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위적 사고
범위적인 사고라고 또 굳이 뭔가 정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건 개념이라는 단어로 대충 얼버무리며 사용한 것인데 개념이라는 것에 여러 의미가 있어서 막 사용하다 보니 편하긴 한데 좀 더 세분하여 설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되어 억지로 한정을 지어볼 생각입니다.
이런 사고를 해야 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사물이 같기만 하지 이거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나 어려워서입니다.
이거 같고 저거 같지 이거다 하면서 딱 부러지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대강 이런 것이고 대충 그렇고 추상적인 말로 하게 되고 메타적인 것이 되어 명확한 규정은 어렵습니다.
어림이기도 하죠 사물이든 상황이든 어림으로 보는 것이라서 딱 그거다. 그러니까 사과다 누구다 아무개다. 무엇이다라고 하지 않거나 그렇게 이름으로 단어로 말하게 되는 사유나 원인이나 맥락이나 근거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잘 되지 않으면 계제 하락의 되는 원인이 되어서 이것을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공을 지나고 그다음에도 사고는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공을 모르던 시절의 사고를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공이나 무아를 넘어서 사고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 안 하면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어서입니다. 생각이 잡념이 아니라 하나의 생각이 하나의 사태가 되며 그 사태는 세상이 흘러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다만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인데 그 방법이 범위적인 사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거도 아니고 저거도 아니 고식으로 단정 짓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위상을 자꾸 올리면서 사고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도 다 합쳐서 전체적인 사고이거나 포괄적이라고 하거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되는데 그런 것을 범위적인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게 되는 뒷배경이나 심층이나 원인이나 전후 사정을 다 보게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말의 단어가 이런 것이라고 해도 그런 것이 아니라 무엇을 그런 단어로서 말하고자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단어나 그 사물이나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나 그 사물이나 그 사람으로서 진행되는 사건들의 전체적인 범위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범위적 사고입니다.
이런 사고를 하기 위해선 오랜 단련이 필요 합니다. 나도 이걸 하기위해 수년의 훈련이 되어서야 가능했고 이런 설명도 몰라서 혼자 해결해야 하고 모델도 없어서 더 걸리기도 했습니다.
과거 같으면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이렇게 사고한다고 말하는 것이 있을 것도 같은데 논어나 도덕경이나 이런 것에 그 기미가 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고를 하지 못할 경우 계제는 반드시 하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범위적인 사고 같은 것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정해진 것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의 것이지 이거라고 하지는 못하는데 나름의 사고하는 방식이 있지만 그것이 사고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를 띨 수밖에 없고 그 방식이 이거랑 비슷할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사고를 하면 계제가 오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어야지 거기에 맞는 계제가 된다고 하는 것이 남명이 한 말인데(하늘 공부 1) 거기엔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범위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범위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되어 그것이 계제로 번역된 것이 자천의 진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울소를 하라고 하는 것이고 단답형 질문에 답을 안 하려고 하고 내 설명이 상당히 애매한 듯 혼란을 주기도 하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뭔가 질문을 하면 그 배경지식을 설명하다가 끝나게 될 정도로 그 하나의 질문을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답을 하기 위한 다양한 경우의 수나 그런 경우가 가능하게 된 맥락이나 그 맥락들의 배경이나 그런 주변의 것을 설명하다 보면 길어지게 됩니다.
내 행동도 이해 못할 짓을 하는 것도 그럴 것이고요 생각과 행동이 같은 것인데 그런 행동을 못하면서 저런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고 사회적으로 이해된 기준에서의 행동이 아니기도 한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겉으로나 기존의 기준으로는 이런 것인데 이 범위적인 사고로 하면 그게 아닌 전혀 다른 원인과 결과 동기를 가진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선 다른 자천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호흡하라고 닦달하거나 호수 하라고 하지 않거나 뭔가 하라고 하지 않는데 이 사고하는 것은 항상 닦달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난 범위 자천 법만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막말로 당신은 어떤 자천을 권하나?
하면,
범위 자천을 권한다고 하겠지요 말귀 어두운 걸 화낸 적은 있어도 호흡 안 한다고 화내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럼 호흡 같은 것을 안 해도 될까요? 그러니 항상 나에게 칭찬을 못 받는 것입니다. 호흡은 범위 사고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구요? 호수는? 신체단련은? 범위 사고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물에 집중해서 보는 것이 아니니 그 활동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서의 행동이나 의미를 보는 것이니까 인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시공적인 사고이기도 하고 배경적인 사고이기도 하고 전체적이거나 포괄적인 거거나 그런 것인데,
시공적인 것은 예를 들어 나무가 하나 있다면 우린 나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공간적으로 어디 있는 나무인가가 있습니다.
맨땅인가 물가인가 돌무더기인가 산인가 들인가 가로수인가 마당인가 공원인가 어디인가이고 무엇과 함께 있나도 있어서 담벼락과 함께인가 가게 옆인가 방 옆인가 도로 옆인가 물 옆인가 나무들 옆인가 경사진 곳인가 평평한 곳인가 아무것도 없는가 주위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는 것이고 이렇게 어디에 무엇과 어떤 식으로도 있겠죠 작게 크게 옆으로 잘 가꾸고 있나 내동댕이쳐져 있나 홀로 살아가야 하나 잘 자란 것인가 힘들게 자란 것인가 즉 이렇게 저렇게 모든 조건들을 다 따지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것도 있어서 어느 계절을 얼마나 거쳐 왔나 계절 따라 이것이 겪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시기라는 것도 있는데 어떤 시기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625라는 것을 거쳤으면 포탄에 맞아 박살날 수도 있어서 어떤 시기이냐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나무는 그런 사고로 죽을 일이 없죠 궁을 지을라고 벌목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지금은 아무나 자를 수 있고 어떤 개간사업이나 도로사업이나 어떤 이유로 잘릴 수 있는 원인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시공적인 것을 다 보게 되는 것이 범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사물을 사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시공이든 뭐든 뭉텅이로 보는 것이고 여러 조건 들을 감안해서 보게 되는 것이 됩니다. 공이라서 그것을 그것으로 보지 못하니 그것이 되게 하고 있는 조건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라고 했지만 우리가 원하는 나무로 보게 될 때는 언제일까요?
우리가 나무라고 볼 때의 그 나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러 연기적인 것을 복합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사고를 해야 계제가 오르게 되고 오른 후에 유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고를 안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말을 하게 되죠 아직 아니라고요. 그거 아닌데요.라고 하죠
아니라고 하는 게 단정일까요? 그게 아니라고 했으니 그 단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라서이고 또 아직 아니라고 하죠 앞으로 어찌 될진 모르겠다는 것이어서 열어 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문제는 사물 인식이 잘 안될 수도 있습니다.
사물 구분을 잘 안 하니 사물이 안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봐야 한다는 이유가 없으면 안 보이게 되죠
어떤 방에 가보니 선풍기가 있는데 못 봅니다. 내가 더워서 필요로 하기 전엔 선풍기가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강의에서 말했듯이 내가 뭐라 하기 전엔 무화되어 있는 것이라서 모든 게 무입니다.
선풍기를 내가 쓰기 전엔 선풍기가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이유도 없고 사물도 아니고 그것이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풍기가 날개가 하나 부러져 있다면 아니면 선풍기가 특이하게 생긴 모양이라면 이런 식으로 뭔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되어 있으면 무에서 유로 드러나는 그 기미가 일어납니다.
날개가 부러져서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없다고 하거나 바람이 안 일어나 진행이 쉽지 않거나 그런 기미로 작용합니다.
선풍기가 나와 어떤 접속을 그렇게 해갑니다.
이러면 선풍기가 본래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드러나기 전엔 그냥 전체와 일체화되어 있어서 서로 무에 담가져 있는 것이 됩니다. 나도 너도 무화되어 아무것도 아니다입니다.
그러다가 드러나면 그 드러나는 범위를 보게 되는 것이죠
차츰 확장되어가는 그 크기를 보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범위로서 이것을 봐야 하는가입니다.
선풍기가 땀을 식히는 정도의 범위로 사용되고 마는가 아니면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의미로서 기미가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그 범위가 있습니다.
이러면 공간적인 범위와 시간적인 범위와 운 적인 범위가 있게 됩니다.
어떤 범위 일지는 항상 다르니 그때그때 정해가면서 해야 되겠죠.
그래서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움이 많습니다.
상대의 대화의 내용이 어느 범위에서 하는 말인지를 알아내야 나도 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감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게 쉬운 게 아니라서요
게다가 사람들이 범위를 건너뛰거나 유지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범위적인 사고에도 위상이 있어야 하기도 합니다.
이거 말하다가 저거로 넘어가고 또 갑자기 뜬금없는 주제를 말하기도 해서 그런 대화 주제들 간의 비교와 맥락을 찾아서 그 한계성을 보아야 하니까요
어떤 면에서 범위는 한계를 긋는 것이기도 한데 그래서 열어두는 범위가 됩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한계성이 있는 명확한 구획이 있는 것이지만 과천으로 넘어가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획은 되지만 그로 인해 다른 것으로 넘어가거나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게 되는 능동적인 한계성입니다.
그래서 선풍기를 볼 때 선풍기로 보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하게 보게 되는데 그것이 무화되어가서 아무것도 안 보는 것도 된다는 것이 됩니다. 다양하니 아무것도 아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 범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 됩니다. 산풍기가 선풍기로써 활성화될 수 있는 범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엔 선풍기는 무입니다. 선풍기라는 정의는 이런 범위 저런 범위로 드러날 수 있는 무언가 인데, 지금은 무엇으로 드러나고 있는 가를 정하는 것이 범위입니다.
나무라는 예를 보아도 그렇게 시공 운 적인 것으로 보게 되면 나무를 나무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나무는 없게 되는데 모든 나무라는 것은 다른 것이지 같은 것이 없어서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나무라도 두 나무는 다른 이웃이고 그것만으로도 그 두 나무는 다른 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사물에 집중해서 말하거나 사고할 수 없게 됩니다. 나무를 말해도 어떤 하나의 나무를 말하려고 해도 그 나무가 처해진 여건이나 살아온 것이나 앞으로 되어갈 것이나 지금 그 나무라고 해야 하는 이유나 그런 것을 다 살피고 뭐라고 해야 하는 그 범위가 있게 됩니다.
어떤 것도 그것은 없고 범위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