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울 2019. 1. 15. 22:46

비겁

과거 아주 아주 오랜 과거에 우리가 땅에 붙어 살았을 때 아마 이때는그저 식상만이 있었을 거라고 가정 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아프면 울고 발정나면 짝찾으러 가고 이런 단순한 식상짓이 다일 거라고 보는데, 아마 식상중에서도 말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도 그리 빠른 것은 아닐 거도 같습니다.

지구상에 말이라고 하는 것을 하는 짐승은 인간밖에 없는데 인간만이 말의 식상을 가질 수 있었죠.

아마 최후의 식상이었을 겁니다. 근데 말이 글이 되는 것은 그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입니다. 식상에서 인성으로 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것이 되는 거겠죠.

발정이라고 했는데 성욕이 아닙니다. 발정되면 짝짓기를 합니다. 성교가 아니죠 그냥 짝짓는 것입니다. 발정기라서 그것대로 행동하는 것이지 이것이 성교가 된 것은 아닌데 성교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고 짝을 구해서 행위를 할때 입니다. 이건 인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인성이란 감정도 인성인데 이때의 감정은 욕구가 일어나서 이 욕구가 뭔지 알고 그 욕구를 구현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고 그 욕구를 충족하면 이후에 어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일 경우에 인성이라고 합니다. 그냥 일어나는 욕구는 식상입니다. 아무 생각없고 그냥 하고싶고 해야 하고 무조건 해야하고 또 해야 하고 이런건 식상입니다.

애가 태어나도 가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동물을 보면 아는데 그냥 새끼 키운거지 가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도 과거 오래전엔 그냥 새끼를 키우지 그 새끼가 내 것이고 내 재가 되어야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큰 자식을 계속 내 곁에 두려면 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넌 내 영역에 속해 있어라 인데, 그러면 자식이 그러죠 왜?

그러면 지금은 내 자식이니까 하면 되는데 이것이 당연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닌것입니다.

너의 영역에 내가 속해 있으면 난 너의 소유가 되는 것인데 내가 내 영역을 이루고 내 삶을 살고, 근데 이런 것은 좀 어려운 말인데 그냥 난 내 욕구대로 살 것인데 왜 니 욕구만 하냐고 하겠죠.

물론 부모라고 하는 것이지만 부모는 인성입니다. 아직 인성이 없습니다. 즉 부모가 뭐고 무엇을 하고 뭘 원하고 그것이 나 에게 무엇이고 뭘 했고 그러니 이러해야 하고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러하고 사회가 이러하니 이래야 하고 이렇게 복잡한 것들이 충족이 되어야 부모가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라는 것은 사회가 가르쳐 준거라서 사회라는 것이 없으면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난감한게 있습니다.

즉 지금 설명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거나 반대로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것의 당위성은 오랜 인간들의 문명이 지나서 한참의 시간을 경과하면서 발생되어 온 것입니다.

짝을 찾고 대개는 여러 짝을 소유하면서 재가 되어 갔을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취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 먹이를 찾고 취득하고 뭐 이랬을까요 아님 말로만으로 했을까요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남자는 좀더 직접적으로 행동을 취했겠죠.

여자는 그보다는 다른 방식을 취하는데 얼굴을 꾸미거나 옷을 잘 입거나 애 잘 낳는다거나 뭔가 그로인해 남자가 자기를 잡으러? 사냥하러? 유혹하러 오게 하기 위한 덫을 놓게 되겠죠 서로가 사냥 하는데 그 방식이 덫이냐 손힘이냐가 되겠죠. 눈짓이나 미소나 손동작이나 발동작이나 허리나 다른 것을 쓰지 직접 말로 다가오지 않는게 여자고 남자는 말이나 손으로 우선 잡아 끕니다. 그 반대로 해도 되는데 그냥 은유입니다. ㅋㅋㅋ

여자가 이렇게 좀 간접적인 것을 쓰는 이유는 아마 달의 주기를 따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 주기가 남자보다 길다보니 감정이나 생각이 좀 더 길게 보고 멀리 보고 주변을 보고 전체적인 것을 남자보다는 조금 더 생각하게 되어서 천천히 하고 은근히 하고 그러면서 남자보단 다른 것을 깊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덫이라는 것이 안배이고 설정이니 체계적인 것을 만들게 되죠. 덫이 여러개로 이어지면 체계이니까요. 남자는 이러기엔 성질이 너무 급하고 당장 욕구 해소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도 은유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려고 하는데 여러개를 가지게 되면 재가 됩니다. 나 남자 몇명 가지고 있다. 여자 몇명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발정될 때마다 돌아가면서 해소합니다.

인간은 발정기가 주기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죽기 전까지라서 이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은유입니다. 히히히

음식이든 남녀든 뭔가 여러개가 되면 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뭔가를 소유하고 뭐가를 양으로서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더 가지려고 하지요

그리고 뭔가를 하고 그 함으로서 어떤 결과가 발생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갑니다.

짝짓기를 하면 자식이 생기고 자식이 또 짝짓기하고 그 자식을 소유해서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내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충족되는 것이 있게 됩니다. 양에 대한 집착 그건 재입니다. 우선 뭔가 가진게 있다. 뭔가 내 것이 있다이고 그러면서 이게 너무 좋으니 더 가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양이 있으면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니까요 남자가 많은 여자는 남자로 인해서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여자가 많은 남자도 역시 그로인해 할 수 있는 것이 다르게 되고요.

음식이 많으면 당연히 다르고 옷도 그렇고 뭐든 많아지면 만족스럽습니다. 그래서 양적인 팽창을 추구하는 것이 나타나게 되겠죠. 하나라도 더,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하는 욕구가 있게됩니다.

그러면 싸움이 나는데 그러면 규율이 생기겠죠. 또 많으면 지배력이 있게 되고 이러면서 관이 나타납니다.

관이 나오면 말이 다른 것이 됩니다. 규율은 말이지만 말중에서도 다른 말이 됩니다. 즉 인성이 되죠.

짝짓기는 가정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이러면 가정이 관이 되겠죠. 남녀가 부모와 자식과 이런 식으로 관계설정이 되어가며 체계가 세워져서 관이되고 그 가정을 외부의 가정이 또 공동체가 인정하니 인성이 됩니다. 그리고 가족끼리도 서로에게 인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난 너의 무엇이고 넌 나의 무엇이고 그리고 언제나 그래야 한다면서 인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가정을 확대하는 것엔 한계가 있으니 재의 소유욕을 충족할 다른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땅이기도 사람이기도 남의 가정이기도 남의 공동체이기도 세상엔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널렸다고 보니까요. 남의 관도 나에겐 재가 됩니다. 인성도 재가 되고 뭐든 재로 보려는 것은 멈추지 않습니다. 관을 만든 것도 재를 위해서일 수도 있고 인성도 재를 위해서이기도 하니 뭐든 재로 환산해서 보겠죠.

암튼 이러면 이제 하나의 체계가 완성되어 그곳은 사회가 되는 것이겠죠. 사회는 관과 인성이 이루어진 것이됩니다. 사회든 공동체든 여러 사람이 생활하려고 하면 거기엔 약속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표시하고 증거 삼을 것이있어야 하고 신뢰할 것이 있어야 하고 이러면서 인성이 점차 복잡해지고 발달해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이 사회가 어느정도 완성되면 비겁이 나옵니다.

비겁은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인데 이전까진 사람이 아니라 식상이거나 재로 하거나 관이거나 인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비겁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전의 朝鮮이나 이런 곳엔 사람이 없습니다. 관을 위한 재이고 인성을 위한 식상이고 그랬지 비겁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관습이 내려와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죠.

지배할 대상으로 보면 사람이 아닙니다. 인성으로 된 것을 지킬 대상으로 보는 것, 즉 법을 지킬 대상으로 보는 것도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은 자기 정치욕구를 위해 이용하려고 하지 비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비겁으로 보면 상대도 나와 같아서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지배할 대상도 아니고 어께를 견주고 함께 살아가는 그 평등한 대상으로 보는 것인데 그러지 않으니 그들에겐 재이거나 식상으로만 보겠죠.

경제인들은 소비자로만 보고 돈을 빼앗을 대상이거나 노동을 착취할 대상이거나 역시나 이용할 대상이라서 재나 식상일 뿐입니다. 때론 소송하고 대들어서 관이 될까봐 걱정하는 정도입니다.

비겁으로 사람으로 안보는 것인데 이렇게 시대에 덜떨어진 것들이 사회에서 지도층에 있으니 이상하죠.

비겁이 나온 시대이지만 아직 비겁이 잘 안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