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섭하기
제목이 이러한 건 글을 보면 알게 될 거 같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나중에 어떤 영향이 될지는 다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일단 알아내거나 행하고 있는 지식은 다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못하죠
대개는 알아듣지 못하는 거 같아서 그다지 글 쓰는 보람은 없지만 어쩌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족하겠습니다.
내가 신관들과 이야기를 많이 해보고 또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관찰을 하고 나 역시 내가 하는 것 중에서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이런 것을 연구하다 보니 알게 된 것들이 있는데 이것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의 방법이기도 하고요
이걸 외부 시각에선 이적이나 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단어를 잘 정해서 봐야 할거 같긴 해요 이적이나 기적이라고 하고 접근하면 이미 신비하거나 황당하거나 그런 느낌이 드니까요
감정적인 이어짐이 있는 것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걸 오해하면 만화에서 처럼 분노하거나 악을 쓰면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도 있는데 감정이 폭발하면 그 영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능력으로 안칩니다.
이런 어리석은 것을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 만화와 할리우드의 영화에서나 하는 것이죠
세상이나 사회에 어떤 사건을 일으키려면 감정적인 동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감정의 동함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세계관이나 자기가 지향하는 도덕이나 뜻과 같은 것인데 예를 들면 선이라고 하면 선이 무엇이고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퍼져있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과거와 얼마나 같고 다르고 세대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고 상식적인 의미와 본래의 의미와 발전할 수 있는지 퇴색되어 있는지 이런 전체적인 다양한 관점에서 선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간단히 선을 주제로 책 한 권을 쓸 정도의 연구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그냥 책도 아니고 분석이나 하거나 비판이나 설명하는 정도로 그친 것이 아닌 자기 철학으로 정립될 만한 그런 정도의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지성들이 못하는 거죠 남의 것을 설명하고 분석하지만 자기 철학은 별로니까요
자천은 자기의 하늘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는데 자기만의 도 자기만의 세계관 자기의 개념 관념 이런 것이 없다면 도를 공부함에 근원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이 확고히 있어야 이 선의 기미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내 주변이나 사회나 세상에 다양한 일들이 지나가고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거기에 선의 흐름이 있는지 알아보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기미는 보이지 않게 되죠 기미 파악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게 보이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니 시작 자체를 할 수 없죠
일의 단초를 모르는데 무엇을 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과거부터 이걸 중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어떤 추구하는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이 기미를 잘못 파악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개념이나 도덕에 대한 스스로 추구하는 그 이상에 대한 이해가 정확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냥 호흡하거나 좌선하고 호수를 외운다고 이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만한 학문과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됩니다. 이걸 등한시하면 결국 스스로도 성취가 안 되겠지만 약간이라도 성취가 있으면 그 몰이해와 어긋난 힘이 주위를 힘들게 하게 되겠죠
그러니 어렵게 접근해 주길 바랍니다. 그대가 하나의 학풍이나 철학을 창조하는 그만한 지적인 성과가 없다면 도를 배웠다거나 마구 같은 일을 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접기를 바랍니다. 무언가의 하수인으로 역할을 한다면 그건 말릴 수 없겠죠 다만 그건 엄밀히 도는 아닙니다. 내가 사는 거지 남이 사는 것에 끼어 사는 것은 삶이라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스스로 정한 그 개념이 있다면 이로인한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일상의 단순한 그리고 상식적인 감정일어남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뜻에 해당하는 것에 감정이 동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은 감각하지 못합니다. 이건 흔히 알고 있는 감정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분명 어떤 이적을 만드는 것에 심장이 동원됩니다. 지연을 줄이면 줄일수록 큰 폭의 운명을 간섭할수록 심장은 짓눌립니다. 심장은 그 마음의 힘과 신체의 힘을 모두 동원하는 것이 되니까요
마음의 힘은 일종의 개념입니다. 어떤 사건의 또 의미의 맥락을 말하고 그것이 명확해야 하는 것이죠 이건 앞에서 말한 도가 철학이 형성되었을 경우가 됩니다.
신체의 힘은 말 그대로 심장 자체의 신체적인 영향이죠 심장이 힘들면 체력이 힘드니까요
이때 심장이 어떤 것에 동하는 건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식적인 감정 그러니까 희로애락 짜증 싫증 불편 공포 등등 각종 감정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이런 건 하위 감정들이죠
저 개념에 의한 감정 일어남입니다. 어떤 개념에 감정이 동하냐입니다. 그리고 이 감정의 동함은 느껴지지 않는 상위적인 것입니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강도로 그것의 의미 중요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서 이게 참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생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이 눈으로 보는 어떤 것이긴 하지만 살아있는 생물이나 자신의 생명을 말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사람이 생명을 잃었을 때 슬플 수는 있습니다.
다만 이건 감수성이 더 있는 것이지 그런 사람이 더 착하거나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감수성이 뛰어난 것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개념이니까요 이런 개념 구분을 잘해야 합니다.
공감능력 같은 것도 그런 것을 더 잘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그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구분이 있습니다.
생명은 개념이라서 그렇습니다. 이건 머리에서 이해하는 관념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의미를 두는 그 관념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이 죽는다고 감정이 동하거나 안타깝거나 슬프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과 사람과 같은 개념으로 접근하는 상위적인 것으로의 감정 동함이 있는 것인데 이때의 감정은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 너머의 좀 더 근원적인 무엇이 됩니다.
그렇다 보니 이걸 이해하는 사람이 상당히 적습니다.
한 예로 우리나라 총리가 사람이 죽은 사고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농담을 합니다.
그다지 감정적으로 그 사건에 대해서 동하는 것이 없는 건 이해하죠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왜 슬퍼하지 않으냐 왜 감정이 격하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하는 것은 나하고 상관도 없고 내 가족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피해 보는 것도 없고 식입니다.
다만 개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감정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으면 그 지위는 개념적인 것입니다. 상당한 넓은 영역을 책임지는 것이고 관리하는 것인데 거기엔 감정이 아니라 개념적인 접근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걸 감정으로만 살아오고 감정으로만 판단기준으로 삼으니 이런 어긋남이 발생합니다.
감정적으로 슬픔이 없는데 내가 왜 슬퍼하냐 식의 단순 반응이죠
억지로 슬퍼할 순 없지 않느냐
내 자식뻘인데 그럴 수 있냐고 해봐야 자식뻘이지 자식은 아니지 않냐 뭐 이런 겁니다.
개념으로 넘어가면 그것이 감정적으로 슬퍼서가 아니라 그건 슬퍼해야 하는 것이라서입니다.
감정이 동하지 않아서 나쁜 건 없습니다. 근데 의미 이해를 못 하고 개념적인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지능이 부족한 것입니다.
개념적인 즉 이념을 이해 못 하는 것이죠
누구나 말합니다. 이론은 아는데 행동하지 못한다. 이해는 하는데 인정은 못하겠다. 이건 감정이 지식에 맞게 동해주거나 느껴지지 않아서 그러겠죠
누구나 감정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걸 하고 싶어서, 그게 좋아서 하지 그래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해야 할 건 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건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나 통합니다. 그것이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 정도는 돼야 하니까요
개념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사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인데
그전에 쓴 글에서 자기 안위를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 가정이나 사회로 확장되어도 역시 자기감정을 기준으로 사는 것이 다인 거라서 이걸 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감정이 동하고 아니고 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가 있거나 내가 이상으로 하는 것이고 서원이고 목적이며 도이고 세계관이고 견지하는 이념이고 이런 것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나 위주가가 아니라 전체나 보편의 기준에서 판단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윤리가 아니라 도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견지해야 하면 가족이 힘들고 내가 힘들고 해도 하겠다는 그 의지와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지 않으려면 그 지위를 가지지 않으면 되고 이 길을 가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한다고 했으면 기어코 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게 개념을 이해한, 감정이 아닌 더 큰 대의에 의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있을 때나 내 감정을 우선순위로 판단기준을 삼지만 자식이든 타인이든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건 서로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판단기준이라는 게 형성됩니다.
일단 타인이 있으면 상대방도 나와 같은 감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감정대로 상대를 대해선 안 되는 것이죠 그러면 폭력이나 강압이 됩니다. 사실 대부분은 여기도 나아가지 못하죠
상대를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길 바라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화를 해도 자기주장이나 자기 사연의 말을 하지 상대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듣는 거 조차 못하는데 상대의 요구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묵살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하는 식의 강요는 흔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개는 타인에게 다가가는 그 한 발짝을 자기에게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정도로 광단이 되는 것은 불가하고 또 어쩌다 가도 결국 하락하는 것은 뻔한 것이 됩니다.
광단은 나를 넘어 외부로 확장해 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게 되면 나와 상대가 있으면 나와 상대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나와 자식이든 나와 애인이든 나와 모르는 사람이든 나와 아는 사람이든 뭐든 이리되면 그래서 뭘 하는데 뭘 하고 싶은데 뭔 의미를 가질 것인데 어떤 긍정적인 일이 될 것인데 이런 것이 있게 됩니다.
자식과는 성장하고 배우고 하나의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서는 것을 해주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기대에 충족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을 요구하냐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면서냐인데 이 정도는 단순한 의미가 됩니다.
자식이 언제까지나 자식으로 가 아닌 성인이 되면 또 관계는 변합니다.
죽어도 무조건 자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커서 사업 동반자가 되기도 내 후원자가 되기도 날 키우는 역할이 되기도 하는 거라서 그렇습니다. 자식이 먹여주고 기르기도 하니까요 관계는 항상 변하고 그로 인해 서로 간의 의미는 다르게 됩니다.
애인이라고 해도 그저 상대를 내 욕구의 대상이거나 이성으로서의 만족이냐 감정적인 분출이고 대상이냐인데 대개 이게 다입니다. 이성이지 그이 상의 의미를 넘어가려고 하지 않죠
이성이 있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마음의 위로를 받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에 견디고 지지자가 되어 버티고 하는 식으로 내가 또 상대 이성이 뭔가 하는 것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서로 돕고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홀로가 힘겨운 세상에서 둘이 위로하고 어울리면서 사회적인 성취이든 개인적인 성취이든 서로 간의 성취이든 크든 작든 함께 하며 의미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제 삼의 것이 만들어지는 이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건 사고로서만 보이는 것이고 사물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걸 보는 눈이 거의 없습니다.
타인을 보는 것도 못하는데 이 의미성을 보는 것은 거의 안 되는 게 상식입니다.
근데 무조건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들린다면 의미라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되면 둘이 뭔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뭔가를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뭔가 그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가가 되며 이것이 보편이 됩니다. 개념이 되고요
이 제 삼의 어떤 것에 해당하는 그의미를 볼 수 있고 이것이 둘사이의 행동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그것이 있다고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둘 넘어 셋 다수 대중 조직 사회 세상으로 나아가지만 일단 시작이 이렇습니다.
이래서 추상이 되고 개념이 되고 세계관이 됩니다. 이런 것을 기준으로 사는 것인데 작으면 가족이고 크면 세상인데 그 대상이 무엇이냐로 관점이 다르고 기준이 다르고 의미가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겨우 개인적인 감정판단기준으로 사는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영역이지요
나와 책상이 만나면 난 독서를 하든 컴퓨터를 놓고 인터넷 검색을 하든 아니면 위에서 잠을 다든 운동하든 놀이기구로 써서 놀든 뭔가 나와 책상이 있음으로써 하게 되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운동이면 나와 책상을 운동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로인한 접근을 하며 대하게 됩니다.
무엇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보느냐고 사물과 나는 의미가 달라지게 되며 상대에게 보여지는 모습도 다르게 됩니다. 우린 그런 다양한 모습과 기준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더큰 기준을 제일기준으로 하고 이것이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사는 것이죠
즉 세계관이 나입니다.
그보다 작은 세계관이나 보편이나 이런건 그안에 수렴되죠 말햇듯이 보편이나 세계관도 크기가 다 다릅니다. 만화의 세계관 내가 듣는 k-팝 그룹의 세계관 정치의 세계관 문화의 세계관 내 세계관 모두가 다르고 크기도 다릅니다. 거기에 가장 큰 것을 궁극의 내 세계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안 보이면 또 위의 예로 든 총리가 됩니다. 나와 국민이 만나는데 거기서 그 무엇이 일어나는데 그게 안보이니 그 무엇을 제대로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죠 이걸 과거엔 그냥 일이라고 했습니다. 나와 뭔가 만나면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일을 안 하거나 못하거나 그리 되죠
이런 것을 연습하는 것이 공부가 됩니다.
개념은 개념일 뿐 그것에 목숨 걸면 바보일 수 있습니다. 교육부조차 인문이 왜 중요한지 모르고 주입식이거나 단순 평가이고 그저 눈에 보이는 학습효과만 바라는 근시안적인 사고를 하는 정도인데 이게 감정으로 사는 거지 개념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지식인들도 개념으로 사는 것의 의미를 모르고 있게 됩니다. 자기가 습득한 지식을 위해 사는 지식인은 그래서 거의 없는 것이 됩니다. 돈 때문이거나 명예 때문이건 권력인 거지 스스로 배우고 성취한 지식을 위해 돈이나 권력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죠
성과를 봐야지 언제 드러나고 눈에 확인 안 되는 것을 위해 돈 쓰고 애쓰는 것은 못 봐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적이고 창의적이며 개념적인 것을 모르고 신체로 열심히 하는 보이는 것에 기준 삼으니 그렇습니다.
보여주기식 이런 말이 있으니까요
책임이라고 하면 그 책임을 위해 자기 평생의 성과와 이룬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인가 돈과 지위마저 버릴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왜 못하는 것인가 그 못하는 것을 스스로가 사욕에 사는 소인이라서 그렇다는 걸 알 수는 있을까
사욕을 버리고 천리에 사는 그것의 어려움은 과거부터 한 말입니다. 그런 것을 고민하지 않는 자가 나라의 권력자로 있는 그것이 서글픕니다.
누누이 말합니다. 보편을 기준 삼아야 한다고요 그 보편은 개념인데 책임, 인권, 생명, 선, 검소, 겸허, 정의....
이런 것 중에 하나라도 자기의 보편으로 삼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으며 살지 못하는감
어떤 감정이 일어도 어떤 유혹과 탐욕이 있어도 어떤 고통과 힘겨움과 저항이 있어도 견디지 못하는감
그러면 자천은 아닌 거지 자천 안 하는 사람에게 이걸 요구하면 과거부터 도라고 하는 것은 학문인데 학문이란 세상을 더 이롭게 하려는 자들이 배우는 것이고 배우는 이유는 권력을 가지기 위함이며 그 권력은 이로움을 주는 일을 하기 위한 자들의 행위를 말하니 그래서 요구할 수 있고 애초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신관들이 하는 일이 지연이 걸리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개념을 아는 자들인데 개념이 현실에 구현되려면 감정을 건너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저와 세상의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죠
내 심장을 거치면서 개념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프면 누군가 그리고 어디선가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려면 감정의 동함이 있어야 하고 그 감정이 동하게 하는 것은 상위의 개념을 아는 자들이 되어 그 상위의 누군가 뭔가 한다면 현실에선 감정의 동요가 있는 것이고 반대도 있는데 사람들의 어떤 사건이나 의미나 사항에 감정이 모이면 그러한 감정을 개념으로 정리해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시기를 정해주기도 합니다.
또 그냥 심장은 아닙니다. 내가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그것이 신관들과 맞아야 하고 그래야 심장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사회에 감정이 격할 일이 생기면 그와 비슷한 정도의 격함을 내가 또 사람들의 심장에 부담을 주어야 일어나겠죠
그런데 이런 과정을 한 단계 거치는 것이 있어서 지연이 있습니다.
상위에서 어떤 추상이나 개념이 정해지면 그것이 현실에 나타나게 하기 위한 감정선들을 이어갑니다.
또는 사람들의 감정이 개념으로 정리되면 역시 그것을 이어지게 합니다.
이런 과정이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 감정의 맥락이 이어지고 모여서 하나의 사건을 만들고 사건도 감정을 따라 이어지며 또 다른 것으로 연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정엔 상식적인 감정도 있고 개념에 따른 감정도 있어서 이런저런 것이 혼합되오 이어져가게 하죠
감정이나 생각을 하게 하기 위한 사건의 일어남에 물리적인 것이든 아니든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의미가 이어지고 원하는 개념으로의 접근이 되게 하기 위해서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사고든 다 이 개념이 포함하는 한계 내에서 이어지며 일어나게 되죠
그러다 보니 시간의 지연이 있는데 이어지는 것은 의미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개념으로 수렴되니까요
이유 없고 의미 없는 것은 단발성이라서 그런 것을 굳이 일으키려고 하지 않는 것도 됩니다.
그냥 세상이 좋아지려고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선 안됩니다.
좋아진다고 하면 어떤 기준에서 좋아지는 것이고 그리고 누구의 어떤 기준에 의해서라는 두 단계의 건너감이 있습니다.
지상낙원이 된다던가 멸망한다던가 하는 말을 하는 것이 과거에 있었는데
이거 역시 어떤 기준이고 누구의 어떤 기준인가라는 애매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예언이나 말은 하등의 가치가 없는 것이 됩니다.
심하게 말하면 이런 말 하는 그놈이 자기 기준에서 보는 것이 되는데 이건 정신병입니다. 왜 세상이 그대 기준으로 되어야 하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오류가 있는데 이걸 모르니 대가리가 되다 만 것이지요
사실 나도 그런 식으로 말하죠 내가 원하는 것이 있고 그렇게 되게 하려고 뭔가 한다고요
나와의 차이는 뭘까요?
사람을 알려고 하고 사람들의 감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나를 알아야 남을 아는 기준으로 삼거나 틀로 삼고 남이 말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나와 같거나 다름을 알고 그로 인해 그래도 사람이다 보니 가지는 성향이나 한계나 길이 있는 것을 봐야 하고 사람이 적은 것과 많은 것에서 오는 오차나 흐름의 다름이나 변화를 알아야 하고 이런 것이 보이다 보면 그로 인해 사람들이 만든 개념들이 움직이는 길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로 든 선이라는 것으로 해도 이것도 사람이 만든 것이고 이해하는 범위가 있으니 그것이 지금 어떤 상태이고 변화가 어떻게 왔고 어디로 갈 것이라는 것을 알거나 나름의 정리가 되어야 선에 의한 사람들의 감정 이동이나 흐름에 맞게 사건이 드러나고 벌어지며 변화하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럼 간섭이 되어가죠
이런 것을 하면서 내 감정 역시 사람들의 선의 흐름에 맞게 맞추어지는 동조현상이 일어나서 사람들의 선의 흐름에 따라 감정이 일어나고 행동하고 그러면서 마구 한다고 어디 간다고 누굴 만난다고 뭘 한다고 하는 식의 구체적인 일이 됩니다.
하위 감정과 상위 감정이라고 구분하면 개념에 따라 감정을 제어하는 것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위로서만 자기 욕구 채우는 것으로만 감정을 사용한 사람들은 인정하지 못하고 이해 못 하는 그 감정이 있다고 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