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미로 설명해도 될 것이지만 이게 맞는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안될지도 모르고 반론이 가능한 글이라서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좋을 것인데 비판적으로도 글을 보지 못하면 자기 것으로 하기에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니 무엇이든지 나름의 사고 재구성은 해야 해서 나 역시도 아무리 글을 봐도 뭔가를 이해하는 것에 고된 애씀이 있어야 해서 이렇게 글을 쓰지만 이것이 또다른 고뇌를 줄지 모르겠다.
오행에 대한 것이 있는데 무엇이든지 이런 것으로 해석하고 따지려는 것이 있다.
이것이 아니면 할 게 없을 정도이기도 한데, 그래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아서 할 것이고 "그래서 또 오행이냐" 기도 한 것이라 이리 저리 궁리해본 것을 써본다.
목화토금수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라는 행성에서 온 것인지 그렇게 인간의 관념으로 별을 볼 수 있을 즈음에 별에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인지는 내가 할 말이 아니다. 그런 고증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이해만으로도 벅차서 그렇다.
목이 의미한 것은 오르고 나아가고 성장하며 수직적인 것인데, 이런 것을 중시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곳에 오름이라는 것이 너무도 여러 곳에서 작용해서 그렇다. 사회진출도 사회에 나가고 지위가 오르고 부가 오르고 명예가 오르고 과거엔 관직에 진출하는 것인데 이런식으로 나가서 올라가는 것이 있게 된다.
그전에 신체의 성장도 있고 지식의 성장도 있고 자아의 성장도 있고 뭐든 성장하게 된다. 축적하고 모으고 그런 양적인 것도 성장이 되는 것인데 조금 다른 의미전환이지만 양에서 질로 다시 질에서 양으로 변하겠지만 양도 질도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있게 된다.
십원 이십원 모이지만 그것이 만원되고 십만원 되면 돈에 다른 의미를 준다. 십원 이십원은 우습게 보지만 단위가 바뀌어지게 되면 그렇게 되는데 양이 어느이상되면 분명 다른 것이다. 그것을 성장이라고 한다. 나아갔다고 하는 것인데 그냥 양이 늘어서가 아니라 어느이상 늘어서 그 어느이상의 임계점이 있다.
그런데 과거의 역학도 그렇고 지금의 서구 철학도 그렇고 이런 임계점의 변화이전에 그러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뭔저 파악하는 것이 있게 된다. 들뢰즈는 근원의 차이를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 것은 과거에 기미라고 했고 징조라고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또는 쉽게 모르는 변화의 징조를 알려는 노력이다. 이런 것이 역학이 되어가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뭔가 근원적인 변화를 알아보는 것인데 어디에서부터 어느정도의 변화에서부터 포착할 수 있을지 그것이 능력이기도 하다.
그런의미에서 목은 변화하는데 성장하고 오르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냥 차이가 아니라 그 방향성을 보려는 것이 오행이다. 그래서 지금의 서구철학이 아직은 이렇게 방향으로의 차이성을 연구하지는 않아 보이는데,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안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목이 성장하는 것엔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있다. 위로 오르면 당연히 중력과 반대가 되니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로 무엇을 거스르는가가 되겠다. 금이 중력인데 이건 기성세대나 나이든 사람이나 보수적인 성향인데 청소년 시기는 목이 강한 시기이다. 성장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하는 것인데 이때 반항한다고 한다.
반항이라는 말은 분명 청소년이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청소년이 쓴다면 어른 들이 한 말을 무심코 배워서 한 말일 것인데 왜냐하면 반항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대든다거나 기존 질서에 대드는 것을 말할 것인데 이미 자기들이 중력으로 작용해서 이런 목기가 거스르는 것이 못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젊을 애들은 안된다는 식은 수천년을 이어온 경구인데 이렇듯 나이들면 금기가 있어서 누르거나 인정을 원하고 자기 탐욕을 드러내는데 거기에 목은 그러한 안정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거나 고정된 것에 불안함을 주고 다른 것을 하려는 창발성을 주고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다양성이 되며 다른 것이 되며 의욕이 나오고 달라지게 하는 역동성이 있다.
시작하는 의미도 있으니 뭐든 다시 시작해 보려는 것이어서 기존의 다 해본 입장에선 무의미한 반복으로도 보여서 굳이 한다고 타박하고 이미 이룬 것을 습득하면 되지 다시 할 필요 없다고도 하지만 이런 것이 무의미에서 달라지고 있는 차이를 보지 못하는 안목이다. 기성세대들이 이미 다 해본 것을 하는 것이 아닌데 같은 것을 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교과서를 배워도 자기들이 이미 다 배워서 또 연구해서 만든 지식이니 이걸 익히면 된다식이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즉 이미 이루어진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이루는 방법을 알게 해야 하고 그런 지식을 창조해가는 과정을 탐구하고 추구하며 이루어가는 것을 돕는 것이 교육인 것을 모른다. 이미 있는 것을 하라고 하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도 다시 하라고 해야 하며 자기식으로 하라고 해야 하는데 그러한 신선함이 목인데 이게 없으면 목이 부족한 것이된다.
이런 역동성이 불편하다면 이미 목이 부족하게 되었거나 금기나 다른 것이 너무 많거나 그럴지도 모른다.
목이 성장하기위해선 수가 필요한데 이건 유연성이고 탄력이며 변화가 자유자재한 것이어서 흘러다니고 고정되지 않아서 뭔지 모르겠고 무분별한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자유로운 것이나 유연성이 목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된다.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틀이 된 것이 없기 때문에 목은 자유롭게 창발하고 무한하게 나아가려고 하며 제멋대로이기도 하고 자기가 다 해보아야 직성이 풀리게 된다. 수가 아니면 목을 생하는 것이 불가함은 그래서이다. 목의 자유가 한정될 것이니 이러면 수라는 것은 무규정이고 무한하며 아무 것도 걸림없는 것이 되어 이것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체가 성장 할땐 유연해서 성장하고 신체가 변형이 가능하게 된다. 수가 없으면 신체는 변형되기 어렵고 움직이기도 어렵다.
늙으면 유연성이 없고 몸도 마음도 달라지는 것이 힘든건 수가 부족해서 그렇다.
늙으면 금이 되어 수를 생한다고 하는데 그때의 수는 유연성이 아니라 영혼이다. 안으로 수렴되어 다른 것이 된 것인데 그래서 죽어야 수가 온전해진 것이다. 수는 사라지는 것이어서 도둑이라고 하거나 현무라서 알기도 힘들고 보이지도 않는 다고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의 상태로 가야 다시 목으로 탄생을 할 수 있고 이런 과정이어야 그동안 수축되고 한계지어지고 고리타분한 것이 수의 유연함이나 무한함의 능력을 되찾게 된다. 그래서 죽어야 한다. 즉 수의 상태로 있어야 하며 그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니면 씰데 없는 사람이 된다. 나이들수록 편협해지고 딱딱해지는 지식과 마음과 영혼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 신선함이 부족한 인간이 많다는 것은 정말 세상이 암울하다.
눈에 안보이면 여행갔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거나가 되고 너무 멀리가면 저승으로 간 것이다.너무 빨리 움직여서 안보이는 것도 있고 너무 변화가 심해서 규정되지 않아서 못 보는 것이기도 하고 몰라서 안보이는 것도 있다.
항상 있지만 있다고 하거나 알려주어야 있는 것이어서 수는 참 재미있는 것이다.
수가 안보이는 것 중에 지식이고 마음이라서 얼마나 큰 마음이고 얼마나 방대하며 깊은 지식이냐가 된다.
이런 마음이 넓고 지식이 커야 사람을 받아들이고 지식을 사건을 개념을 시대성을 문화를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생활하느냐가 된다. 수가 유연성이니 지적 유연성 마음의 유연성 신체적 유연성, 직업적 유연성, 취미의 유연성, 기호의 유연성, 행동의 유연성 어디에도쓸 수 있는 것인데 이런게 다 수가 된다.
그런 마음이 또 자아도 수인데 자아가 수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유연한 자아냐가 수이다. 자아가 경직 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이러면 금이겠다.
그래서 오행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 절단도 아니고 단정지어서 보는 것도 아니고 오행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행적인 상태라든가 그런 오행으로 보면서 차이를 알려는 것이고 그 차이를 아는 것이 기미가 되어 다음의 변화를 짐작할 수단이 된다.
상태로 보는 것은 이런 면에선 수이고 저런 면에서 목이고 이럴 경우 금이고 이건 화이고 이런 것이어서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오행이 아니라 어떤 상태나 어떤 모습이나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느냐를 보고 어떤 오행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사물에 관점을 달리해서 다양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목으로 보는 관점 수로 보는 관점 식이다.
자아가 있다면 이 자아가 성장하는 것이라고 하면 목을 말하는 것이고
자아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수이다. 성장도 변화이고 변화도 변화인데 이건 다른 것이다. 변화에 성장이라는 방향성을 보는 것이 목이다.
화는 그것이 드러나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데 자아가 고집을 부리든 감정적이든 이성적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면 화이다. 토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토가 변화를 위한 완충작용인데 완충작용이 관성같은 거라서 하던 것을 계속하려고 하고 이런 것이 고집하다보면 결국 절단나고 부서지고 부페하고 썩고 망가지는 것이어서 그러한 변화의 중간 단계에서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함이거나 과도기이다.
우유부단함이고 공백이고 중간지대이다.
토가 의지를 가진 것으로 보면 고집이라고 하고 아니면 우유뷰단함이어서 딱히 뭐도 못하는 것이다.
자아가 자기를 주장하면 화이지만 그 주장을 기어코 하고 오로지 하고 변화에 반응이 더디어 가면 토인데 나이가 불혹이라는 때가 된다. 유혹에 안 넘어가면 좋지만 다르게 보면 이젠 달라지는 것을 못하고 변화에 응하기가 힘들다는 것도 된다.
금으로 넘어가는 늙은이 되어가는 중간이다. 그걸 좋게 포장한 것을 보면 늙은자가 늙은 것을 옳다고 보는 입장에서 한 말일 것이다.
금은 건조한 것인데 덩어리지고 뭉쳐지고 나쁘면 암덩어리되고 좋으면 금덩어리이다.
금이 긍정적일 땐 황금이 되어 가치가 달라진 격을 바꾸는 것이어서 좋은데 대개는 암이 된다. 사회의 암, 집안의 암, 걸림돌이거나 병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정된 거점이 없으면 또 중력이나 행성이나 덩어리 된 것이 없으면 땅이라도 하늘이라고도 못하는 것이어서 구궁에선 곤의 땅이나 건의 하늘이 태라는 금의 위아래로 있다. 격이 상승하는 것인데 격이 달라지는 것이지 꼭 상승은 아니다. 아래로 되어도 격이 달라짐이다. 결과나 결실이라는데 이것도 수에서 목으로 화로 토를 나름의 의지나 목적을 가지고 온 사람만이 결실이 되지 아니면 그냥 암덩어리이다. 봄에 씨뿌린 사람이 가을에 추수를 하지 그게 아닌 사람은 뭘 하것나
결실에는 다양한 것이어서 무엇도 결실이다. 기술도 결실이고 돈도 결실이고 지식도 결실이 되고 문화도 되고 뭐든 결실이 되는 것엔 금이다. 그래서 금이 없으면 이룬게 없게 된다. 성장하는 것이 목이지만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미 단정이 된다. '성장' 이렇게 말하는 결론은 즉 금이다. 뭔가를 정의하고 그렇다고 인정하고 말할 수 있고 존재한다고 하고 이러면 금이다.
공간적인 사고이고 단정적인 서구인들의 사고가 그래서 금이다. 그들이 금이라서 그렇다.
왜 서쪽이 금인가 이런건 지구의 자전을 설명해야 한다. 자전에 의한 물과 바람과 땅의 속도차이를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서쪽과 동쪽과의 차이를 만들게 된 원인이다. 이건 다음에.
오행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다. 흔하게 쓰는 것이 오행이지만 흔하게 알 수 없는 것이 또 오행이다.
굳이 오행이 아니라도 눈에 보이고 경험하는 세상에서 그와는 다른 의도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방법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하려는 것은 살다보니 또 배우다보니 눈에 보이고 쉽게 드러나는 것 이면에서 다른 것이 보이는 것이 당연해서이다.
단순한 정보나 이론에서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면 다른방법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에 흥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동양에선 오행이라는 것이 너무 흔해서 지겨울 정도인데 문젠 이 오행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지난한 과정이라는 것이 된다.
자기가 이해한 한계내에서 또 쓰는 방법에 따라서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어서 또 이렇게 쓰게 되어 있는 것이 또 오행이어서 이것이 장점이기도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대나 들이대도 되는 것이니 오히려 정확성이나 합리적이지 않다고 하기도 하는 것이고 아무데나 써도 되니 그만큼 추상이 오른 것이니 더욱 근원적인 지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리집에 옥상에 다른 분이 살고 있는데 이런 구조다보니 지붕이 다 덮이지 않고 남는 부분이 있다.
지붕이 감싼다고 이해를 하면서 해석하면 내가 다 감싸지 못한 일이 있게 되는데 지붕을 산으로 보면 목에 해당하는 형태이고 덮지 못한 것은 모양이 토가 되는데 목극토가 되어 목의 지붕이 덮지 못한 토가 극되어서 극당한 것이나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이 있게 된다.
이렇게 오행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다 덮지 못해서 다 감싸지 못한 것이 있게 된다는 것으로 말하면 그냥 된다. 오행으로 말하는 것이 재밌긴 하지만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오행이라는 추상을 현실의 대응으로 맞추어서 사고할 수 있으려면 오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사주에 육친이나 십성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추상이다.
극하는 것은 재라고 해서 편재 정재식으로 말하는데 극한다는 것이 그냥 극이니 이기는 것이나 제어하는 것이나 억누르는 것이나 그렇게 이해하지만 극이 소유가 되고 내가 대상으로 삼아서 노력할 대상 목적으로 하는 대상 인데 극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뭔가 애쓰고 하고싶고 이루고 싶어하는 그런 욕구의 발로가 되는 것이다.
왜 그것을 극이라고 했나 이겨야한다는 것은 결론이 나는 것인데 지든 이기든 끝이 난다.
돈을 벌든 못벌든 어떤 일을 성취하든 못하든 집에 가든 못가든 공부가 되든 못되든 여자를 사귈 수 있든 없든 재산이 있든 없든 결혼을 하든 못하든 뭔가 결론이 난다. 이걸 극이라고 한다.
즉 극이라는 것이 뭔지 잘 생각해보면 극하는 것이나 극당하는 것이나 이게 뭔지 알게 된다.
극당하면 뭔가 엄청 안좋을 거라는 것이나 불길하고 흉으로 안다면 또는 그렇게 접근하면 극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도 안하고 사주공부한게 된다. 극이 없으면 우린 삶의 의욕이 있을 수 없다.
극해야 자식이라도 낳는다. 아니면 낳지 못하고 안에서 죽는다. 내가 극해야 나간다.
극은 나오게도 들어오게도 하는 것이다. 나오게는 생산인데 생산이란 뭔가 가진게 있고 이룬게 있고 성취한게 있고 이런 것인데 이게 극하는 것이 아님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들어오게 하는 것역시 극한다고 하고 재물이나 사물이나 극하면 내 것이 된다. 내것이 되는 것을 극한다고 한다.
같은 것을 들어온다고 또 나온다고 말하는 것인데 극이다.
생을 생산으로 여기는데 극이 생산이기도 한 것이다. 오행을 생극으로 보는 것엔 우리 주위에 그로인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아서 그렇다. 생극외에 합이나 충이나 형이나 뭐나 여러 이론이 있는데 그거 역시 그러한 것으로 우리 인생을 설명할 것이 있는 것이다. 그 의미를 잘 보면 오히려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게 된다.
충이 일어나는 것이 일종에 충격요법이나 바쁘다는 것이나 과격하거나 갈등있거나 대단하고 거대하고 황홀하고 다이나믹하고 스펙터클하고 매력있고 전율하고 이런 감정적인 자극이 또 신체적인 자극이 모두 충이다.
이걸 충이라는 한 단어로 퉁쳐버리니 이해가 어렵다.
그래서 단어 하나를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자꾸 사고해봐야 한다. 일종의 화두 드는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이건 우리 일상의 것이라서 하나 이해하면 하나 행동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재미나게 된다.
이런 것을 설명하면 너무도 지난해서 설명하면 할 수록 복잡해진다.
주절주절 끝도 없이 주절될 수 있다. 그러면 머리가 지끈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