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공을 아남요?

제라울 2020. 9. 12. 13:46

뭐 하던 말이기 때문에 별다를 게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면 읽으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밋밋하게 볼 것인데 그래도 됩니다. 알아가는 것도 인연이고 운이니까요

공부의 초기엔 윤리나 예의나 계율을 따집니다. 이것으로 공부해도 된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이런 것을 버리고 비우고 무상한 것이며 헤어나와야 할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벌써 두 단계를 지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중에 하나라도 등한시하고 공부하면 나중에 그것이 뒷덜미를 잡죠

처음엔 율법을 지키듯이 예의를 가지는 것을 해야 하는 것에서 다시 그러한 것의 해체로 가게 되죠

이런 것에서 벗어나고 버리며 파괴하는 것처럼 과격하게 말하면서 이런 것에 과장과 강조를 하는데 그만큼 이걸 비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과거분들이 이렇게 비우거나 고통이라고 하면서 무상한 것만으로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의 원리를 알라야 하는 것을 그 뒤의 말로 남겨놨는데 이걸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어떤 개념이나 지식이나 사회체계나 감정들을 버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고 불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버리라고 말한다면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겠죠

그것이 자아라는 것이면 그 자아라는 것의 형태나 속성이나 원인이나 변화를 정말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걸 알기위해선 자아를 버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반드시 이걸 거쳐야 합니다.

자아를 버리지 못하면 자아를 알 수 있는 문을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객관적인 관찰대상이 되기위해선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인데 자신이 자신을 거리두기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고 어떻게 해야 그런 것이 되고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래서 얻어내는 것이 뭐고 꼭 그래야 하는 것이고 결과가 어떤 것인지 등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아라고 하는 말만 해주죠 

내가 나를 관찰하는 그러한 대상으로 성립시키면 이미 자아라는 것이 해체된 두개의 상태로 나뉘어집니다.

그 둘 중 어느 것도 자아는 아니고 어느 것도 자아가 되는 그때그때의 편의에 따라 다룰 뿐이게 됩니다.

게다가 이러한 분리되는 것이 좌우 수평적인 대상을 나누는 것도 있지만 수직적으로 위아래로 나뉘어 아래에서 위를 위에서 아래를 관찰대상으로 대하거나 살피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거나 더 깊은 곳에서의 인지를 알게 되면 더 나아가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면 유식이라 하든 본체 개념을 동원해서 뭐라 하든 진여와 생사라는 개념으로 정리하든 그건 마음이지만 기본 원리는 나누어진 자아의 확장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으로 한다거나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나와의 거리 둠이기도 한데 말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해나갈 것은 나의 확장이라서입니다.

내가 우리로 그리고 세상으로 커져가는 것을 하는 것인데 그렇게 커지면 나와 주변은 그중에 하나의 요소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이런 식의 사고를 하기 위해선 나를 위주로 사고하는 그 자아를 해체해서 다시 재구성을 하는데 더 크고 원활하게 성장시켜야 합니다. 얼마나 크게 보고 사는 삶인가가 자천이 되는 관건이 되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공이라고 하지만 공을 하기 위한 또는 해야 하는 대상은 너무도 많습니다.

이걸 한방에 하나의 깨우침으로 해결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뭔가에 습관들이고 이러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한 오랜 과정이 있었는데 이것을 그렇게 한 번의 수월함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니까요

지식 하나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선 그 지식의 원리를 또 비롯하는 방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은 남아선호 사상이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지식이기도 하고 감정을 만드는 체계이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사회적인 또는 하늘이 명령한 것으로 알던 시기도 있었고 그 흔적이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지니 이런 것이 저절로 공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인데 이건 세상이 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 이런 것을 얼마나 철저히 하고 있는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개개인이 이걸 넘기는 대단히 힘든 것이니까요 사회가 달라져서 그런 지식이나 감정이 사라지거나 생기지 않은 것이지 개개인이 이걸 알아서 그렇게 된 건 아니니까요

이런 것을 버리고 넘기 위해선 이런 것이 왜 생겼는지 어떤 과정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로 인해 어떤 피해가 있고 어떤 유익함이 있고 지금은 왜 이런 것이 사라지고 있고 그래서 이것에 대한 판단은 어떨게 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이런 것에 대한 것에서 벗어나야 지식으로든 감정으로든 자기의 명으로든 그와는 다른 존재로서 변해가게 됩니다. 명으로든 이라고 한 건 그런 존재가 되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그것의 지식을 명확히 하고 내가 판단하고 행동해가겠다는 사람로 시작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어떤 것을 어떻게 아느냐로 이후에 어떤 것에 감정을 내어 화를 내든 좋아하든 흥분하든 실증 내든 욕심내든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것에 감정이 동하게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감정이 동하게 하는 지식을 얻어야 그제야 감정은 무엇에 감정을 집중하고 행동을 할지를 결정한 것이 되죠

이러면 나중엔 감정이 먼저 동해 의식은 왜 거기서 감정이 동하는지 모르지만 감정은 이미 동하면서 뭔가를 판단을 이미 하고 있게 됩니다. 물론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이 오랜 익숙함이나 접속한 것이 무엇이냐로 형성되어간 것이라서 지식에 대한 정의도 많이 다르긴 합니다.

남아선호 사상이 그 당시엔 그것이 진리라고 알던 것이고 지금은 그런 것이 맞는다고 보는 세상이 아니라서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도 그대 자신이 맞는다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거기에 예외를 둔다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그대 자신이라는 존재도 그렇게 아는 습관이지 실재라고 하지 않는단 말이죠

자기가 알아낸 지식이나 판단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우선 도달해야 하는 경지가 되죠

그래서 계율에서, 그런 것을 버리는 단계로, 다시 자기의 결정으로 뭔가를 정해 가는 것으로 가면 세 단계가 되겠죠

하지만 자기가 뭔가를 결정하기엔 기준이 불명확합니다.

그 기준을 모두 버리고 해체시켜서 기준이랄 게 없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그 어떤 기준도 그럴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하늘이 시키거나 진리거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외는 그냥 인간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나 사회적인 간섭이고 용도에 의한 것입니다. 하늘이나 진리마저도 인간의 조작이라는 것이니 더 말할 게 없지만요

이런 것은 다들 압니다. 그러면서 막상 현실에 닥치면 집요한 감정의 집착과 성질 부림, 드세고 난삽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론은 상달한 것이라 그럴듯하고 재밌기도 하고 말하기 좋고 그렇지만,

현실은 다르죠 내가 손해 보는 상황이면 화나고 손해 주는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고 내가 맞는다고 하는 것에 딴지 걸면 그 화를 주체할 수 없어서 온몸이 떨립니다.

이런 것을 자주 보는데 어이없죠 

자천을 안 하는 곳에서 이러면 그런가 하겠죠 

그런데 공부하면서 이러면 아직 미숙해서인지 아니면 공부를 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의 괴리를 이해를 못하는 것인지 그게 알다가도 모르겠죠.

 

아무튼 공부의 초기엔 계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이런저런 단계를 거쳐 다시 내가 결정하고 정해가면서 판단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다시 어떤 기준에 의한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남이고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예의를 지켜야하고 바르게 살기위한 노력을 해야합니다. 

강마을이라고 하는 것이긴 한데 강마을로 시작해서 공이었다가 다시 강마을로 존중과 배려 나아가 정의를 기준하고 예를 행하려고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전의 계율이나 예의나 그런 것과 겉으론 같은 것을 행하고 요구하고 그것으로 판단하지만 그 안의 내용은 다른데 왜 그래야 하는지 얼마나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인지 원리는 무엇이고 이런 것을 알고 또 고집하지 않아서 그대로 안 하거나 거부해도 그다지 감정 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맞아서 하는 것도 했으면 하는 것도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내가 보는 것이라서 강요할 수 없고 설득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 번에 안된다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된다고 잘 못된 것은 없고 틀린 것도 아니며 그저 노력을 한 것입니다.

뚜렷하고 확실하게 바람이 나타나고 원하는 대로 다 되고 이러면 좋겠죠 그러길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럴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니까요 

노력했고 현실에선 그들이 원하는 만큼 받아들이거나 내치는 것이고 그것을 바라죠

 

내가 처음엔 사람들에게 처음 것을 건너뛰고 두 번째 것부터 강조하긴 했습니다.

성인들이고 알만한 건 다들 알 것인데 그래서 공을 자각시키고 해체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니 그것으로 보지 말고 하려고 말라고 했는데 효과가 나기도 안나기도 하죠

오로지 하지 말라고 바하을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공이라는 것에 방편이라는 것에 정하는 것이지 정해진 건 아니고 어떤 것도 논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지 진리가 되지 못하고 내가 바라는 것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맞아서는 아니라고 하는 말을 오래 도록 했습니다.

 

예의이고 그것을 비운다음에

다시 예의로 돌아가는 것이죠

예의를 알기도 힘겹고 그걸 비우는 건 생각도 못하겠고

다시 예의라는데 이게 대체 뭔 경지인가 하는 것이 됩니다.

 

선하라고 하더니 선이란게 없다고 각성한다하고

왜 선하지 못하나고 또 그럽니다. 그러면 어디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어렵죠

 

원래 선이면 선

공이면 공

하나만 가르치는데 이걸 다 가르치는 것이면 헷갈립니다.

사람들이 일반화를 하는 것이 버릇이라서 이거래? 거저래?

하면서 하나의 행동을 취할 것을 원하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도 하다보면 규칙이 있어서 닥치는 대로 하지만 나름 방법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죠

게임을 해도 그렇지만 상대따라 행동을 취하지만 그것도 나름 자기 규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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