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층
해층은 감층과 감지층 사이인데 감층이 모두 감지층으로 번역되지 않아서 이런 틈이 생긴다.
이 해층이 작을지 클지 그건 정하기 어렵다.
그림으론 작아 보이지만 그림이라서 그렇고 크기보다 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즉 해층이 있다.
이게 왜 생기느냐하면,
태어나기 전의 감층이 나름으로 의도해서 어떤 가정에서, 어떤 시대에, 어떤 사회에, 어떤 국가에 이런 환경들에 태어나지만 이런 것을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곳으로 완벽하게 설정하며서 나오기는 어렵다.
그건 감층도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랑층의 역사가 다르고 그러니 그 질적인 차이가 난다는 것도 있다.
거기에 시작부터 경쟁이 있고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거라서도 그렇다. 또 운인데 크기가 다른 다양한 운층들이 있어서 그런 것에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대입하고 적응할지도 있다. 대개는 이런 외부 운을 관심가지지 않는 정도의 크기들의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이런 외부의 운을 관심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 거대한 다양한 운들 중에 하나의 흐름인데 말이다.
그중에 질적인 감층들끼리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우선 큰 원인이 있다. 감층들끼리 사람들끼리 서로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또는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나오는데 그런 복잡하고 중층들이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한 것들을 경쟁하듯 돕듯 추구하게 된다. 나만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원한다. 나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해결하는 방식이 있으면서 원하느냐 아니면 원하기만 하느냐 같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 겨우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정도가 있고 해결법도 가진 감층들도 있다. 또 해결법이 폭력이나 남을 희생시키려는 감층들도(사람) 있고 사랑이나 포용이나 협력이나 대의를 위해서거나 그런 해결법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이런 서로간의 관계, 영향 그로인한 저항이나 원하는대로 안되고 되고 다르게되고 조금 되고 흡족하지 못하고 또는 너무 지나치고 흡족하지만 다른 아픔도 있고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태어나겠다는 감응을 하자마나 대강의 인생경로는 정해지게 된다.
같은 것을 추구하는데 공룡이 있는 시대에 태어난거나 조선시대에 난거나 지금 난거나 일본에 난거나 미국에 난거나 분명 다르다. 나와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고 "왜 나를 낳고 저자를 낳아서" 라는 하소연도 있을 수 있다. 저자를 낳아서 내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것이긴 하다.
태어나겠다고 감응한 순간 이미 그 환경은 있는 것이고 그 환경으로인한 성패는 감층의 능력 여하에 따라 이미 정해지긴 한다. 완벽히는 아니다. 대강이다.
그러면서 태어나면 감층은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부모, 형제, 가정의 경제력, 공부능력, 사회진입, 직장생활, 경제 수입 방법, 결혼, 자식 살면서 외부에서 오는 그많은 것들과 그로인해 태어나기 전에서 원하거나 하려했던 것이 변할 수도 있고 유지할 수도 있는데 변하든 유지하든 그건 이미 애초의 감층의 것과는 달라진 것이 된다. 그만큼 이 현실은 절대적이다. 뭘 원했든 현실의 방법으로여야 하는데 분명 타협이 있고 지키려는 것이 있을 것인데 타협하든 지키든 이미 변한 건 같다.
지키려고 애초의 사는 목적을 지키려고 무엇을 했고 얼마나 저항했고 견디고 했는가가 또다른 랑층의 형성이 되고 그것이 다음의 감층으로 베껴지면서 다음 생의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힘겹게 이루거나 지키거나가 아니어도 수월하게 행복하게 이루어져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정해지는 랑층은 형성된다.
그래서 해층이 형성된다. 감층은 현실에서 왜곡되며 그 왜곡된 차이가 해층이고 그로인해 해층은 한이 될 수도 있고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는데 정해진 원칙은 감층이 태어나 살면서 그로인해 왜곡되고 변형되어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무엇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음 생을 살려는 원인이 되기 싶다. 이러면 이것을 해소하면 다음 생으로의 윤회를 다르게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닦으면 윤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 돌게 된다. 이것을 해결한 사람은 즉 해층을 알고 다루는 사람은 윤회가 다르게 된다.
대개는 부정적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이 다음 윤회를 하게 되는 강한 원동력이 되는 이유가 된다.
이번엔 이번에 하면서 집요하게 물고들어지며 태어날 수도 있다.
이러면 이걸 해소하기 전엔 조층은 쉽지 않게 된다. 나아가기보다 자기 파멸이 되기 쉽다.
그러니 해층을 다루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최소한 다루는 것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건 추상과 현실의 왜곡을 보는데 유용한 것이라서 이건 비법이기도 한 그런 심층이다.
즉 나같은 경우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기를 가는 것은, 이 마구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며 하는데 그것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때 이 해층을 전제해서 보게 된다. 즉 번역되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하는데 그 왜곡을 염두하면서 현실의 나타남을 본다. 그래서 해층을 잘 다루어야 사회현상이 보인다. 내가 한거, 내가 해야 할 거, 왜곡은 누가 아니면 왜? 무엇이? 어떤 이유로? 다른 것과 어떤게 조합되었고 왜 그런식으로 진행되고 그런 것이 보이게 된다. 왜곡의 정도파악이나 원인파악이 안되면 환상에 빠지거나 절망하거나 그렇게 된다.
근데 해층을 알려면 감층과 감지층을 모두 보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건 웅층에서 나온다. 즉 웅층의 마하가 있느냐이다.
웅층의 마하가 있어서 이것을 비교하면서 다루는 능력을 가지면 웅지층이라고 다른 심층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혁층이 형성되면 마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런 웅층에 대한 이해가 철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층을 이해할 수가 없고 그러면 이후에 혁층에 가도 마구를 하는 것이 어설프게 된다. 웅지층인데 마구한다고 곡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전에 감층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는데 이거부터가 벽이 되어 알 수가 없다.
감층을 모르니 감지층을 모른다. 감지층은 몰라도 작용하는 그 당사자인데 인지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인 것과 내가 나인 것은 다르듯이 감층을 인지해야 감지층을 인지하게 되는데 어렵다 참 어렵다.
이걸 인지해가면서 감층도 아니고 감지층도 아닌 웅층이 되어가는 것인데 이건 서서히 일어난다. 하루아침에 웅층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완성되는 그런 것도 아니다. 웅층이 있는 것이지 웅층뿐이다라고는 못한다. 서서히 점진적으로 감층과 감지층이 웅층으로 변해간다. 어느 이상 변하면 도약하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하고 수월하게 넘어가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거기가 웅층이 완성된 건 아니다. 웅층이 어디서 어디까지라는 크기가 있는게 아니라서 그렇다. 웅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웅층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서서히 변해가는 것에서 웅지층이 형성된다. 이런 웅층과 웅지층이 만들어지는 것은 역시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지도 않고 그 과정에서 다른 것으로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간단히 뭔가를 깨우쳤다면 웅층이 된 것인데 그 깨우침으로 자기를 변형시키는 것은 다르다. 이다름이 웅지층을 만든다. 그래서 깨우친 것과 깨우친데로 사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걸 알아야 같게 할 수 있는 것이고 합일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지 합일이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걸 모르면 결국 웅지층으로 된 것이라서 온전한 공부성취가 안되게도 된다.
또 웅지층은 다른 의미가 있는데 도가 이루어지고 바로 세상과 격리되어 오로지 자기 도안에서만 있다면 상관없지만 살아야 하고 덕행을 해가야 하고 이것이 진짜 도인 것이라서 이런 과정이 있고 이런 과정만 있는데 그것이 웅지층이기도 하다. 그래서 웅지층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도를 번역해가는 과정과 도를 행해가는 과정이다. 때론 이 둘을 하나로 해서 같이 하기도 한다. 이건 천지참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 도라고 하던 것이 내 도가 아니라 천지의 도라서 내가 아닌 모두가 가는 것에 따를 수 있는 순응성이 있어서이다.
사실 이런 심층을 말하기는 하고 구조적으로 설정하기도 하지만 이건 설명하기 편하게 구분한 것이다.
정말 이런 심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냐고 하면 "설마 그럴리가" 이다. 말하기 위한 정리가 첫째이다.
그리고 흐름이다. 경향이라고도 한다.
그런 맥락으로 행동한다가 된다.
그런식으로 해왔고 하고 싶어한다.
그런 것을 추구하고 멈추고 싶지 않다.
더 이러한 감정을 원한다.
더 이런 것을 소유하고 싶다.
더 이런 결과를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맞다고 본다.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
심층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을 저렇게 설명하니 저리 보인다.
그러니 이런 심층들을 보지 말고 순간의 해야 하는 것을 보면 이런 심층은 그다지 의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