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유신론이라든가 무신론이라든가 하는 것이 있다.
신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가 의문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건 질문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신이 있든 없든 그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데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거나 우리가 신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꼭 그래야 하는 것일까요?
신이야 있든가 없든가 그것보다 우리가 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 그것이 더 중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을 신이 그렇게 보기를 원한다. 신의 뜻이 이러하다고 말하는 것은 수사법일 것이고 정말 신이 그러길 바란다고 받아들인다면 이건 좀 사고를 등한시한 것도 같고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볼지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지 외부의 무엇인가가 정할 것은 아닌 것이니까요
물론 외부를 절대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을 것이라서 영향을 받을 거지만 그것이 판단에 영향을 주지만 그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니 우리가 어떤 것이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다는 그것이 신의 요구나 강요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이 직접 말하거나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고(이걸 바라거나 경험했다거나 하는 것 은 사고의 협소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 세상의 이치가 연구되면서 알아지게 되는 법칙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의 의미일 것도 같습니다.
이러면 이법신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미라기보다 내가 판단할 수 있다고 하니 내가 신을 어떻게 보아도 되는 거 같으니 신은 내가 신을 어떻게 보든 어떻게 대하든 전혀 무관심한 것이 되니 이런 것이 넓은 의미로 신의 의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이런 거로 신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는 것이고 즉 내가 신을 어떻게 볼지를 말하는 것이지 신의 존재 유무를 논할게 아닌 것이겠죠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으니 해도 되는 것이고 해도 되니 하는 것이고 하게 되어 있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겠죠 신이 있다면 신의 섭리라고 해도 되겠죠
즉 내가 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걸리거나 제제되는 것이 없다는 건 그래도 된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신을 개세끼라고 하든 좇같다고 하든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긴다고 하는 인간들이 있을 뿐이죠 그래서 신이 있고 없고를 말하기보다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위에 눌려서는 안 됩니다. 그건 인간들의 지위나 권력도 그러하고 신도 당연한 것이죠 인간이 판단하는 것에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무지함이 됩니다. 신 따위도 내가 뭘 생각하든 방해하지 않는데 인간이나 권력이나 체제나 뭐나 논의할 것도 아닌 거죠
신이라고 하면 서구인들은 절대자나 창조주를 말하는 것인데 성경을 기반으로 신관을 형성하는 자들은 그렇게 되죠
동양은 과거부터 꼭 그렇게 절대적인 신을 의미하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다신이나 만신이다 범신이나 범재신이거나 이법신이거나 뭐나 다양한 신관이 있을 수 있는 것인데 그래서 신 같은 것들입니다. 신 같은 것이 워낙에 많아서이고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죠 우리가 판단하는 것에 기대고 의지하며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들인데 요즘은 권력, 돈, 정보나 인터넷이나 유행이나 그런 것도 신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무튼 동양에선 신이 있다 없다는 논의의 주제로 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엔 신이 있다고 말하면 그로 인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 되는데 대개는 이런 지식인이 권력자라서 신이 없다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가 되죠
즉 과거엔 지식인은 권력에 관여된 자들만을 의미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신 있다고 해서 백성을 세상을 어찌하려고?
없다고 해서 백성을 세상을 어찌하려고?
서구인이 신에게 절대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도 그들의 의도가 있는 것이겠죠 그로 인해 백성에게 무엇을 하려고 했나요?
신에게 그런 속성이 부여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이런 것이 되죠 왜 그런지 의문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으로 형성된 신관이 이후엔 지금에 이르러서는 관력자나 지식인들의 의도를 이해하지는 못하고 신이 있다 없다 식으로 의문의 순서가 건너뛰고 있습니다.
있다 없다가 아니라 있다고 할 건지 없다고 할 건지인데 대화 주제가 달라져 버려서 답답한 상황입니다.
있는지 없는지 알아야 있다고 할지 없다고 할지가 되지 않는가 할 것이지만 그건 사실만을 중요시하는 단순한 사고가 됩니다.
사실도 다양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역시나 협소한 사고에서만 머물면 그리 됩니다.
사실이 거짓을 이긴다던가 사실만이 중요하다던가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을 집착하면 고리타분한데 일단 사실을 알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또는 인식론에 대한 접근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정말 우린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인가 안다면 어떤 것인가 모든 것인가 부분적인 것인가
내가 아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로 알려진 것인가 사실로 보려는 것인가
우린 이 세상을 전부 알 수 있나 이러면 전지한 신이 되지 않나?
전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이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무엇을 사실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인문소양을 배우라고 강조하는데 철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상식적이고 관용어 같은 말이나 하는 수준으로 도를 닦거나 권력자가 되거나 지식인이 되는 것은 본인도 힘들게 하지만 주위를 더 힘들게 합니다. 거의 악마 수준이죠
우리나라도 어쩌다 팩트라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이건 그 팩트라는 것에 서로 간의 다툼이 있었던 것이겠죠
정말 사실인가?라는 의문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고 어차피 사실이라는 게 불가능한 것이면 조작이고 그러니 넌 가짜를 가지고 그러는 것이고 하는 것인데 절대 사실이 어려우니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 상식적인 사실이라는 것조차 왜곡시키는 것은 쉬우니 더 사실이라는 것의 의미가 퇴색되겠죠
고의적으로 불신사회를 만들려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사회가 되는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사실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조작하고 거짓을 만드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기도 하죠
또 다르겐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도 있는 것인데 이러면서 그들이 의도하는 것이 너무 근시적이기도 하면서 위험하기도 하죠
그 위험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의도가 불순해서이고 머리가 따라가지 못해서도 인데 이런 것은 과거부터 오래된 인간들의 하던 짓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의 고민이 있는 것이라서 해태라는 것도 등장하면서 시비를 가려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나약함이나 무지함이 신이나 신수 같은 초월 존재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게 합니다.
인간의 일을 인간이 판단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한탄스러운 것이라서 이런 것이 지속되거나 미래에도 이것이 결국 인간의 한계로 드러나게 되면 종말을 맞이하게 되겠죠
그전에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시비론에 대한 바람을 버리고 어느 정도의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이 가능한 지능을 가지게 된다면 아마 희망이 있겠죠
희망이 있으려면 이 희망을 누군가 어디선가 쏘아 올려야 하는 것인데 언제나 말하지만 우리 스스로 해내어야 합니다.
신이나 다른 외부나 제3의 다른 것으로 이걸 해결하려고 하면 안 하니만 못합니다.
신에게 의지해서 하다가 지금껏 종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근성을 우리 본능에 심었습니다.
이건 과거 조상들의 어리석음이죠 그걸 또다시 반복하면 인간이라는 게 한숨을 쉬게 하는 종족일 뿐이겠죠
물론 외부나 제3의 것이나 신이나 이거로 해결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가 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신을 의지하든 다른 것을 의지하든 상관은 없습니다.
단, 말하듯이 우리가 판단한다는 그것이 중심이라면입니다.
이 중심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의 신이나 다른 외부는 주객이 전도된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판단하는가?
그건 내가 우리가 입니다.
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들의 것을 이용하고 정보로서 쓰던가 하나의 의견이나 방향으로 서든가 그런 것입니다.
신의 계시든 점을 치든 그런 것이 신의 도움이나 의견이라면 그런 것을 보고 판단하는 내가 있다는 것이고 결국 그 판단자는 나라는 것이며 그로 인해 책임도 역시 내가 지는 것이 됩니다.
신이 그랬다. 계시가 그래서 그러했다. 점이 그랬다. 이런 건 안됩니다.
내가 그랬다. 이 말을 할 자신이 없으면 이런 것을 할 시도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대가리 나쁜 거거나 나약함이나 줏대 없는 것은 곤란하죠
사주를 공부하면 왜 그랬냐고 물으면 오늘 일진이 편인이라서 편관이라서 겁재라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러고 싶었고 내가 하고 싶어서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에 다른 것을 이유로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이 그러라고 했다고 하면 난 등신 지랄하지 말라고 합니다. 니가 한 것을 왜 신을 들먹이냐 넌 영혼도 없냐고 할 것인데 오늘 일진이 그래서 그랬다고 하거나 오늘 운수가 그랬다고 하면 역시 똑같은 욕을 나한테 들을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참았죠 말하려다가 말았죠 음 요즘 길러지는 것은 인내라~~~
이걸 넓히면 올해 내 운수가 또는 내 사주가 그래서 내 운명이 그래서 내 기문이나 자미두수가 그래서 난 이러했다. 이래서 난 안 되는 인생이다. 이거밖에 못한다. 이래서 누군 성공했다. 누군 이러하니 잘되고 난 이러니 안되고 이런 식은 안됩니다. 즉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다 포함이죠
사람들은 뭘 배우든 하나의 지식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 행위의 정당화로 씁니다. 자기변명거리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겁하게 살면 안 돼요 스스로 당당하고 자유로울려고 공부하는 것이지 왜 그럽니까
사주 같은 것을 공부한 것도 자유로울려고 하는 거라고 했으니까요
요즘은 정보나 뉴스나 이런 것도 다 걸러 들어야 하는 시대가 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신 같은 것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모든 매체가 말하는 것도 다 의미하며 내가 판단하는 것을 심사숙고해가야 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의 영향이 신 같은 힘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뭐가 되었든 내가 한 판단은 결국 내 책임으로 돌아옵니다. 정보나 언론이 틀려서 내가 손해 본다고 누가 배상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부는 이런 잘못된 정보나 거짓 언론이나 우리가 판단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들을 제어해주어야 하죠
이걸 잘 못하면 정부는 무능한 것인데 그리고 우린 우리 스스로 정보와 판단에 조심해야 하는 것도 있겠고요
정보엔 외부도 있어서 어떤 것은 외국의 언론이나 정보나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끼리만 이것이 맞는다고 해봐야 우리 안에서나 그럴 수 있는 것인데 외부가 보는 시각은 다르고 외부에서 기준 삼는 것도 다르고 우리가 기준으로 하는 것과 외부나 보편적인 기준이 다를 수도 있는데 이런 것에 대한 이해도 해야 하고 누가 맞다고 선입견을 가질 건 없고 정보나 지식에 따라 다각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외부에 경도되면 안 하니만 못하지만 외부를 차단해도 역시 우물 안 개구리가 될 뿐입니다. 이걸 알고 균형을 잡아가면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길러야 하죠
예전에 고단자에겐 지배자의 위치나 입장에서 사건이나 사회나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사고체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걸 어려워했는데 결국은 이걸 자기 편의대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시나 자기변명이나 합리화의 수단으로 삼게 되죠
지배자의 위치에서의 판단이 이로우면 그리하고 피지배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이로우면 피지배자 입장에서 판단하면서 자기변명이나 자기 당위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일관성 없는 짓인데 이러면 결국 그 위치가 안 맞는 것이 되어 어긋나게 되겠죠
그런데 저단자도 이런 실수를 합니다. 누구나 뭔가 힘이나 지식이 있으면 일단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잘들 합니다.
우리 사회는 누구나 열등감과 소외 패배자처럼 만들고 있다 보니 또 경쟁하고 낙오하지 않게 되려고 언제나 잣대를 자기 이해득실에서 하는 것이지 일관성 있게 언제나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연마하지 않아서겠죠
위나 아래나 오르고 내려가는 것을 자유롭게 하려면 선을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인데 이걸 예라고 하기도 하죠
예를 정해놔야 그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것에 걸림이 덜하기도 합니다.
판단 실수도 덜하고요
아래에서의 판단은 아래에서의 기준으로 위에서의 결정은 위의 의도에서 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줄 세움이 명확해야 합니다.
어느 것이 아래이고 어느 것이 위인지 어느 것이 어느 선인지 그것을 알아야 하죠
하지만 애초 이런 것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긴 합니다.
이걸 할 수 있으면 도에 가깝다고 대학에 있긴 한데 그만큼 어려워서겠죠
예를 정함이란 판단하는 구분이나 선을 알아 어떤 건 어떤 선에서 어떤 기준으로 하는 것인지 그때그때의 상황과 처지에 맞게 자유로운 변화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의 예나 규율을 고집하는 것을 예라고 잘못 알아 무식한 놈들이 되기도 했었던 과거가 있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