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감지층

제라울 2019. 10. 15. 17:50

감지층

감지층은 살면서 형성된 것인데 이 살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뭘 의미하느냐이다.

흔히 하는 예로 자전거로 드는데 자전거는 처음에 의식적으로 타면서 균형잡는다. 이것이 되면 나중에 무의식적으로 타고 다니며 균형잡고 하게 된다.

이렇다면 이때의 무의식적이라고 하는 것은 난 의식적인 거라고 하겠다. 이건 다른 곳에서 하는 말과는 다른데 무의식적으로 자전거를 타는거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그건 안다. 아는데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넘겨준 것이기도 하니 의식적으로 하다가 의식의 필요에 의해 무의식으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의식의 필요이니 의식이 판단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판단이 의식적인 과정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아닌것도 아니다. 자천거를 탈때 잘타길 바라는 것이 잘 ㅏ는 방식으로 자기를 구성해가길 바라는 것인데 이 바람이 바로 판단의 일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라서 된 것이니 판단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동기가 의식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상의 것이 95%가 무의식적이라고 하는데, 글쎄 난 95프로가 의식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수의근, 불수의근, 운동신경이나 일상의 무엇이든 우린 의식하지 않으면서 하고, 던진 공을 받으러 갈 때도 사실은 무의식이 제어하는 거라고 하는데 이런식은 의식의 필요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편의, 편리, 필요, 안배, 설정들이지 않는가이다.

이런 것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하고 딱히 그 힘을 알 수도 없는 것을 심층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의식은 심층에서 감지층의 일부이고 이건 랑층으로 베껴지지 않는다. 이런 의식과 무의식의 조합으로 일어나는 일상의 삶이 베껴진다.

그래서 의식, 무의식이라고 하면 우선 어떤 의미에서 그런 구분을 하는지를 분별하고 대화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 된다. 사람마다 다양하게 정의하며 말하는 것이고 대개는 별 생각 없이 막쓴다. 단어의 의미를 정의한 적이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다보니 상대가 어떤 의미로 그러한 단어를 쓰는지 듣지 못하게 된다. 내 의미와 남의 의미를 구분하는 것을 하려는 감정이 안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의식이다. 무의식이라가 아니라 이렇게 봐서 이런 기준에선 이런 것은 의식이고 이런것은 무의식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무튼 의식이나 일상의 생활을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거니 무의식적인 거는 감지층이라고 한다.

그럼 그외 뭐가 남느냐고 하면 자전거로 말하면 자전거를 타고 싶은 것 그로인해 인생에 맥락을 가지게 되는 원인이 감층이다. 그리고 의식이전에 형성된 것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식이 처음부터 있는지 알기도 할지 모르는데 의식도 서서히 성장한 것이다. 그런 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심층은 서서히 수그러들게 된다. 이러한 점차적인 과정에서 감지층이 생성되고 그러면서 해층의 다하지 못하는 심층이 만들어진다.

내가 왜 자전거를 타고 싶은지 그걸 의식이나 감지층에선 모른다. 무의식도 모른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어떤 누군가가 타는 것을 보고 질투나서 나도 타고 싶거나 이럴 경우 자기는 왜 이런 심리가 생긴 지는 모를 것이다. 질투라는 단어를 알기전에 이미 자전거 타는 것을 보는 것이고 감정은 이미 발생하며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간다. 감정 하나하나를 규정하고 구분하기엔 힘들다. 대강 커가면서 남들이 사용하는 단어나 감정상태들을 보면서 짐작해서 그런 것이 뭔지 알고 대강 쓴다. 그렇게 자기가 잘 모르는 어떤 원인이지만 주위에서 보고 들어거나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들식으로 인지하지 못한 원인에 의한 것으로 된 것들도 무의식이지만 이건 감지층이다.

여기서 사실 누구나 자전거를 타고 싶어한다. 이런 누구나 다하고 싶고 가지고 싶고 하는 일상의 욕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생의 맥락으로 된 것이냐이다.

자전거를 한때 탈 수도 있고 타보기도 하고 하는 것이지만 때론 한번도 안타는 분도 있다.

이런 한번도 안타게 되는 경우 이것의 이유가 뭐냐이다.

또 타는 경우도 남보다 쉽게 타거나 잘타거나 오랜기간 타게 되는 그런 특이한 것을 보고 그렇게 된 원인을 찾아가면 모르게 된다. 모르니 감층이다. 이걸 알게 되면 감층을 마하가 보게 된 것이고 이러면 감지층이 되어 간다고 한다. 간단히 운동신경이라는 무의식이 있는데 운동신경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보편적이지만 그것이 모두 다른 정도차가 있다는 것은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자기의 자전거로인한 인생의 맥락을 찾지 못하면 감층은 모르는 것이 된다.

질투 애기 했지만 동네에서 부러움을 주는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자전거의 형태가 맘에 들어서 그런 간지나는 것을 타는 것을 하고 싶거나 이런 것이면 질투를 우선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그런 심리원인으로 뭔가를 선택하고 욕망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감층 구분이 어렵다. 내적인 감정 동기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질투라는 것을 대개 부정적으로 이해해서 그렇다. 내가 남들하고 대화하면서 힘든 것중에 하나가 이런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이런 단어를 남 욕이나 비난이나 비아냥이나 그런 경우에만 쓰기 때문인데 그것을 철학적으로, 사고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도를 배우고 성취하기 위해, 논하고 비판하고 분석하고 비교하는 것을 안해서 그렇다. 질투라는 것이 어떻게 왜 생기고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사람마다 같은 동기이지만 그 목적은 달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못보고 질투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도 몰라서이다.

정의하는 것을 안하는 것 같다. 질투를 만약 외부에서 접해오는 것이 맘에 들어서 나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 이렇게 정의하면 다르게 들을 것이다. 질투를 남이 잘되거나 내것을 남이 가로채거나 그런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하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기도 한데 이건 사전적인 정의이다.

여기에 남이 잘되는 것이나 내 것을 가져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이다. 나도 잘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고 나도 가지고 싶은 것이라서이다. 즉 내가 바라는 것인데 남이 하니 그것이 부러워서인데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또 뭐냐이다. 이걸 남의 미워하기 위해서나 남을 해치기 위해서라고 하지는 않는다. 부럽고 바라는 마음 가지고는 고통을 겪고 힘들게 뭔가를 성취하는 동기로는 약하다는 것이다. 부러워서 기어코 해내고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더 나아간 부러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른데 그러하니 상대방이 어떤 정의에 의해서 말하는지 들어야 한다. 누구나 사전적인 상식선에서 언어를 쓸거라고 보는 것은 너무 안일한 대화이다.

그러면서 질투에서 비롯되는 것을 보았다고 다는 아니고 왜 그런 심리가 나에게 있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아야한다.

더 구체적으로 그 질투가 인생에서 어떤식으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왜이런 것으로 영향주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로인해 남과 다른 삶을 살게 된 원인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감층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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