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18. 12. 15. 22:58

언어화

깨우침은 언어화 해야 하는데, 깨우침과 언어는 다른거라서 서로 대응되지 않겠지만

도닦고 별일 없이 가만히만 있고 그렇게 홀로 있다 가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 생활하고 살아가는 것이어야 하니 이건 깨우침이 실재 생활로 나와야 하는 것이 됩니다.

근데 활동하려면 그냥 하는게 아니라 기준이 있어야 또 원칙이 있어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됩니다.

깨우침은 그 기준이나 가치관 판단의 원칙이 세워지는 것도 되기 때문인데 뭘 말하고 행동하고 왜 그래야 하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모르면 어찌 깨우쳤다고 하겠어요

또 깨우쳤다는 것이 깨우침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니 깨우침으로 살기 위해서 깨우침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깨우침을 구체적으로 실재 생활로 하려면 우선 말로 하는 것부터이기 쉽습니다.

물론 행동부터 해도 되지만 혼자살면 단촐한 행동하고 마는 것이어서 상관없기도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 행동엔 이유를 설명하라는 요구가 있게 되고 즉 다른 사람이 있다면 또 세상과 산다면 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내 행동과 말엔 서로간의 관계와 입장정리와 규율이나 원칙이 없어선 안되며 사회에서 살면 사회와의 관계로 그에 따른 행동이 없다면 자기만 보고 자기식만 주장하고 남이나 사회나 세상은 안보는 지나친 협소한 인지일 뿐이게 됩니다.

거기에 깨우침을 실재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이 또다른 깨우침의 길이라서 이걸 하지 않는다면 소극적인 공부에서 약간의 이룸이지 전체나 큰 것을 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내 존재는 분명 남의 도움과 바탕이 근거로 해서 가능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더욱 자기의 깨우침이 아니라 깨우침의 발산에 대해서 생각을 안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발산이 우선 언어이고 언어와 함께 행동이라는 것으로 나가게 됩니다.

더욱이 자는 거, 먹는 거, 입는 거, 숨쉬는 거, 심장 뛰는 거, 세포분열과 생각하고 감정 쓰고 운명과 업과 구도행과 자비행이 모두가 누군가에게 의지 한 것이며 누군가와의 연관에서이며 무엇이라는 것과도 그러하며 어느 것도 홀로가 아니라 서로간의 연관이고 연기이며 관계에서라는 그 중중무진한 상호간의 들고남을 모르면 분명 깨우친게 아니라 잘났다는 우월감을 그렇게 내보이거나 거만하게 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하지 않음이라는 또 말로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말하지 않음과 말하지 못함은 다른 것이라고 보는데 말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못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고 하지만 안하는 그러한 하고 안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닌 중간자로서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지 말하면 누구보다 잘하고 더 잘하고 다양함에서 자유롭게 드나드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이해시키지 않고 그저 내 행동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받아주는 분들이 깨우친 것일지 모릅니다.

요구하거나 주장하는 자가 대단한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용납해주는 분들이 더 마음이 넓은 것이 됩니다. 이런 경도된 상황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안하면 안하는 것이지만 말을 한다면 잘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언어화한다는 것이 그냥 주절주절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인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가 입니다.

뭘 전달할 까요?

깨우침요? 무엇을 깨우쳤을까요? 무엇을 깨우치는 것이어야 하고, 무엇을 깨우쳤을 때 깨우쳤다고 하고, 그전에 깨우침이 뭐죠? 우린 깨우쳐야 하는 것인가요? 왜 그걸 하고 싶고 왜 그러한 것이 있게 되었고, 누군에게 또 본인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는 이유는 왜인가요? 이런식으로 묻고 묻고 하면 한 없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깨우침이라는 것이 있다면 뭐가를 보았다는 것이나 뭔가를 느꼈다는 것이나 뭔가를 알았다는 것이나 뭔가를 해결했다는 것이나 뭔가를 가졌다는 것이나 뭔가를 이루었다는 것이나 그런 것이라고 보는데, 그 뭔가가 뭔가요?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걸 설명하려면 어떤 언어가 필요하던가요? 그게 아니면 상달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신비하고 활홀한 뭔가를 느꼈다는 것이고 각성했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전혀 언어가 아닌 곳이라서 함부로 또 감히 언어로 할 수 없다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런 것도 결국 언어화 되어야 합니다. 이유는 내가 체험한 것이라서 입니다. 난 이미 물질이고 내 감각에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감각된건 물질(상식적인 의미의 물질)화 된 것이고 즉 감각되고 느껴진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고 감각하기위해 갈고 닦은 남다른 감각화를 이루지 않으면 이걸 감각할수도 각성할 수도 없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언어화 된다고 봅니다. 말하는 것은 개념이라서 또 언어화 하는 방법이라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화 하는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라는 것입니다. 그 구현이 아니라면 전혀 깨우침도 각성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세상의 일이어야 하고 결국 이세상의 일입니다. 그게 아닌 세상의 아닌 초세상이나 다른 세상이라는 식으로 해봐야 세상입니다. 그것조차 모른다면 역시나 개념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서 더 연구할 일입니다.

설명할 말이 없고 설명할 길이 없고 설명할 방법을 모르던가요?

이건 개념을 모르는 것이 될지 모릅니다.

깨우쳤다는 것이 이미 어떤 개념을 안 것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건 개념입니다.

어떤 개념을 알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그리 록록치 않다는 것이 문제가 발생하게 된 곳입니다.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할게 전등록이나 선어집이나 그런 과거 책들을 보면서 거기서 깨우침을 말하지 못하거나 대답하지 않는 것을 또 비유적으로 다르게 독창적으로 교묘하게 말하는 것들을 보면서 그러한 것이 깨우침으로 알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르치기 위한 방법과 깨우침에 대한 설명의 다름을 오해하면 애초에 접근할 수 없는 인지능력이 됩니다.

그런 것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면 자기의 깨우침을 설명해야 하며 잘해야 합니다.

물론 또 말하지만 언어화는 하나의 구현방법이고 해야할 것은 실현입니다. 즉 각성실현입니다. 현실에 이 세상에 내려 놓아야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가 깨우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고민하는데 세상에 다양한 개념들이 있고 사람마다 다르게 알고 다른 수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개념도 사람마다 그 이해나 설명이 다르고 체험도 다르며 가지고 있는 개념의 숫자도 다릅니다. 누군 100개 누군 천개 그럴 것인데 대체적으로 얼마나 가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또 개념을 설명하기 우ㅐ해 개념을 설정해야 하고 찾아야 하며 만들어야 하고 내 개념과 다른 사람의 개념을 정리해야 하고 서로 비교해야 하며 내 개념을 남의 개념으로 번역해야 하고 남의 개념을 내 개념으로도 번역해야 하며 시대적인 개념을 다시 해석하는 개념이 있어야 하고 사회가 다름으로 인한 또 세대가 다름으로인한 개념차이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개념입니다. 개념을 깨달아서 개념을 말하는 것이고 개념을 듣는 것이며 개념을 구현시키는 것이며 그것이 다시 다른 개념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아무튼 개념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셜명을 잘하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개념을 창조하고 새로이 만들어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려면 자기의 개념을 설명할 방법을 또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념을 아는 것이 언어화하는 관건이고 개념이라는 개념조차도 없다면 그건 아직 인간의 사고유형이나 사고 관찰이나 세상의 이치을 잘모르는 것이 됩니다.

개념이 없으면 말하지 못합니다.

밥먹었냐는 말도 밥이라는 개념, 먹는다는 개념, 묻는다는 개념, 묻는 이유라는 개념, 배고픔이라는 개념, 배부름이라는 개념, 먹는 이유라는 개념, 서로 대화한다는 개념, 무수히 많은 개념이 중첩됩니다.

그래서 개념을 하나의 문장에서 얼마나 인식하느냐가 알아듣는 깊이가 되고 반대로 얼마나 많은 개념을 인식하면서 설명하느냐가 설명하는 깊이이고 깨우침을 좀 더 설명하게 되고 더 정확하게 더 자세하게 더 실천하기 쉽게 더 원하는 이유를 위해 등으로 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개념을 가진 가짓수가 다릅니다. 그로인해 더 많이 설명하고 더 잘 설명하겠죠.

깨우침을 설명하면서 아쉬운 이유 중에 본인이 개념을 몇개 몰라서도 그렇습니다.

몇개 안 되는 개념을 알고 있으니 말의 설명이 아쉽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알거 같은데 이건데 저런건데 뭔가 있는데 그런 뭔가를 언어로 구현하지 못하는 건 그것을 설명할 개념을 모르기 때문이며 또 그 개념을 전달하는 요령이 부족한건데 요령은 개념을 더 세분하고 더 정확히 알수록 생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각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하고 세세하며 중층으로 복합적인 너무도 많은 개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개념들 끼리를 잘 조합하고 관계짓고 짜맞추어서 설명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 잘 알지 못해서 개념을 만들지도 이해하지도 구분하지도 못하는 엉성한 이해를 깨우침으로 알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개념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자기가 뭘 알고 뭘 이해하고 어떤 것을 감각하고 어떤 것을 볼 수 있고 어떤 것을 말할 수 있고 하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관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뭔가 보지 못하고 뭔가 알지 못하는 것이 개념이 없어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념이 없으면 어느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뭔가 각성했다면 개념을 본 것이 됩니다.

지금은 과거에 없던 개념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고 연구되고 있는 시대이며 과거엔 소수만 알던 것이 지금은 쉽게 알 수 있는 시기 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것으로 말하지만 이미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고 이미 쓰여지고 있는데 자기가 처음 안 것이라고 새로운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깨우침을 설명할 다양한 개념들이 이미 널리고 널려서 얼마나 귚고 다양한 개념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설명하려고 얼마나 깊고 다양하며 방대한 체계들을 이미 구축하고 있는지 모르는 우물안의 개구리 신세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과거의 어떤 개우침도 지금은 다 공개되어 있고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에서도 그러한 것은 있었고 또 나오고 있으며 그런 보편적으로 비슷한 것이 많다는 것도 모르면 안됩니다.

또 자기의 체험의 고유함만을 주장한다면 누구나 자기가 체험하고 감각하는 것으로 또 살아온 과정 다르고 성격다르고 체질 다르고 감각능력 다르고 운명이 다르고 업이 다름으로 인해 그 차이만 말하고 생각하면서 그런 것이 그런 이유로 다르니 사실은 비슷한 것인데 사람마다 다르게 번역되어 감각한다는 원리를 납득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차이와 우월성만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 비슷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작은 마음입니다.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것이 됩니다.

알고 있는 개념이지만 쓰고 있지 않으면 들어서 알고 읽어서 알고 그런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쓴다는 것은 그것으로 사는 것이고 그것이 자기 것입니다.

안쓰는 것은 내것이 아니고 그것으로 안 산다는 것이며 무관한 것입니다.

쓰고 있는 것이 내 것입니다.

그외 안쓰면서 내 것이라고 한게 있는데 이건 나름 방법이 있는 것이고 이걸 아는 경우는 못보았습니다.

원리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암튼 자기가 쓰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해서 날 이룬 것이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날 이룬 세포가 날 이룬 기가 날 이룬 신과 날 이룬 영이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개념이 있는지 보고

어떤 영이 있는지 보는 것이며

그 개념에 따라 상대 파악인 것이며

그 개념이 사는 맥락이라서 행동 원칙이며 미래 결과가 되는 길입니다.

개념은 언어로 설명하지만 그전에 그런 성취가 있는 것이며 그성취는 과거가 지금 이룬 것입니다.

개념은 어느정도 자연적으로 되고 어느 이상은 노력이 필요 합니다.

그 노력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을 보고 그 정신의 수준 영의 종류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기를 운행하면 그게 도가 진전되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저 기를 운행시키는 능력

기를 감각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와 무슨 상관이겠어요

도의 정의에 기를 운행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기는 생명유지를 위해 또 생활하는 중에 나타나는 다양한 자연적인 신체체계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하고 도가 이루어지는 것과의 연관성에

정합성이 없다면 그건 기운행 능력이지 도는 범주가 다른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르게는 말을 하라고 하지만 말을 잘하고 인기가 많고 유명하며 어떤 지위가 있고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위세가 있다고 도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그건 분명 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말 잘하는 것이 도와 대체 무슨 관계며 유명한 것이나 지위나 그런 것이 도와 범주가 다르고 논리계형이 다르다는 것이나 이런 정도의 상에서 헤어나지 않는다면 도의 길과는 무관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겠죠.

이런 개념이 없다면 그런 개념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개념이 없는 성취가 됩니다. 아마 성취가 아닐 것입니다.

성취는 개념을 이해한 것이고 그 개념은 영이되고 정신이 되고 인격이 되고 삶의 맥락이 되고 정체성이 되어가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가로 그 행함으로 내 정체를 말하는데 그 행하는 그것도 개념이며 어떤 행이냐도 개념이며 그로인해 나를 규정하는 그것도 개념입니다.

그러니 개념이 있으면 존재이고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개념을 고집하지 않음으로 존재이면서 아닌 것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품격을 높여 상위로 가면 모든 개념 더 많은 개념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개념을 구분하고 창조하면 설정하는 이유를 알고 그것을 자유롭게 합치고 구분하며 합치는 정도와 구분하는 정도를 알고 이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모르는 개념도 알려주면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문제성을 이해한다는 것이 되겟죠.

상대가 뭔가를 설명하는데 생소한 개념이라서 대개는 인식을 못합니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안보는 것은 들어도 인식이 안 되는데 대개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나 자지가 좋아하는 것만 보는 것이어서 그외의 개념은 인식이 안되는데 그건 선입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다는 것은 그사람의 개념을 듣는 것인데 왜 그러한 것에 그리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것에서 감정을 가지며 무엇을 하소연하고 말하고 싶고 관심을 가지려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내 감정을 비울 수 있어야 하고 선입견을 제어하고 들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질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개념을 가지지 않아도 개념을 들을 수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개념을 가져야 남의 개념이 들린다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고 그다음이 내가 그 개념이 없어도 상대가 중요시 하는 개념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개념없이 개념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차로서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이걸 위해 고정관념없고 있다면 뭐가 있는지 알아서 다룰 수 있고 마음 비우고 공이라하고 관념형태 조심하고 이런 것이 초기 공부이면서 무한히 하는 공부입니다.

개념에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대개는 사회의 습관이 내 습관이 되고

사회의 전통이 내 전통이 되고

사회의 관레가 내 관례가 되어 무심코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 것은 사회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도 개념인데 이걸 알아야 다른 개념을 알게 되고 개념을 비우기도 만들기도 다르게 변형시키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되며 그런 자유를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개념을 알아야 개념을 넘어가게 되고 그래야 개념이 없게 되어 무심을 이루어 갑니다.

무심해야 닥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한극을 하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