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관념

제라울 2018. 10. 21. 17:27

내가 생각하기엔 도를 배운 다는 것이 관념을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될 거 같습니다.

주관적인 것을 가지고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이런 구분은 그다지 안합니다.

어떤 것이 주관이다. 객관이다. 이렇게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에 흥미가 없고 그런 사건이나 사물이나 의미들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내 머리 속에서 사고 한 것이라고 이것이 주관이라는 것으로 외부의 객관과는 다른 것이라 할지 모르는데 그런 것은 인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생각이라는 것고 살다보니 기억되고 감정을 일으키게 된 것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고 생각하게 된 동기도 외부나 내부의 자극으로 된 것이며 내부의 자극이라는 것고 그전 언젠가의 경험이나 살아온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심리가 요동치는 것이기도 하니까 출처를 따지면 모든게 외부에서이지 내부에서 일어난 것은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한쪽으로 치우친거라 할 수 있으니 내부도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나라는 자아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걸 그냥 자아라고 하지 않고 어떤 경우이냐를 따집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고 할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내가 있고 또 없고를 말하거나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고 실재로도 그렇다고 합니다.

내외를 말하니 이원론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관념이 이런 것을 합쳐진 것이라고 하니 일원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역시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관념이지만 기관념입니다. 관념이기도 아니기도 하니까요 기는 기미라서 그런 기미에 그런 관념 이런 기미에선 이런 관념이라서 그럴 때가 있으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구분하기도 안하기도 하는 것이라서 이러면 삼원론인가요?

그때 그때가 다르니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항상 선택하고 이원론적으로 할 수도 일원론적으로 할 수도 있는 것을 봐야해서 긴장감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게 피곤하죠 그래서 아마 다들 본능적으로 이걸 기피하는지도 모릅니다.

피곤하니 틀린 것이라는 감정이 일어나게 하기 쉬우니까요. 확실한 하나의 기준에 모든 것을 일원화 시키면서 결정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것도 아니랬다가 하면 짜증나겠죠.

이걸 그냥 글로 가볍게 쓰는 듯하지만 이건 상당이 엄중한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관념을 하느냐로 서로간에 의사소통이나 같이 지내거나 대화하거나 행동하거나 뭔가 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고 살아가는 방식을 정하게 되고 주장하는 동기가 되고 인생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나의 유일신이 편하고 하나의 기준이 편하고 갈등이 싫고 정해진 어떤 것을 고집하고 쉽게 판단하고 간단히 결론내는 것을 지향합니다. 선이면 선이고 악이면 악이라고 하는 것이 낫지 한 사람이 또는 한 신이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다는 식이면 이단이라고 몹쓸 놈이라고 하겠죠. 사람 각자가 또 신이 선악이 모두 있다는 것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어요. 대개는 이걸 넘어가지 못하는 관념입니다. 이걸 안다면 이원론이 되겠죠. 두 가지의 다름이 한꺼 번에 뒤섞일 수 있는 것이니까요, 단견이라고 이거나 저걸 잘라서 오직 이거여야 한다. 오직 저거여야 한다고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것인데 대개가 이러니 이게 맞는지 알기도 합니다.(불교에서의 단견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거기에선 이어지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쓰나 봅니다. 영혼이든 업이든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어지면 상견이라고 이것도 우려합니다.) 거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도 있다고 하면 좀 더 어렵죠.

아무튼 이론은 간단하죠 선악이기도 아니기도 하다고 한다는 것인데  여긴 전제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다들 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다는 하는 사람을 믿을 순 없죠. 왜냐하면 이건 개인의 자아나 신념이나 마음이나 영혼이나 이런 근본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무아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선이다 악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거나, 그런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이거나 입니다. 이러면 더 힘들어 합니다. 머리가 이해하는 것은 하겠지만 그런 인생이 되는 것은 못합니다. 이런 경계가 대개의 한계가 됩니다. 이런 고심을 하지 않고 이래야 하는지도 모르니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을 포기 하기 힘든건 어떻게 인간이 신이면서 악마가 되느냐도 되고 착한 사람이냐 아니냐이지 착하면서 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서 그건 영혼이 맑으냐 아니냐이지 맑은데 어둡다고 하면 곤란하다고 하겠죠. 우리가 미워하는 그 친일의 매국노를 미워하지만 그보다 더한 친미의 매국노는 모릅니다. 이런것이 우리의 감정이라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 애매머시기 한 것입니다. 자기가 선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선이 뭔지 말하는 자는 아니고 선이 뭔지 말하는자는 그 말로 의도하는게 뭔지 모르는 것이며 의도하는 것을 안다면 왜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귀하거나 고유하거나 소중하다고 합니다. 마음을 건들리면 화나겠죠.

그런데 그런 마음이 안 고유하고 안 소중하고 그다지 더럽다고 하며 화낼 근거가 불순하니 없다고 하면 인정하기 싫어하겠죠. 그러니 별생각 없이 "난 사람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니 마음이 더럽기도 하다고 한 것이죠. 이걸 또 인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면 그사람은 반발심일거라고 봅니다.

더럽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속마음은 아니라고 하는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런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던가요. 너 더럽다. 너 악하다. 너 잔인하다. 너 나쁘다. 너 최악이다. 너 저질이다. 이런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잇으며 이걸 받아들이는 사람은 왜 받아들이는지 아는지 궁금하고 그것을 논할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분이 나에게 배운 사람이라면 난 이 생에 나와서 한명은 가르쳤다고 할 것입니다.

암튼 솔직히 웃기는 짓이긴 합니다. 이런 말들이요.

마음을 하나의 사물이나 간단한 뭔가나 쉽게 다룰 수 있는 뭔가로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선이거나 악이거나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지부터 말할 수 없고 선악이 뒤섞인다고 해도 이것 역시 마음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은 매한가지 입니다. 이런 것도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까지 하면 머리 돌겠죠. 의미의 상승이 있지만 상승을 거부하는 심리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음을 숨기는 상황이 누가 없을 것이며 가볍더라도 거짓말 안한 사람이 어딨고 사악한 생각, 음흉한 생각 안한 사람이 어딨으며 성욕이 일어나서 이상한 생각 안 했다면 성욕이 없는 사람이니 병원가야 하는 것이니 그런 생각 감정이 있는 것이 오히려 선이기도 하며, 그리고 자기가 선하게 행동해서 오히려 누군가에게 악으로 되기도 합니다. 내가 선하니 남은 악이 되고 내가 선하기 위해 남을 악으로 하며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미 남이 틀리거나 틀린 것을 전제하는 심리이며 그렇게 선이고 순수이고 맞다는 것이 이미 악이고 잔인하며 악랄한 것임을 모르니 더 심한 나쁨이 됩니다. 이런 서로간의 관계에서 자기능력과 상관없이 형성되는 선악의 분배를 모르면 그 지식의 천함이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내가 선한 일을 했다면 누군가는 악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짐을 들어준 것이면 안들어준 사람을 악으로 규정한 것이 됩니다. 규정은 내가 행위한 것과 취한 자리나 짓으로 규정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아는 한계내에서의 선이기 때문에 자기가 한 행동인데 그것에 대한 판단기준의 다양함으로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는데 그 기준을 세우는 것이 시대마다 다르고 장소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달라서 또 사건마다 다르게 될 수도 있어서 여건 마다도 다르고 어떤 의도에 따라서도 다르게 하며 지적인 수준에 따라서도 다르며 그러니 스스로 아는 것에 한계가 있어서 자기는 선한 것이라고 알지만 모르는 곳에선 아니기도 하고, 그런 것을 보면 마음을 선이나 악이나 이런 구분을 하는 그것이 참 고약한 발상입니다.

사실 이런 발상을 하는 종족이 심히 별나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삼원론이 되면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데 안 한다는 것이 결국 자아를 무시하거나 없다고 하거나 근거를 허물거나 다른 것을 대체해서 보거나 이런 것이 되는데 이건 더 어려운 논리 입니다.

무아론이 나온지 2-3천년 되었는데 지금 누가 이걸 알고 있을지요 무아가 아니라 그로인해 더 나아가 할 것이 있는데, 그 다음을 넘어가지 못한 건 무아론을 논하다가 모든 사람들의 수명이 다했고 시대가 달라졌으며 나라가 달라지고 역사가 달라지니 이어지는 도의 흐름이 단절됨을 막을 수가 없어서 입니다.

다들 자기가 아는 듯이 하지만 글쎄요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이미 자아인데 누가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자기가 말하는 것을 보면서, 그 욕망의 근저를 보면서 말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고 과거엔 있긴 했고, 그리고 삼원론이 되면 이미 다원론이 됩니다. 어디에 자아가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걸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아가 없다면 그냥 없다는 것인지 다른 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다른 존재방법을 말하는 것인지 자아에 대한 정의가 달라서인지 자아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요? 이해의 문제인지 인지의 문제인지 행동의 문제인지 인생의 문제인지 수준의 문제인지 차원의 문제인지 어느것으로 문제를 나눌 수 있을지요

내 자아가 지금 어디 있는 것인가?

있다고 생각할 뿐인가?

무아라고 그냥 믿어야 하는 것인가?

사실 이런 고민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뭐라고 따지면 이미 자아가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감정이 일어나면 이미 자아가 돌출하고 있는 것이고 생각이 나오면 자아가 날라다니는 것이죠.

이런 것을 이해하려면 과거엔 참선하고 호흡하고 호수 외우고 사고하고 단련하고 별별걸 다했죠.

지금은 딱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이 미미합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뭔가 배우려는 것이 있긴 하는데 뭘 배우는 것인지를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학원에선 직업을 얻기 위한 것이고 권위를 지키기 위한 학문이라서 강당학문 이상은 어려운 것 같고,

강호에선 나름 뭔가 하려고 시도하는데 여기 저기 다양한 학문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다만 서로간에 자기가 맞다고 하는 것이 있어서 이것도 갈길이 있습니다.

서양철학을 하는 곳에선 동양철학을 무시하는 것은 강호나 학원이나 같죠.

사실 서양철학을 하는 것도 어렵고 동양철학을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나라도 잘하기 위해선 오랜 공부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서로간에 뭐가 학문이고 제대로 하는 것인지가 아직 중구난방이고 기준도 없어서 그냥 자기 잘난거라고 할 뿐입니다. 서양철학도 사고이지 연금술이 빠졌고 동양은 그걸 따라하니 역시나 속민 강정이 되었습니다.

난 자천한다고 하는데 강호에서도 이런 도에 대한 것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수도하는 곳에서 영적인 것으로 혹새무민하는 것이 많아서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뭔가 보고 느끼는 것이 있으면 미친 소리 해대는 곳이어서 내가 봐도 저질입니다.

도덕경이나 불경이나 오감을 넘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상식이고 서양에서도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하는데 우리는 지금 보이거나 느끼는 것에 현혹되어 인간의 지성을 후퇴시키고 있다는 자각조차도 없으니 참으로 한심할 뿐입니다.

수도하는 곳에서 왜 그런 미천한 사고체계가 형성되어 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나도 서구철학을 한다고 이거저거 뒤적이고 동양철학을 한다고 이거저거 뒤적이고 역학이나 심리학이나 물리학이나 경제학이나 이거 저거 뒤적이지만 어느것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할 수준입니다.

어느 것도 전문적이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아는데, 그러면서도 안다는 듯이 떠벌려서 참으로 입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고 해야 해서 뭔가 시도하고 노력하지만 나중에 누군가 이걸 더 잘할 수 있는 분들이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주하나 아는데도 십 여년이 필요합니다.

사주같은 것을 무시하겠지만 과거에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하고 하버드 유학까지 갔다 온 자랑을 하는 유명한 학자분이 동양철학을 한다하니 사람들이 점 봐달라고 한다고 그분을 개무시 하는 듯한, 자기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으로 말하든데 이건 우리나라의 동양철학이나 학문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하나의 단편이었습니다.

퇴계도 주역을 했고 어떤 성리학자가 주역을 안했고 풍수를 모르며 점치는 것을 안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순신은 일기에도 점친 것을 썼는데 그래서 미개하다고 할 것인가요? 그들이 공부하는 동양의 학자중에 점을 안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주자도 점 공부하고 묘자리 잡을 라고 미친듯이 산을 헤맨 놈인데 풍수나 이런 걸 미신 취급하면서도 오히려 그걸 한 사람을 숭상하고 평생 공부하는 이런 일관성 없는 자들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이라서 정말로 억장이 무너집니다.

점을 치든 역학을 하든 철학을 하든 물리학을 하든 경제학을 하든 원하는 성과를 이루고 결과를 내야 하는 것을 해내면 되는 것인데 경제학을 하면서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거나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거나 경제가 안 좋아지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면 그만두거나 스스로 학문에 회의를 느끼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인데, 또는 잘못했다고 사과하던가 자기 학문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거나 그런데 그런 책임을 가지는 학문은 아닌가 봅니다. 그리고 예상한다면서 결국 아무일도 안 일어나는 이상한 예상을 하는 짓도 서슴치 않는데 참으로 별난 학문입니다. 자기들의 이권을 위해 사기치는 짓을 하는데도 그것이 옳은 학문인양하는 것도 어이없기도 합니다. 다른 것들 역시도 서양철학을 하면 그것이 우리나라의 사정과 어떤 연관에서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철학을 무조건 베낄 수 없지 않는가요? 문화가 다르면 다른 것인데 그저 배우고 분석하며 따라하는 짓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의 방법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철학이나 다른 학문은 자기 지식자랑이고 사대하는 짓이라서 어리숙해 보일 뿐이라고 하지만 조선시대부터 하든 짓거리라 그 조상에 그 후손이니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산천(풍수) 하면서 느낀 것 중에 여기 혈쓰면서 대학자 나온자 대단한 인물 나온다 하지만 그저 조선에서 조금 똑똑한 척하는 그 이상은 아닌 것인데 그정도도 대혈인가 하는 한숨이 나온게 많습니다.

그들이 남기 글이나 학문을 봐도 주자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으로선 그다지 쓸모없는 학문인데 뭐가 그리 대단한 학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주자를 넘어가는 혈은 결국 조선엔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한심하죠. 그래서 조선시대에 산천은 결국 매국노를 키우는 죽은 반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내 자랑을 하면 나라를 이곳 저곳 다니면서 이산 저산, 이 도시 저 도시 다니면서, 이 도로 저 도로 다니면서, 이 물 저 물 다니면서 사람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 사람이 세계 최고가 된 게 나오고 있습니다. 땅을 다루는 것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 판을 바꾸고 이끌어가는 최전선에 있는 그것이 나온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누구에게 배워서 점을 무시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학문을 폼잡기 위해서 한 것인지 권력욕을 달랠려고 한 것인지 참으로 한심한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알려는 사람이 그런 편헙한 마음을 가진다면 웃기는 놈인거죠.

공이라서 공도 모르면 서구철학이나 동양철학이나 이미 배운게 없는 것인데 서양철학도 그정돈 기본으로 하고 한 거라서 공이라는 말은 없지만 회의를 하고 인식론을 거치고 현상학을 하며 존재론을 하면서 구조주의가 되고 포스트구조주의가 되어가면 공은 이미 한참을 거쳐와서 진행된 것이 됨을 알아야겠죠.

공을 하는 자들이 다른 학문을 터부시 한다면 이건 배운게 딴 이유가 있는 거지 학문은 아닌거라 봅니다.

이런 것을 모른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우는 과정이니까요.

그런데 실정이 무엇이냐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을 그들이 한다고 그걸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연구해서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고 그후에 그것을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인이 해야 할 것이지 비난하고 무시하며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것을 하는 흐름이 있다면 그것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이미 드러난 것에 대해선 억지로 막는 것은 독재일 뿐입니다. 사실 그전에 지성인은 내가 뭔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싫어하게 된 자기의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이지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을 탓하는 것은 결코 지성인의 자세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래선 갈길이 너무 멈니다. 배울게 너무 많고 할게 너무 많은데 하나라도 제대로 하기엔 너무 힘겨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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