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 107

윤회? ㅠㅠ

부처는 윤회를 말하지 않는데 불교는 말한다.뭐?부처는 상대가 윤회를 말하면서 가르치면 알아들을 거 같으면 말하기도 하는데 불교는 그냥 말한다. '영혼이 있어요?'"있겠냐 쎄꺄"'그럼 영혼이 없단 말이에요?'"없을 거 같냐 임뫄"'뭐야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우주가 있죠? 전 천문학자라서 우주를 공부하고 잘 알아요'"그거로 돈이 되냐 명예가 되냐"'전공이라 이거로 경제활동이나 명예가 되죠'"그럼 넌 우주를 보는 게 아니라 돈과 명예를 보는 거야"'아뇨 전 우주가 좋아요 어려서부터 동경하고 알고 싶어 해서 이걸 선택한 거예요'"지식욕이고 욕구야 그게 널 만족시켜주니까 우주는 니 욕구충족을 위한 2차적인 것이고"'그렇게 삐딱하게만 보나요?'"내가 삐딱한 거냐 니가 욕구를 포장하는 거지"  이 설명이 짧냐..

위에 가나다로 쓴 것이 자천(수도)입니다. 여기에 구태스러운 수련법이나 자천법이라고 하는 것들은 제외 했습니다. 도를 배우는 것이 뭔지 이해하면 그것이 도를 배우는 방법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니까요 위에 설명한 것을 보고 그렇게 되기 위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그걸 생각하고 하면 됩니다. 그러함에도 단전호흡해야 하나요? 하고 물으면 도움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 도움되는지 어떻게 아나요? 하면 해봐요 호수(주문)하면 되나요? 하면 도움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 도움되는지 어떻게 아나요? 하면 해봐요 자기가 해보고 또 자기가 판단하고 하면 되는 것이지 누군 좋다더라 하면서 그걸 따라하면 이미 실격입니다. 판단하는 것이니 그대가 판단하고 그것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누구나 해당하는 어떤 좋은 방법 같은 것은..

도를 닦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좀 설명하려고 한거죠 이유도 모르고 이걸 할 수 없고 또 이걸 꼭 해야 하는 것이 이래서라고 해야하니 좀더 그럴 듯한 설명이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자꾸 설명하게 되네요 우린 판단해야 합니다.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의 존재로서 너무도 중요한 행동이 됩니다.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자는 스스로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판단하고 그 판단에 책임지고 그러면서 성찰하고 다시 판단하고 행동하며 성찰해가면서 내가 한 결정으로인해 벌어지는 상황이나 사건이나 여파를 봐야 합니다. 이건 우리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홀로 있는 거라면 그건 판단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나와 남을 구분지어 다름과 차이를 만들고 책임을 분명히 할 수..

우리 사람들이나 사물이나 각각의 개체들의 생사와 활동들은 불규칙적인 움직임이나 요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자요동이나 분자운동 같을 라나요 무규정적이고 무의미하며 딱히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고 규칙성도 없는 그냥 요동치는 것이 됩니다. 내 삶이라는 것도 나에겐 중요할진 몰라도 전체나 외부에서나 멀리에서나 객관적으로나 그다지 의미를 모르겠고 가치도 없거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거나 그럴겁니다. 가족에게나 누군가에겐 조금은 아니면 많이 중요하다해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날 위한 중요성인건지 그들위한 중요성인지 그 감정들이 습관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딱히 알 수도 없고요 크게 보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움직임이며 그러다보니 우린 더 지금의 자신에게 더 집착할지도 모르겠씁니다..

우린 다들 어떤 조직에 구성원입니다. 국가나 지구행성이나 가족이나 종교나 회사나 각종 단체나 구역이든 아니면 밥먹으로 식당가면 그 식당의 구성원식으로든 카페에선 그 카페의 구성원이 되는 식으로 변하는 구성원이나 변하지 않는 식이거나 그 중간의 다양한 형태로나 우린 나와 내가 소속되거나 구성원으로 되는 어떤 상황으로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이러한 나이외의 다른 무언가가 없으면 시작부터 난감한 것이 되는데 그중에 이러한 내가 소속된 조직이라는 것이 꽤나 의미가 큽니다. 또 이 조직은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있기도 하는데 인위적이야 우리 인간이 살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만든 것이고 즉 사회적인 것들이죠 사회에서 행동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진 법이나 규율이나 산업이나 생활방식이..

중생 구제

중생구제라고 어릴 때부터 들어보던 것인데 아직도 쓰고 있겠다. 이게 언제까지 쓰일까? 중생이라는 말의 뜻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여기선 구제할 대상을 말하는 듯한데 이런 식으로 보면 이상한 말 같기도 하다. 누가 무엇을 구제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있을 거 같다. 일단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구제할 수 있는 뭔가를 가진 것이 되는데 그게 뭔고? 이러면 또 구제가 뭘까 하는 것도 있는데 구제가 뭐지? 간단하게는 도와준다는 것인데 무언가를 도와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정말 도와야 하는 대상인가 무엇이 문제가 있어서 돕는 것인가 부족한 게 있어서 돕는 것인가 어려움이 있어서 돕는 것인가 도움을 청해서 돕는 것인가 이런 말을 해도 누구나 알듯이 그냥 깨달은 사람이나 부처나 보살이나 그런..

무심이던가

문득 책을 읽고 싶은데 사후에 가서라도 책을 읽어서 이 욕망을 채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지금 눈 때문에 독서를 잘할 수 없다 보니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는 책들이 많고 또 지금도 책들이 출판되는데 보고 싶다. 읽고 싶다. 아~ 지적 탐구욕이 자꾸자꾸 용솟음친다. 하다가 저기 가선 사회에 딱히 해야 하는 일이 없고 삶이 없으니 욕망이 없게 되고 성향도 다르게 되는데 지금 같은 독서욕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럼 이런 욕구가 아닌 게 되니 별 소용없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가 된다. 내가 어떤 지적 탐구를 하고 싶은 것은 그것으로 인해 뭔가 하고 그 함으로써 또 의도하는 것이 있어서 인데 사후엔 그것이 다르게 되니 지금 알고 싶은 방향이나 장르의 지식을 그다지 원하지도 않게 되고 관심이 아니게 되..

난 말이 아녀!!!

말이 아니고 싶지 그런데 자꾸 말이 되는 듯한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가 장기 두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일상은 그냥 말인 거 같단 말이죠 일상의 모든 것이 날 말로 취급하지 장기두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홀로 난 크게 보고 멀리 보면서 큰그림을 그리면서 뭘 해야 할지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로 인해 행할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그냥 일상에서 하는 건 그거와 상관없는 사소한 것들이니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뭘하지? 뭘 하겠지 그리고 오늘 뭘하지? 하던가 하겠지 저녁에 뭐하지? 뭘 또 해 쉬어야지 어디서 내가 멀리보면서 행하는 사람인거지? 응 그거 아냐~~ 이게 일상이다. 결국 난 말이었구나 날 말로 다루는 그건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뒤??? 훔 위??? 훔 혹시 말..

하늘 같은

앞에서 신 같은 이라고 말하니 처음엔 절대신이 아닌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면 "뭐 같은"식으로 욕인가 비아냥인가 하는 의미로도 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신이라고 하면서 말하고자 한건 외부에서 오는 내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그 무엇들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회비판이나 심리학적인 것으로 말하면 더 수월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인데 내가 그쪽 사람이 아니니 남의 영역을 넘나들긴 좀 그래서 그냥 수도하는 곳에서 할만한 말을 주로 하게 됩니다. 천이라고 하면서 또 설명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 싶어서 글을 쓰는데 천이라고 하기도 하늘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하늘이라는 단어엔 내가 지금부터 설명하려는 의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말이긴 한데 우리가 우리말로 철학이나 도학을 하지 않..

신 같은

세상엔 유신론이라든가 무신론이라든가 하는 것이 있다. 신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가 의문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건 질문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신이 있든 없든 그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데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거나 우리가 신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꼭 그래야 하는 것일까요? 신이야 있든가 없든가 그것보다 우리가 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 그것이 더 중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을 신이 그렇게 보기를 원한다. 신의 뜻이 이러하다고 말하는 것은 수사법일 것이고 정말 신이 그러길 바란다고 받아들인다면 이건 좀 사고를 등한시한 것도 같고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볼지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지 외부의 무엇인가가 정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