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초라는 것이 기미같은 것인데 어떤 것의 가능성의 흔적을 보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반복 속에서 차이나는 그 미세한 징조를 잡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역학의 기초이다.
효가 양효가 있고 음효가 있을 때 양효가 많고 음효가 적으면 적은 음효가 해석의 기준이고 반대도 그렇다.
그래서 지뢰복괘가 음효가 다섯개이고 양효가 하나인데 그 하나인 양효를 해석의 기준으로 삼아서 본다.
한 겨울에 그 양이 하나 나오는 그 미세한 기미를 잡아내는 것이다.
한 겨울에 어디서 양이 보이나 분명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양이 이미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건이나 사물에서 즉 변화하는 것에서 그 보이지 않거나 잘 안 보이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그것을 보려고 하고 찾아내려는 것이 공부이고 이런 것이 아니면 학문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떤 학문이든 미래 예측이 목적이라고 했다.
즉 우리에게 앞으로 어떻게 되고 이제 뭘 해야 되고 뭘 준비 해야 되고 뭘 대비해야 되고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하고 무엇이 우리가 할 일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이런 의문에 답하려면 결국 미래를 알아야 하고 미래를 예측해야 하고 변화하는 세상에 그 기미를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작은 단초를 알려는 노력이 역사의 발전이고 학문의 발전이다.
논리이고 수학이며 그 전문지식이라는 것이 정밀하고 정확할 수록 우린 신뢰하고 믿게 되는데 그건 미래에 대한 믿음이다. 핸드폰을 새로 사면 앞으로 그 새 핸드폰으로 인해 살아갈 미래에 대한 기대와 방법의 달라짐을 믿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미래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못보고 또 아무렇게나 보이지도 않는 그것을 보려는 것이 공부라고 했으니 결국 보는 것을 해야 하는데 본다는 것이 차이가 나야 하고 드러나야 하고 규정해야 하고 개념을 정하고 관념으로 체계를 세워야 하나의 의미가 도출된다.
그냥 본다고 보이는 것은 없으며 그냥 눈 뜨고 본다고 보여지는 것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너무 심하려나
지루하고 항상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서 어떤 차이를 보고 있나
어떤 것이 달라지고 있으며 그 달라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의 달라짐도 보이나
어떤 것이든 달라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본 것이 없게 된다.
세상이 변했다고 한다면 무엇이 변한 것일까?
유행? 옷 입는 유행? 이런다면 옷을 입는 것에 뭔가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옷에 대한 변화에 관심 없다면 변하는지도 모르고 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옷의 유행에 관심 있다면 그 의미에 민감한 것이 된다.
왜 그 차이가 보이는지 왜 옷의 유행의 차이가 보이는지 그 보이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남과의 차이이고 남과의 다른 점이며 성격을 알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린 자기가 관심있는 것에 차이를 분간할 수 있다.
너무도 세세하게 분간한다. 무관심한 사람이 보면 당최 알 수 없는 것까지 구분하고 의미를 만들고 따지고 흥분하며 과도할 정도로 집요함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이러한 차이에 민감한지 그것이 모두 있으니 그것이 뭔지 알고 그것에 따라 성향을 알고 살아가는 방향을 알아가며 그로인한 삶의 의미를 관찰하면 재미있기도하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떻게 달라져 가는지도 보면 되는데 자기의 차이나고 달라지는 징후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입장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뭐든 자기의 욕구나 생각이나 감정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되고 그래야 하며 난 맞고 난 정당하며 난 합당하며 이런 것에 일말의 의심조차 불허하고 누가 의구심을 표현하면 당장 성질부터 난다.
그래서 자기의 단초는 알기 힘들다.
그 차이점을 알려면 다른 것과의 비교, 자기와의 비교 이런 것을 해야 하는데 이건 그만한 훈련이 있어야지 거저 되지도 않는다.
하나의 단초에서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런 성격에서 미래 길흉까지 구분하는 것이라고 과거분들은 말하지만 그렇게 단초가 비약하지는 않는다. 단초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수월지 않아서 그런 행동을 한 두번 한다고 그런 단초가 되지도 않고 항상해도 단초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단순한 이해이다. 아니면 자기만의 노련한 방법이 있다면 인데 대개 이렇다. 자기만의 방법이라 이걸 배우기가 요원하다. 보편적으로 가르치고 알려주는 것에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동양학이다.
즉 인의 단초가 측은지심이며 측은해 하는 것이 있으면 인이 있다는 단초가 된다지만 측은해 하는 것인지 알 방법도 어렵다.
눈물 흘리면 그러한가 이건 웃기는 소리이다. 눈물은 무기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눈물로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이지 순수하게 안타까움도 아니도고인도 아니다. 또 눈물은 자기가 슬프게 살거나 살까봐 두려움이고 이로인한 자기 연민이기도 하다. 눈물이 심하거나 눈물이 전혀 없는 극단성은 오히려 힘들게 슬프게 사는 자기에 대한 예언이고 설정이기도 하다.
순진하게 한 두 행동이나 표현으로 단정지으면서 사람을 보기엔 너무 무지하다고 한다.
동정심도 왜 그사람이 동정심이 있는지 동정심을 표현하는지 동정심이라는 것으로 의도하는 것이 뭐지 알지 못하면 이것도 신뢰할 수 없다. 이것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그 감정이나 행동이 아니라 그로인해 뭘 하려는 것인지를 봐야 한다. 사랑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단초보기 힘든건 그래서이다. 이런 것에 너무 간단히 속기 때문이다. 속는다기 보다 속아주는 것이다. 속는 것도 역시 다른 의도가 있어서이다. 이런 말이 너무 의심하고 따지는 것 같이 보인다면 그것도 할 수 없다. 이런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역시 나름의 욕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단초보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무나에게 가르치지도 않았고
그러다보니 글로 있는 것으로 짐작하며 공부하는데 이러다가 엄한 학문이 된 것이 많다.
뭘보고 어디를 보고 어떻게 보는지 상세하게 말하는 경우는 없다.
그래야 하는 이유도 없었고 그럴 사회도 아니었다.
분명 나름의 방법을 가진 현명한 사람은 있다. 하지만 앞에 말했듯이 그들의 배우고 따르기란 수월치 않은게 너무 많다. 그것을 이제 좀더 방법적으로 말하고 알리고 연구해서 보편성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가 되어간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하나하나 배우고 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