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통마안-해평편

대화라는데,

제라울 2019. 4. 8. 18:01

대화하는데,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죠. 그래요 네, 네, 네,네......

뭐든 맞다고 수긍하고 긍정해주는 것이 상대가 좋아하고 그래야 하는 것이며 거스르거나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다른 관점을 말하면 대들거나 따진다고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달지 않고 순종하려 했었던 시대가 있기도 하고 지금도 어떤 곳에선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자기가 그래야 한다고 보는 사람은 이것을 버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게 단적으로 말하면 과거 성현들의 말에 토달면 안되어서 성현보다 나은 놈이 안나온 것이기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오지 않게 하려고 이런 강압성을 드러냈는지도 모르고요 토 달아야 더 나은 학문을 창출한다는 것을 몰랐다면 성현이 무식한거고 알면서 그랬다면 성현이라는 것의 속알머리가 고약한 것이라 성현이 아니고 사기꾼인게 되죠.

이런 과거가 있었던 것을 보면 그당시엔 사람이 자각하고 스스로 서는 것을 하게 하려는 세상은 아니었던 것인데 그런 역사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는 것이어야 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인데,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라고 하는 그 가치기준이 다르면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면서 살게도 됩니다. 이제와서 과거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뭐한 것이고 그보다 앞으로 살아갈 것을 위해서 따지고 분별하는 것인데 이런 것이 뭐하는 것인지 모르면 그역시 어려움이 많으니 이런 아직 모르는분들이 더욱 자각해서 뭘 해야 할 것인지를 알 날이 어서 오는 것이 좋은데 억지로는 안되고 서둘려서도 안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서둘러서 엄한 피해가 생기는 것이 더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또는 누군가 이런 의도로 비판하면 상대는 말이 달라지게 됩니다. 무조건 긍정하는 말은 안하지만 그렇다고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되어 갑니다. 말은 위의 말들을 안 쓰는데 그렇다고 내용이 아니진 않아서 긍정이 됩니다. 단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보는 것이라서 그 의미는 상대가 말하는 의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대답한다고 대답이고 대답 안한다고 안하는 것도 아닌 것인데 이렇게 말이나 단어를 보면서 단닪하는 것을 넘어서 말과 단어 이면을 보면서 의도파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말하는 사람은 말을 돌려서 상대가 모를 것이라는 또는 교묘하게 희석시켜서 말하지만 그건 말하는 자의 한계입니다.

듣는 사람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게 됩니다.

다른 얘기지만 대개 대화하다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상대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몰라서 이럴 것이고 몰라서 이런 말하고 있다고 그런 착각을 합니다. 지식도 그러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을 그는 모를 것이니 무식하다 멀 모르는 것이다. 그런 비판을 자주 합니다. 난 아는데 상대는 모른다는 전제를 하죠. 아는지 모르는지 물어보고 확인하려는 것을 안합니다. 상대도 알고 있으며 알면서 그럴 거라고 인정할 마음의 준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무시하게 되고 비난하고 상대를 속이거나 억압하거나 모르겠지하면서 지례짐작하며 대화하게 됩니다.

상대가 뭘 아는지 그것을 알려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입니다. 뭘 알고 뭘 모르는지 그런 확인절차가 있다는, 그런 대화가 있다는 그것을 모릅니다.

대화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도를 닦고 실천을 해가는데 시작이 대화부터가 됩니다. 몸짓도 대화라고 하면서 설명하면 더 어려운데 우선 말로 하는 것을 알면 그걸 확장하면 될거 같으니 말부터 설명합니다.

대화하는 것에서 도의 실천이 시작한다고 했으니 그 말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도를 이해했고 실천하며 자기의 심성을 조합하고 있으며 기르고 다룰 수 있는지 얼마나 자기 심층을 들여다 볼 수 있는지 그게 대화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대화가 엉성한데 행동할 수 없습니다. 사고가 어딘가 엉성하면 말이 엉성함이 드러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인생이 일관성을 일어버려서 내가 산건지 그렇게 살게 되버린건지 어쩌다 나고 살고 죽게 되는지 자기삶의 의미를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것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래서 생각에서 시작하는 도의 실천에서 대화로 가며 행동으로 가고 인생으로 완성됩니다.

물론 아는 사람은 알 거라고 보는데, 내가 대화에 생각보다 많은 복선을 깔고 시공적인 내다봄이 좀 다른게 있으며 항상 그리고 언제나 일깨움이 아닌 말은 안합니다. 일상에서 말하지 않거나, 말하면 의도가 있는거라서 대화부터 도의 실천이 되어가서 그렇습니다. 그전에 생각부터이지만 이건 좀 다릅니다.

생각은 다양한 모색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양한 모색은 저 위에서 저 아래까지 무한한 층차에서 오르고 내리며 따져보게 됩니다. 이러면 그럴듯한데 천박하게 말하면 비윤리에서 윤리, 비도덕에서 도덕, 가능에서 불가능, 허용함에서 불허함까지, 내 입장에서 남 입장, 저곳에서 이곳, 주에서 객, 음에서 양 이런 말들을 이해하면 알아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이걸 혼돈이라고 하든가 무극이라고 하든가 하는데 이러함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이 어디를 갈지 한 순간의 기미가 영원함의 결정이 되어감을 보는 것이 태극이라고 한 것인데 생략이 많아서 오해가 많긴 했던 것입니다.

이것도 이해하기 어렵다면 성경에서 생각으로 한 것도 간음이라고 한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꼭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청소년시기에 또 살아오면서 성적인 상상을 안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고 안했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을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간음이 안 되는지 생각이 뭐고 생각이 어떤 힘이 있고생각이 어떻게 작용하며 그런 것을 가르쳐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하나의 혼돈으로서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이 간음이 되는 그것이 됩니다.

심층이라고 했으니 더 설명하면 의식으로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서 전의식과 그 밑에 여러 의식들이 다양한 깊이와 응어리와 가치로서 의미로서 반응이나 억압이나 욕구로서 있는데 의식으로 간음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밑에 의식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거나 너무 희미해서 의식이 감지 하지 못하는 깊이에서도 간음이 일어납니다.

무의식이라고 하면 아는데 너무 무의식을 쉽게 생각하는 거 같아서 안쓰려고 위와 같이 말했습니다. 의식에서 두 세 단계만 내려가도 의식은 전혀 감각하지 못하는데 그런 상태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기도 하지만 이미 그상태에서도 간음이나 그러한 불법이나 비윤리나 상상하지 못할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생각으로 한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잘못 되게 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생각이 혼돈일뿐 외부와는 다른 것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대개는 생각도 간음입니다.

그렇게 만든 그리고 훈련한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동양에선 군자만이 사랑할 수 잇고 미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던 말을 계속하면 그래서 긍정하는 말을 무조건 하면 안된다는 것이냐 무조건 부정하라는 것이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건 너무 상상력이 없는 것인데 대화는 일상의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변주죠 음악을 하면서 서로 주고 받는 연주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생각을 주고 받는 것이어서 긍정할 수도 안할 수도 있고 다만 뭐가 주된 것이냐를 보는 것입니다. 이거다 저거다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주로 많다 저런 것이 주로 많다라서 주로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지 그저 찬성만 하는지 그런 것을 봅니다. 자기 생각을 말하려면 그만큼 생각을 해야 하고 그만큼 자기 계발을 하고 개발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린 나이들고 늙어갑니다. 다그치고 다그치면서 생각을 몰아세워도 점점 고리타분해지고 나태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머리에서 생각의 유연성이 멈추고 있으며 수구적인 방어를 하고 있는지 그전에 하던 사고에서 나아가고 있는지 뒤로 가고 있는지 고집하고 있는지 창의적이고 있는지 그런 것은 힘겨운 사투라고 할 정도 입니다. 생각이 변하면 대화가 다르고 행동으로 나가며 인생이 된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변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고-예 알겠습니다. 라는 구조로 하지말고 다양한 방법으로 말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말하고 서로의 의견의 차이를 말하고 다름을 즐기며 같음을 찾아내고 여러 방법으로 대화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말에 그냥 찬성하면 난 명령한 것처럼도 됩니다. 그러면 이건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어색해진 것입니다. 명령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렇다고 강요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거라고 주장하자는 것이 어닌데 이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대화는 서로간의 관계구조를 설정하게 됩니다. 어떤 구조에서 대화하느냐이고 대화가 어떤 구조를 만들고 있느냐가 됩니다.

원탁은 아서가 만든 탁자가 아니라 동방에서 부터 하던 협의의 전통이고 서로간에 대화하고 협의를 이끌어내려는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탁인데 그중에 한명이 이러하다고 말하고 그말에 또 누군가가 "예" 라고 해버리면 원탁이 아니라 주종관계가 됩니다. 그들끼리 짠 것이거나 힘의 논리가 되어 버리고 있거나 이해관계가 있거나 그렇게도 됩니다. 그러니 대화는 어떻게 해가는냐가 중요하고 어떤 구조에서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철학이 대화라고 했습니다. 학문적인 논의에서는 다들 자기의 학문으로서 상대를 비판하고 여러 증거와 맥락을 바꾸면서 개념을 만들고 가설을 정하고 증명해가며 논리를 따져가며 논리 조차도 만들고 설득하고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왜 대화에서는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일상의 대화에서도 자기의 의견을 가지는 것이고 그 의견에 대한 자기 주장을 펼치며 합리적인 논의를 이끌어가면서 정당성을 구하고 정합적인 의미체계를 말하는게 왜 안되겠습니까 그런 대화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존재이고 인정받아야하고 소중해서 입니다.

그러니 말에도 자기의 온존재를 다 들어낼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학문을 학원에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술 마시며 커피 마시며 공원에서 길거리에서 인터넷에서 모든 곳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어딜가도 누구를 만나도 대화를 합니다. 대화를 하니 대화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나와 남을 존중하는 것이 되어가는 것이 도라고 봅니다.


자천을 글로 배우는 떨떠름함이 있습니다.

글로선 이해하고 글로서 아는 듯이 말할 수 있고 글을 인용하거나 글을 들이대면서 글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는 다릅니다. 대화는 말하는 그 시작부터 이미 그 수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은 이미 실천인데 어떻게 말하는지 뭘 말하는지 따져야 합니다. 말도 귀로 안듣고 감정으로 들어서 말을 듣는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이미지를 듣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그래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를 하면서 나누고 분류하며 비판하고 들어보고 설명해보고 설명을 들어보고 의견을 내보고 따져보고 다른 의견을 만들어보고 억지로라도 비판이나 다른 관점을 찾아보고 생각해보고 설득되어보고 설득에 저항해보고 이런 것을 해야합니다. 아니면 선입견으로 듣고 고정관념으로 들어서 들었지만 들은게 아닌 어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대화는 일회성이 아닙니다. 대화하고 말하면 그것을 실행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말따로 행동따로가 되면 그 대화는 신뢰를 잃어버립니다. 신뢰를 잃어버리면 그사람은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것조타 구분하지 못하는 엉성함은 곤란합니다. 상대가 실천과 다른 말을 하는데도 용납한다면 그건 상대를 욕하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을 한 것이기도 합니다. 말 해줄 건 하고 비판할 건 해야 상대가 자기 검열을 할 것입니다. 남이 나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날 제어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무엇을 오해하는지 무엇을 곡해하고 있는지 오류가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안 보이는데 상대는 쉽게 보게 되며 난 한참이 걸리는 걸 상대는 바로 압니다. 그리고 서로간의 관계에서 내 의도와 다르게 변형되고 말과 다르게 이어지며 전해지고 그런 것에서 현실과 생각과의 차이도 있는 것이어서 생각만의 망상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자세도 있어야 해서 누가 날 비판하면 열낼게 아니라 비판도 스스럼없이 하고 듣는 분위기가 있어야 하고 그런 것이 별난게 아닌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판도 강도 조절이 있어야 하고 요령이고 방법이라서 분위기를 보고 해야하며 상대의 사정을 봐가면서 해야 합니다. 어제와 달라지고 있는데 어제의 것으로 비판하면 실수가 됩니다.

비판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비판을 잘하는 것은 다릅니다. 언제나 잘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말도 잘해야 하고 비판도 잘해야 하고 듣기도 잘 들어야 하고 그렇습니다.


대화하기 위해선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뭔가를 말할 경우 어떤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듣는 사람이 그 개념을 모르거나 생소해 하거나 전혀 관심없거나 그러면 말하는 사람은 김빠집니다. 이해해주려는 자세도 없고 납득도 못한다면 참담하게 됩니다. 우린 좋은 거든 나쁜거든 대화하면서 흥분하고 감정풀고 하소연하며 응어리를 풀고 하는 것인데 그런 감정교류를 하기위해선 들어주는 자세도 중요하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하기도 한데 들을 수 있으려면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공감대가 형성되려면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즉 나도 경험한 것을 남이 말하면 알아 듣습니다. 나도 해봤고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전혀 모르는 것을 상대가 말하면 못 알아 듣습니다. 그러면 심히 낙답합니다.

그중에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에 누구는 중요하다고 보는데 누구는 그게 왜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 중요한지 모르면 그것에 대한 개념이 없게 된 것인데 그러면 서로간의 대화는 안됩니다.

그랬을 경우 왜 난 그 개념이 있고 아니면 왜 그 개념이 없는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듣는 경우 왜 난 그것에 문제의식이 없지 부족하지? 그게 왜 그럴까요?

어려운걸 멀하면 생각의 아페이론이라는 것인데 얼만나 궁극적인 막다른 곳까지 사고 해봤냐가 시작입니다.

따지고 따지고 따져서 그 무한한 이어짐의 끝으로 가야 합니다. 사고의 정밀성은 얼마나 훈련하고 얼마나 밀고 가보고 얼마나 쥐어짜 봤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해본 사람끼리의 개념이해가 있게 됩니다.

이런 건 너무 학구적이라고 하면 정치적인 것을 말하면 시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민이 뭐고 이게 왜 중요한지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이고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어느 것보다 중요하느냐 입니다.

내가 좀 손해보고 좀 뒤로 밀쳐져도 시민의식의 발현을 위해 물러나거나 손해보거나 내 것을 주거나 할 수 있고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느냐도 있습니다. 시민이라는 것엔 내 주변이나 이웃을 조금 더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해못해서 촛불시위에 차이나의 자금이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내가 손해보는 것을 각오하고 내가 불이익 되는 것을 각오하고 하는 것을 돈보고 하거나 돈이 있어서 하거나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어떤 개념을 아느냐가 판단의 길을 만듭니다.

누구의 말로는 과거 대통령이 시민이라는 말을 이해못하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대구시민? 광주시민? 이러면서 시민을 도시의 시민으로 이해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개념이 없이는 대화가 안되며 대화가 안되면 그 행동에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되는지 단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해도 감정에 대한 개념이 있고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감정의 준비도 있어야 합니다.

감정이 알면 생기고 모르면 무시하게 되는 것이기도 해서 무엇을 아느냐로 무엇을 허용하느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감정도 안일어나거나 잘못 일어나거나 오해가 쌓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어선 안됩니다. 과거에 그러했고 과거엔 이거라고 해도 지금은 달라지고 있으며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어서 변한 것이 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알아가면서 대화해야 합니다. 상대가 감정이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세밀해지고 있는지 알아가야 대화가 됩니다.

감정도 사람마다 숫자가 다르고 느끼는 강도가 다르며 느끼는 동기도 다르며 느끼는 것을 처리하는 것도 다르고 자기 감정을 이해하는 것도 다릅니다. 남이 아는 그 사람의 감정과 그사람이 아는 그사람의 감정도 다릅니다.

너무 복잡한데 간단히 상대에 더 관심가지고 상대의 지금의 상태를 보려고 해야 하며 더욱 내가 가진 선입견을 경계하면서 상대를 대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