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여닫기

제라울 2020. 11. 4. 17:31

여닫기

대화하다가 이것을 정리할 필요성도 느끼고 이제 정리할 수 있을 것도 같고 해서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모아두는 것도 되어 적어봅니다.

내가 생각을 자신의 안에서만 하고 외부로 내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도를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인데 사람들의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와 아무렇게나 나돌아 다니는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잘못이냐고 하면 잘못이라고만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냥 그러는 것이고 그렇게 사고하는 것이기도 하고 욕구가 그렇게 되는 것이 다들 하는 것이라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동물도 이런 식으로 사고하고 감정을 가진다고 해야 되겠죠

경험한 바로는 개도 상상을 합니다. 기억을 떠올리고 음미를 하거나 그리워하거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편하다고 나무랄 수가 없어요 본능인데요 발정기 땐 그것도 같이 일어나요

단순한 것으로 끝나긴 하지만 그렇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도 생각을 하지만 그 생각이 논리적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전개하는 것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동물처럼 그저 되는대로 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머리를 발동 걸며 돌아가게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머리를 인위적으로 돌린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이기도 하는 거니까요 머리를 쓰면 졸리거나 지끈거리거나 짜증이 나는 것이 그 거부 현상인데 이걸 넘어가야 되는데 그러긴 쉽지 않죠

하지만 이걸 권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난 너무 대가리를 자꾸 돌려대서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발생해서 괜히 남들도 그럴까 우려스럽긴 합니다.

이런 사고를 하다 보면 난 공간적인 사고라고 하는데 머리 안에서 사고하는 것이지만 우린 다른 것에 빗대어서 또는 기대어서 사고하는 것이 익숙해서 나도 모르게 어떤 공간을 의지해서 사고하는 것이 쉽습니다.

내가 어떤 분을 떠올리면 그분 하고 만나서 대화한 그 카페나 식당을 같이 떠올리면서 하는 게 더 쉽습니다.

그러면 단순히 그 카페를 배경으로만 해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카페가 있는 방향의 그 공간으로 실제로 스윽하고 공간 이동하듯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개는 대충의 그 장소를 떠올리는 정도이지 정말 공간을 일부러 그곳으로 정하고 가면서 사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나 애인관계나 정말 미워하거나 억울한 뭐가 있거나 그러면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엄마가 그 아들이 있는 그 장소를 집중하면서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걱정하면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의 요점은 생각을 할 때 공간상의 좌표가 생각을 수월하게 한다는 것이라서 그것을 나도 모르게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대개는 대충의 방향을 가지기만 하지 정말 그 장소로 이동하듯 하는 경우는 집중해야 하는 어떤 감정적인 동기가 있을 경우겠죠 

애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죠

저도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직장의 어떤 분이 엄마의 방을 들어가는 것을 봤으니까요

이렇게까지 직접 혼의 일부가 나돌아 다니는 것은 그만한 감정적인 격발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하는 것이지만 또 안 해본 사람이 없겠죠 연예인들은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데 그들의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념체들이 들끓을지는 안 봐도 뻔한 것이죠

이렇게 단순히 어떤 기운이나 사념체나 이런 것이 접근하는 것이거나 내가 내보내는 것이거나 정도는 흔한 것이고 아무나 하는 거라서 그런가 하는 것인데 이것이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겠죠

그 대상에게 생각의 교란이나 감정의 혼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반인은 그 피해가 적다고 해야겠죠 그 정도로 민감한 경우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그로 인한 생각이나 감정적인 사건은 일어나는데 그런가 하고 넘어가는 것이죠 생각이나 감정적인 사건 이외에 현실적인 사건이 나오기도 하고 이것이 더 문제일 것이지만 상식적인 이론이 아니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이것도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이죠

발정기의 애완견 때문에 사춘기 때의 여드름이 나고 본인도 이상한 욕구나 나오는데도 다른 이유일 거라고 보거나 다르게 해소하면서 그냥 살죠 하지만 이로 인해 벌어지는 현실에서의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다지 별로인 남자를 이 욕구 때문에 좋게만 보여서 덜컥 혼인할지 모르니까요 ㅋㅋㅋ

그런데 우리 같은 수도나 자천이나 일반인 중에서도 민감한 사람들은 이로 인한 불편을 겪게 됩니다.

불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기하고 뭔가 성취가 있는 거 같고 하면서 즐길 수도 있는 것이고 비위가 특히나 좋다면 남의 생각이나 감정이 들어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고 기이하다면서 재밌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이것이 너무도 힘들다고 합니다. 당연히 힘든 것이고 죽을 듯이 힘들기도 하고 저주스러운 경우도 있습니다. 전 후자 쪽이지만 그런대로 살아는 갑니다.

우선 이런 이유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자신의 머리 안에서나 가슴 안에서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니 그렇고 그 본인 역시도 그렇게 당하기도 하니 그 어려움을 이해한다면 그래야 할 것입니다. 내가 당하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한다면 이미 도와는 상관없는 것이라서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겠죠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런 감정을 사용하는 사람이 견해를 가지는 경우를 본적이 없고 그럴 수가 없어서 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너무도 힘든데 거기에 좀 다른 것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이건 인과관계를 알아보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누군가의 생각으로 내가 살아가는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작은 예이지만 누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있으면 일단 그 감정이 전이해와서 기분이 상하고 토할 것도 같고 신체가 아프고 몸살난 것 같고 이런 것이 있고 거기에 모기라도 와서 물게 됩니다. 좀 더 하면 물건을 떨어뜨려서 발을 다치거나 칼로 손을 베거나 어딘가에 부딪혀서 멍들거나 뭔가에 찔리거나 놀라게 하는 사건들이 주위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의 물건으로 발등을 찍은 것이 큰 일은 아닐 수도 있고 큰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어딜 가야 하는 것에 걸음이 불편해서 같디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운동선수면 실수해서 팀이 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죠 

감정전이로 차를 타면 멀리가 심해지고 두통으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사실 이런 두통은 약으로 안됩니다. 그거보다 두통이 생긴 이유를 알면 사라지는 것이 더 효과가 좋죠 

이런 다양한 사건들이 시건을 초월합니다. 두통 생길 일이 미래의 일인데 미리 와서 아픈 경우가 비일비재하죠 그러면 그 도통 생길 일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는 원인을 알게 되면 사라집니다. 그전엔 두통약을 아무리 먹어도 낫지를 않습니다.

이런 것도 이런 일 때문에 회사에서 일을 실수하거나 어떤 것에 집중이 흐트러져서 실수하거나 가족에게 짜증을 내면서 화나 감정을 풀거나 해소하게 되면 이건 누구 책임일까요 그 원인을 주는 사람이나 사건의 책임인지 내가 제어하지 못한 책임인지 정말 어려운 일들의 연속입니다. 이런 실수를 나도 많이 했으니까요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이런 것으로 대화도 못하고 이런 일을 인정해주는 사람도 없고 혼자 가슴앓이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오해 사고 인간관계가 어그러지고 인생이 어려워지면 그 보상이 있기나 하나요

 

그런데 이런 것 중에 더 어려운 인과는 시간이 지나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단순히 화를 내거나 미워하거나 욕하는 단순 감정은 쉽고 빠르게 사건으로 나오지만 사람의 마음은 복잡해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되면 그 복잡함이 현실에서 다가오는 것이 시일이 걸리고 딱히 이거라고 하기 뭐한 방법으로 옵니다.

그래서 분명 내 인생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무엇이고 무엇 때문이고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애매한 채로 지나가는 것이죠

대개는 이런 것인데 그중에 집중해서 누군가를 생각하거나 자꾸 뭔가를 감정 가지고 생각하면서 오래 하게 되면 그 상대의 인생의 방향이 크게 어긋 나기도 합니다.

그것을 기운이 자꾸 들어오거나 기운이 나거나 기의 교류를 한다거나 준다거나 뺀다거나 이렇게 이해하면 단순하지만 기라는 것이 인생의 흐름이고 그 존재의 결정체인데 그런 것이 교류한다면 인생의 길의 간섭이 일어나고 있어서 그로 인해 달라지는 삶의 결과를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이든 감정이든 하늘의 신령함이든 어떤 기이한 뭔가의 감각이나 느낌이 온 것이든 또는 가게 한 것이든 그것은 현실의 간섭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어떤 결과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못해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모른다고 일어날 것이 안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난 것을 안 일어났다고도 못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이 어딘가에서 다른 현실적인 사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넘어서 일어나는데 이 말은 지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따가 이후에 한참 후에 즉 며칠 후에 몇 주 후에  몇 달 후에 몇 년 후에 몇십 년 후에 일어나면 이걸 누가 알 수 있겠어요 하지만 알 수 있어야 하고 알아야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을 다 알 수 있다면 즉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일이 어딘가에 이런 식으로 나타날 거라는 것을 다 안다면 물론 공부를 깊이 한 것이고 그런 것을 이용해 다른 것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이걸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르쳐도 보았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성과는 없습니다.

이것이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서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행동해서 이런 생각해서 이런 일이 되고 저런 일리 일어나고 이건 쉽습니다. 그 인과를 보는 것이 내가 쓴 글들이 있어서 따라 하기는 쉽습니다. 또 허영을 채워주고 잘난 척을 하게 해주기도 해서 그런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잘 따라 하고 또 그럴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계제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계제가 중요하다고 하면 계제엔 관심 없다거나 회피하는 발언을 합니다. 계제에 자신 없는 사람들이 꼭 계제 무시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듯한 말을 하죠

이미 한계를 심층이 느끼고 있는 것인데 스스로의 관찰이 부족해서 왜 그런 발언을 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미안하지만 계제가 뒷받침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인과 설명은 말만 그럴듯한 공허한 것입니다.

또 정밀하게 말하면 계제가 없다면 자기 사는 생활안에서의 인과라는 것을 우선 이해해야 그다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계제가 오르면 오른 만큼의 영역의 확장을 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게 어려운 부분이라서 자꾸 말하게 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않는 이러한 별난 인과관계를 얼핏 들으면 재미나고 신기하지만 또 한편으론 미친 소리가 됩니다.

그리고 계제  있거나 없거나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의미 부여하는 것과 다른 분들이 의미 부여하는 것이 상상력의 차이이지 그런 것이 누가 맞고 틀린 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넌 아니라고 해도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이지 별다른 근거는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선 시간을 건너서 일어나는 인과를 알아보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걸 해야 세상이나 사회가 돌아가는 맥락을 찾을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인과를 알아야 우린 지식이 생기고 행동하는 기준이 됩니다. 어떤 지식도 결국 인과의 연결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 인과를 어떤 식으로 할지는 스스로의 판단이기도 하고 그런 판단에 책임이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간의 길이를 건널 수 있어야 하고 공간의 떨어짐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신체접촉으로 일어나는 인과만이 아니라 내가 보는 공간에서의 일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의 일, 내가 사는 사회나 나라나 점 점 더 확장해가는 영역에서의 사건들에 내가 어떤 식으로 관여되어가고 인과가 연결되어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알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올해의 부분일식과 누군가들의 죽음 사이에는 인과가 있습니다. 이들 사이엔 시간적인 사이도 있고 공간적인 멀어짐도 있고 사건 사이의 의미 이어 짐의 논리가 없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의 사람에 별들 간의 서로 인연이 있는 것이냐고 하는 황당함도 있을 수 있고 그 사람들이 그리 대단해서 그런 것이냐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징조를 보거나 인과를 연결하는 내 이유가 있는 것이지 정말 그 천체 현상과 그것이 인과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도 되고 실제로 그 사람들과 천체 사이에 인연이 있다고 해도 됩니다.

누구나 별을 보면 자기의 운을 알 수 있기도 하니까요

고등학생이 해무리를 보면서 아무래도 오늘 아빠에게 혼나겠다고 해도 됩니다. 천체 현상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해석입니다.

서로 관계없는 것을 관계있다고 이어지게 하기 위해선 그만한 맥락을 가져야 하고 그것이 있으면 그로 인한 이어짐을 미래에도 가져갈 것이라서 그랬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저 사건이고 천체 현상이고 따로따로이겠죠

이런 따로따로 인 것에 연결을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맥락을 찾은 거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는지를 말하면서 옆으로 샌 듯이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떤 연결 안 되는 것이 연결된다고 보면서 생각하면서 내 생각이 외부로 나가서 그로 인해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 영향이 어디로 어떻게 가고 이후에 어떤 식으로 사건이 일어날지를 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 감정이 그저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나에게 또 남에게 또 인류에 또 세상에 하나의 동기를 주고 영향을 주면서 관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단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하고 있는데 난 보는 것이고 남은 못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것을 연습하면 누구나 해서 정말 자신이 대단한지 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누구나 하는 것이고 알려는 노력이면 또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시공의 역량이 있어서 정말 자신이 한 것이라고 하려면 계제가 있어야 하죠 계제가 있고 업소로 인한 차이는 힘의 차이이고 그 외는 없습니다. 보거나 알거나 그런 건 계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동체시력에 신체의 반응이 따르느냐 아니냐죠 신체가 눈이 본 것을 구현해내는 것이 계제 있음입니다.

 

이런 것이 우선 생각과 감정을 외부로 내보내지  않아야 하는 이유인데

거기에 또 덧붙이면 우린 자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를 보고 자기로서 행동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로서 생각하고 감정을 처리해야 합니다.

이 자기를 구심점을 가지기 위해서 생각과 감정을 보려는 것이고 그것을 보면서 이것을 온전히 내 안에서 내 것으로서 자기만의 것으로서 시작하고 활동하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직 안에서만 일어나고 사그라지게 합니다.

그것이 되면 그때서부터 외부로 나가면서 자기에서 시작한 생각과 감정이 외부로 간섭해 가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에 책임을 지고 의무를 가지는 것을 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감정으로 인해 외부가 영향받는 것을 조심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착하게 살거나 감정을 억누르거나 하는 남이 하라고 해서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나로부터 일어나는 것에 대한 이해와 그로 인해 더 긍정적인 외부로의 확장에 기어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게서 나간 건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할 수 있어야 시공이 확장되어서 내가 발을 건 게 아니고 내가 말한 것도 아닌 것이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문제가 발생하면 내가 책임 있다는 것은 인지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나가서 나간 그것이 어떤 변질을 거치고 왜곡이 되면서 다른 사건으로 일어나고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인지 알 수 있고 그럼으로써 책임의식을 가지며 또 그러므로 인해서 그것을 다른 것이 되어 더 나은 결과가 되고 사회가 되게 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왜곡이 있고 구현되는 과정에서 다른 것의 간섭으로 변질이 됩니다.

그 왜곡이 감당할 만한 수준인지 아닌지 그로 인해 방향이 너무 달라진 건지 아닌지를 알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그다음의 것을 진행할 수 있어서 그러습니다.

책임이 범죄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무엇을 할 것인지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무가 발생합니다.

 

결국 내가 한 것이 어떤 이어짐을 가져가고 어떤 결과를 일어나게 하고 그로인해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가는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감정 가지는 것에 대한 이해가 철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내 안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감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제어할 수 있게 합니다.

무엇이 나가고 무엇이 들어오는지 알면서 해야 할 것을 알고 해도 되는 것을 알며 때론 내가 능동적으로 때론 수동적으로 뭔가를 해가게 됩니다.

 

내가 맘대로 다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생각과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은 많은 사람들의 애씀과 노력에 의해 진행되어 갑니다.

그 애씀과 노력이 무엇인지 모르면 거기에 내가 들어가서 영향 줄 방법은 없습니다.

아는 만큼인데 그건 생각과 감정이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오해한 것이 그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난 물을 생각했는데 불과 연관된 것이면 서로 이어지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알고 이해했느냐로 서로 간의 간섭과 영향의 밀접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난 내가 아는 것에서만 한정해서 뭔가를 의도하려고 하고 행동하려고 합니다.

모든 세상일에 다 할 수 있을 거처럼 할 수는 없죠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에 내가 미칠 영향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에 영향 줄 방법이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말 잘 아는 그것에 한정하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과 그다지 연관성도 없는 것인데 설레발인 경우도 많은데 생각이나 감정이 외부로 나가면 어떻게든 영향이 있을 것이지만 대개는 쓰레기입니다. 그리고 잘해서 영향이 아니라 편승해서이고 간접적이고 대세에 그다지 무의미하거나 작은 영향입니다. 

하려면 잘해야 하고 잘하려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그로 인해 서서히 확장되어가는 그 엄밀한 관계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심층이 합니다. 의식이 하는 것은 결단하고 확인하고 확신을 가지며 대강의 개념을 인지하는 것이며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의 일어 남고 방향을 견지하고 세부적인 사건들의 벌어짐을 관장하는 것은 심층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그건 자기의 심층입니다. 그래서 심층을 다루는 것을 알 수 없으면 역시나 헛수고이거나 애초 뭔가 잘못 아는 경우입니다.

내가 이러해서 이런 행동해서 이런 사건이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거나 나로 인해 누군가나 뭔가에 영향을 준다고 할 경우 그건 의식이 한 것이 아니라 심층이 한 것이라서 이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면 이미 그대와는 상관없거나 있어도 그저 상식적으로 누구나 하는 그런 일이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심층의 작용을 모르는 것은 그저 일반인 같은 현상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심층입니다. 모든 일은 심층이 합니다.

그 심층을 어느 정도라도 다루려면 의식이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욕구와 사고 흐름과 여러 이치들을 이해애야 심층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아는 것이고 그걸 알면 방법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을 내가 아는 이유도 내 심층이 하는 짓을 의식이 관찰해서 알아낸 것이고 이걸 알아내서 내가 의도적인 사건 일어남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글이 전이가 고통스럽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외부나 남탓으로 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서 빌소되는 것을 시작하기 위해 내가 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로인해 심층을 알게 되면서 그것이 외부로 나가는 것과 안나가게 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더 나아가면 나로인한 주위의 인관관계를 다루는 자천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전이를 한번 느끼면 뭐든 남이 날 이렇게 하고 이런 감정 들게 하고 이런 생각하게 한 것이라면서 무엇이든 남이 나에게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이런식으론 객관적이고 냉정한 자기관찰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관찰은 주체를 정하는 것부터 해야 하는데 이미 자신은 아니고 자신은 나쁘지 않고 자신은 상관없다는 예외를 두는 것은 관찰이 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 주체가 분명해야 내가 하ㅏ는 것인지지 외부에서 오는 것인지를 정할 수 있고 이게 정해져야 의미가 맞게 됩니다. 아니면 피해의식이거나 잘난척이 됩니다. 이건 공부를 한참을 더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여닫기의 글의 요지는 내안에서부터 시작하는 그 부분을 먼저 납득해야 하고 그것을 다루어 가는 자신을 보아야 하고 이것으로서 자기관찰력의 힘을 기르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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