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강마을

도덕의지

제라울 2019. 2. 5. 12:56

칸트가 말하는 거 같은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며칠 동안 연이어 힘든 노동을 한 나머지 피로에 지쳐 일하던 중에 잠이 들어버렸다면, 그리고 깊은 잠에 뒤척이다가 남의 공작기계를 망가뜨렸다면, 그 잠에 빠진 것도 그리고 그 기계를 부순 것도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의지가 수반되지 않은 것이어서 그사람의 행위가 아니고 책임이 없거나 덜해진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행위는 이러한 것이라도 전적으로 그 노인의 행위라고 합니다.

의식적으로 또 어떤 의지나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이 아니어서 별다른 죄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물론 이런 상식적이거나 칸트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을 틀렸다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도를 닦고 강마을을 하며 마구로서 보고 좀 더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알게 된 것은 내가 의지가 없다고 해도 내 주변에서 또 무심코 별 의도 없이 나도 모르게 행한 것들도 내가 그렇게 하려는 의지라고 보게 되는 것이라고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 근거는 보일 수 없습니다. 드러나고 누구나 알 수 있을 현상으로 증거 할 수가 없어서 입니다.

조금은 보이는 논리를 넘어서 생각한다면 입니다만,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은 상식적으로 분명합니다. 내가 건드리지도 않은 것도 있고 불가항력적인 것도 있고 우연 같은 것들도 있는데 그런 것을 모두 나와 연관시키며 의도했다고 하기엔 억울한 것이 너무 많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내 장에서 일어난 것은 분명 내 장의 일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장을 어디까지 염두하는지는 분명 다를 것이고 장의 확장을 아는 것이나 다루는 것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기도 합니다.

장은 전체적인 것인데 범위가 있는 어떤 영역적인 것으로서 주라고 한 것도 있습니다. 이것이 완주가 되어가긴 하지만 아무튼 감정이나 의식이 모르고 별다른 의도 없는데도 일어나는 것에 나와 연관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원리 중에 "생각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 있지만, "생각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이 있으며, 그런 것은 생각 이전에 이미 뭔가가 일어나게 다그침이 있고 바람이 있어 오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신살이라는 것으로도 설명했는데 지금 무엇인가 생각해서 내가 남에게 피해주는 의지를 가지고 행위를 해야만 그것이 내가 남에게 준 피해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전에 언제인지도 모르는 시절에 과거 어느 시점에서 생각한 것이 또 의도한 것이 또 바란 것이 또 몰아부친 것이 생각하지도 않는 지금에 일어나는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손대지도 않았고 내가 하지도 않았고 우연이며 사고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과거에 행한 내면의 바람들의 구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이런 것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 혼자만의 과거의 다그침만이 그런 것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일조했으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방법이 위의 예처럼 피로하게 일하는 상황을 만들고 조는 것을 하며 실수를 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이 다 의도된 것이지만 의식이 한 것은 아니고 모르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 됩니다.

다른 예로는 만약에 어떤 분이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면 이생에서 그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이 의도나 의지는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혀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지만 결과는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분명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 전생도 확인하는 것이 어렵고 동기가 불순한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분명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그런데 이런 우연같은 기이한 상황으로 만들어 교묘한 일치와 신기하기까지 한 우연들의 이어짐이 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나 있으며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것을 알고 스스로의 도덕의지를 세운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도 짊어져야 하고 이런 일을 제어하는 능력도 갖추어야 하며 세상의 이런 비의적인 아무도 모르는 흐름들을 보는 것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볼 수 있는 책임의 범위의 넓이가 그사람의 넓이가 됩니다.


그런데 다른 경우도 있는데,

내가 나쁜 의도나 그다지 좋은 의도가 아닌 행위를 했는데 결과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좋기도 한 경우도 있고 그런다면 의도와 다르게 좋게 된다면 이건 어떨까?

그건 결과를 보는 것인데 의도가 안 좋더라도 결과가 좋게 나타나면 그사람의 의지의 본심은 좋은 것이었다고 하는데 일시적으로 어떤 정황이 그러해서 나쁜 것을 의도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건 사람의 본심이나 본지를 따지는 것인데 이거 역시 간단히 관찰 되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깊이의 성찰을 하는 사람도 없어서 증거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런 잘못된 의도를 자주 하면서 빈번해지면 이것이 차차 그사람의 의지가 되어가니 나중에 결과 역시 나쁘게 되겠죠. 의도와 의지를 구분하는 것인데 의도는 시시때때로 의식처럼 변하고 다르게 할 수 있으며 변덕이 있는 것이고 당장의 것에 판단하는 것입니다. 의지는 그런 의식이 오래 누적되어 나타난 그사람의 정체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이렇게 나쁜 의도를 했는데 결과가 좋으니 이사람은 좋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간단히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도를 가지지만 결과를 맘대로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크면 클 수록 즉 결과에 우연적인 상황이 강할수록 의지가 그런데로 나쁘지 않을 거 같다는 것이지 무조건 단정짓는 것은 물론 도를 논하는 곳에선 말하지 않습니다. 이건 처음 말한 노인의 예도 그렇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모두가 그렇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공작기계를 노인을 이용해 망가트리게 하며 손해를 전가하고 착취하려는 사업주의 의지도 있어서 이런건 차라리 그냥 칸트의 말이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의지가 있는지는 오래 두고보면서 살펴야 하는 것인데 그건 한 두 가지로 판단할게 아니고 그런 것에 드러나지 않으며 하나의 경향성으로서 나타나는 삶의 방향이나 행동의 방향으로서 구분되는 미세한 차이입니다. 이걸 구분하기 위해선 인생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 있어야 하겠죠. 그사람이 의지하고 바라는 인생의 방향성이 어느 것이냐는 그런 것입니다.

오래 형성된 것은 오래 보아야 나타나거나 알게 되며 시간을 두고 판단하고 결과적으로 행하는 그 실천으로 보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나쁜짓하는 것으로 의지를 보지 않으며 반대로 의식적으로 좋은 행위하는 것으로도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래 진행된 그리고 나타나는 결과로서 보는 것입니다. 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는 것이죠.

그리고 안 좋은 의도였는데 좋게 결과가 나타나서 난 역시 선택된 사람이고 뭘 해도 좋은 사람이라고 자만한다면 아마 의지는 점점 다르게 변형될 것입니다. 의도한 것과 나타난 결과를 보면서 자기의 의지가 뭔지 알아야 하는 성찰이 있는 것이고 과거의 의지의 지향을 인지하는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발전시키고 할지를 판단하는 지표가 됩니다.

이건 의지가 보여야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주장하는 의지가 아니라 나타나는 의지로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