뭔가도 아니고 공부의 성과라고 할 것도 아니고 이건 자기가 살아가기 위한 자기 도구이거나 감각입니다. 이것이 되었으니 이것을 더 잘하고 제대로 하기 위한 연마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되었다고 해도 그게 다가 아니라 나름의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살아가는 것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너무 엉성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쓰다가는 그저그런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누구가 안이비설신의를 사용해서 감각할 거라고 할지 모르는데 그건 오해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감각이고 다른 감각기관이며 다른 감각방법이며 다른 깊이의 사용이며 다른 범위이며 다른 이해이며 다른 용도이며 다른 의미로 입니다.

이곳은 도를 공부하는 곳이니 그저 남들이 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할 것은 아니고 진짜 뭐냐는 것을 알기 위한 곳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들 다아는 지식을 말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같은 감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눈으로 시각을 쓰지만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 시각적인 것이 같다고 같은거라고 보려는 일반화에 우리가 너무 쉽게 굴복하는 사고입니다. 내가 너랑 같은 화분을 본다고 해도 다른 것을 보고 있으니 같은 눈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누군 화분을 보면서 과거의 고통으로 힘들어 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잔인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눈이 화분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감각으로 살아가는지는 알 수 없고 굳이 따질 것도 없습니다.

또 내가 남과 다른 감각으로 산다고 자랑할 것도 그것을 함부로 말할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며 체계로 만드는 것이어야 하고 결과로서 보이는 것입니다.

즉 의사라면 자기만의 감각으로 남들 보다 좀 더 사람을 잘 고치는 것입니다.

내가 술사라면 남보다 더 깊이 알아서 더 남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영적이든 특이한 능력이든 그것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것으로 남들에게 더 나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주라는 것을 말하면 과거의 사주이론에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기이한 것들도 많습니다.

신살만 말해도 원리는 모르겠는데 그것이 때론 잘 맞기도 아니기도 한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이걸 어찌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을 해놓은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선조들 중에 나름으로 공부하고 체득하며 뭔가 자기만의 방법으로 찾아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에 그 방법을 쓴 사람은 그 방법으로 정말 신기하게 잘 맞추고 했을 것이지만 그것을 배운 제자는 그것이 잘 안되는 것은 우리가 쉽게 접하는 일화들입니다. 이건 서로 다른 것을 보기 때문이며 다른 것을 보게 된 것은 다른 성향이고 다른 추구이며 사람이 다른 것 입니다. 하지만 나름의 다른 봄인데 남의 것에서 자기 것을 찾고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두가 영적인 뭔가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으로 뭔가를 해서 타인들이 이롭게 된 것을 세상에 내놓거나 직접 도움주는 행위로서 남다름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 영적 능력있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어떤 도움을 주고 어떤 이바지를 하고 있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말하자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으로 자랑하고 그것으로 뭔가 이득을 취하고 명예를 갈구하고 흥미로 사람을 다룬다면 그다지 높은 마음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군가의 운명을 맞추는데 그것을 이치적인 것으로 끌어내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을 남들도 쓰고 나처럼 영적인 방법으로 쓰지는 못해도 그와 엇비슷하든 똑같든 할 수 있는 방법을 창안하고 알려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 영안있다." 가 아니라 이건 이렇게 해석하고 이런 이치로 따져서 보면 이런게 보인다고 하는 것으로 남들도 자기처럼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다산이 그런 특이한 능력이 없었을 것이며 멀리는 연개소문이 남다른 재주가 없을 것이냐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말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해서 공부해서 남다른 학문을 만들었거나 그러해서 나라의 위기를 이겨냈거나식으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영적, 초월적인 능력이 있어서 그러했다고 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도 학문을 이루었을 것이며 위기를 이겨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닌 본말을 전도해서 사람을 평가하고 보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누가 뭔 능력있다더라 뭔가 본다더라 이런게 아니라 누군가 뭔가를 볼 수 있을 방법을 만들었다더라 누군가 이런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아냈다더라는 말이 전해지길 바라는 것이며 이런 것을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입니다.

그래서 정확도에 대한 단련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렇게 그로인해 더 많은 사람이 이세상을 위해 할 일에 더 잘 하기 위해서이며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입니다.

그다음은 그 감각에 대한 해석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냐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 됩니다.

꿈으로 설명하면 어떤 꿈은 그 다음날이나 이후에 꿈에서 본 것과 같은 사물을 보거나 상황에 처하거나식으로 꿈과 거의 비슷한 것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꿈은 그다지 비슷한 것을 보거나 그런 것은 아닌데 의미가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한 꿈인데 그 꿈속의 인물이나 사물로서가 아니라 다른 식으로인데 억울한 것을 겪어서 꿈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또 어떤 꿈은 상징 같습니다. 상징으로 해석해서 그것이 내 일상에서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이건 심리학에서 많이 연구한 것이라서 이미 익숙하고 또 우리식으로 꿈을 여러 비유과 길흉으로 해석하는 것이 많으니 이런 것이 또 재미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꿈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년이 지나서 나타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면 정말 놀랍다고 해야 되겠죠. 시간을 건너가는 것은 그만큼 신기하니까요.

그리고 어떤 꿈은 자기만의 의미로 봅니다.

내가 꾸는 꿈에 그 사물이나 인물이 나오면 꼭 이러더라면서 나에겐 이런 것으로 주로 나타나는 그 주관적인 것이 있습니다. 남들은 같은 것이 나와도 다르게 되는 것이어서 나만의 의미이죠.

그리고 꿈은 여러가지를 함축하고 융합해서 당최 알 수 없기도 합니다.

하나의 인물에서 여러명이 느껴지는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말로 설명못할 이상한 꿈도 부지기수이고요

이렇게 말하면 정말 꿈이 너무도 다양하고 뭐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 입니다.

그런데 이런 꿈들의 원리들이 우리가 영적이라고 하거나 초월적이라고 하거나 감각적인 체험들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을 해석할 경우 그저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의미를 보다가는 낭패를 겪게 됩니다.

분명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을 할 것인데 그런데 대개는 그것을 하지 않는 듯하기도 합니다.

뭔가 봤다 이러면 이건 이거다. 이걸 봤다. 이러면서 자기가 본 것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기 보다 이걸 봤으니 이거다에서 사고가 멈춥니다.

왜 이렇게 꿈보다도 더 해석하는 것에 등한시하고 쉽게 굴복하는가 하면 사실 꿈은 다들 꾸는 것이고 남다를 것이 없고 또 남다르게 특이한 것을 자주 꾼다고 하는 사람은 역시나 별다른 해석을 하지 않고 그냥 자기꿈을 절대시 합니다.

이런 것을 볼때 이런 것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지 모릅니다.

우선 이런 능력이 있는 분들이 인문적인 소양이 부족합니다. 학교에서 배울 때 우린 논리나 합리적인 사고나 객관적인 사고훈련을 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우린 과학적인 사고하는 것이 뭔지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게 됩니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우리가 뭔가를 알때 어떤 일이 우리 머리에서 일어나는지 사고하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사고하는 것에도 여러 방법이 있다는 것을 또 그로인해 자아라는 것이나 감각이라는 것이나 다양한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해보지 않았고 하려고도 안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분명 과학이라는 것도 사물을 더 잘 알기 위해서일 것인데 우린 얼마나 사물을 이해하고 알기 위한 훈련을 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사람이 배우는데 사람을 배운게 아니라 직업을 배웁니다.

그러다보니 사고하지만 사고가 뭔지 모르는 역설을 우린 체득하게 되죠.

사고해서 자기만의 합리적인 체계를 만들고 주체적인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어떤 현상이 나타나고 경험해도 그것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원리를 추적하고 그 지식을 배양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결론내고 쉽게 말하고 아니면 말고식으로 무책임한 발언이나 닥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되어 갔습니다.

모른다고 하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에 당연시 하고 지식을 비웃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런 것이다 보니 갑자기 도를 공부하고 뭔가를 해보려고 하다가 이런 것을 경험하게 되면 역시나 평소의 익숙한 대로 말하고 결론내면서 그냥 자기 사고에 끼워넣고 뭉쳐서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해 버립니다.

그것을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고치고 변화시키고 하나하나 다시 배워야 하지만 이미 건너온 길어 너무 멉니다. 쉽게 다시하기 어렵죠. 그래도 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안그러면 이런 것이 나타날 경우 그로인해 힘들거나 아쉬운 삶이 되거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하는 경망스러움 중에 꼭 자기가 보거나 느낀 것을 절대시 하고 뭐든 다 아는 듯한 착각을 합니다.

그것에도 한계가 있고 경계가 있다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 허영 역시 혼자 맘대로 자기 감각을 확장해서 그렇습니다. 어디까지이고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이고 이런 것이 왜 가능하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그런 것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자기 임의대로 하다보니 가능 불가능도 모르고 점점 허황된 것으로 나아가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두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이런 남의 글을 읽을리 만무합니다. 이미 자기가 보는 것을 믿지 남이 하는 말은 그다지 무시하기 일쑤기 때문입니다. 뭔가 알 면 알 수록 겸손하고 더 낮추어가는 것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알면 건방져지고 하나 느끼면 대단한 듯이 심장을 부풀리는데 급급합니다.

거기에 단순한 논리적인 대화도 어려운게 많습니다. 말이나 사물의 이해에는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말의 순서나 근거나 합리성이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한 무지가 있습니다. 쉽게 말이 되냐 말이 안되냐인데 말이 되는 것에 대한 인지부족입니다. 이건 내가 대화하면서 느낀 경험입니다. 뭔가 설명을 하면 믿지 않는데 내가 지나치게 따지거나 분별한다고 하기도 하고 자기가 느끼고 보는 그것이 맞는데 그것을 근거나 논리로 따진다고 합니다. 상대가 보고 느낀 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알기위한 다양한 방법이 이는 거라고 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이거역시 그분들이 자기의 체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있는 그 방법을 연구하지 않아서도 그렇습니다. 자기체험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 그것을 하려면 남들과 대화하는 방법 소통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건 다른 사람과 같은 말을 쓰고 논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이런 간단한 것을 모르는 것은 처음부터 습관된 사고체계라 어려움이 많습니다.

경도된 마음을 되돌리는 것은 분명 어렵습니다. 전제나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세가 없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항상 경계심을 가지소서


어려운 것중에 자기가 믿는 종교의 신이나 그 비슷한 종류를 보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적이면 보살이나 부처나 뭐나 또 기독교라면 여호와거나 천사거나 뭔가 그런 것인데 도교적이면 도교적인 신들이고 이런 것은 자기가 믿는 또 마음에 깃들여 있는 욕망들인데 이런 것을 체험하게 되면 너무도 흥분하고 경도되어 제정신을 차릴지 못합니다. 아마 종교인이 자기의 신이 강림하면 한치의 의심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쪽에선 그렇게 가르치는 것도 같고 가르치는 사람도 역시 그다지 이런 것에 지식이 없기도 하고 그런데 이건 위험한 것들입니다. 물론 그들 종교에선 그렇게 말안하겠죠. 그렇게 경계라도 해주는 종교는 분명 수준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는 경우는 수준이 떨어지는 것인데 그걸 알지도 못하니 걱정인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내가 할말이 아닐 겁니다. 외부인인 내가 그것들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으니 굳이 할 필요는 없겠죠.

아무튼 이 강마을에서도 뭔가 대단하다는 신이나 뭔가 보게 된다면 그거 역시 내가 바라는 욕망을 보는 것이니 비판적이고 원리적인 지적이해를 포기하고 만다면 공부는 거기서 끝입니다.

스스로를 포기한 것과 같아서 이미 영혼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니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하는 그 강단이 있는 것이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니 이건 분명 위험한 경우가 되는 것이니 이점도 염두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도 공부가 심심하고 별거 아닐 듯이 하다가도 한 번의 실수나 착각이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