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룡경
산줄기가 흘러가는데 히말라야산이나 우리나라의 소백산 줄기나 그런 고산은 산이 진행하는 듯하고 너무 높기도 하고 별다른 머물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자리를 찾으려면 산이 흘러가다가 머무는 듯한 자세를 취할 때이다.
머무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안정적인 지형을 의미하는데 흘러 흘러가는 듯한 산맥이라도 가다가 주춤거리는 듯도 하고 약간 두텁고 주위의 산들이 감싸기도 해서 멈춘 듯한 곳도 있게 되는데 그런 곳이다.
자리를 찾기 위해서 우선 보는 것이 멈추는 듯하는가 이다.
산이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는 것이 산을 멈추는 하나의 방법인데 산이 산을 만나도 멈춘다. 스스로 힘이 다해서 멈출 수도 있다. 또 가다가 다른 산이나 물이나 다양한 서로 간의 조합으로 멈추는 자세를 취하는데 그런 곳을 의미한다.
이때 산이 감싸서 멈추게 되는 경우 그러니까 좌청룡이든 우백호든 이런 것이 세 겹이나 5겹이 감싸면 이곳이 자리가 된다고 책에 쓰여있는데 과거인들이 3,5,7,9라는 홀수를 좋아해서이다. 산봉우리도 3, 5로 좋다 하지 짝수는 그다지 안치는데 편견이다.
두 겹으로 감싸면 권이 되고 한 겹이면 부는 좀 되는 것이다.
이런 산들이 가다가다 산이 낮아지다가 물을 만나면 물에 대드는 것이 아니라 몸을 돌려 갈고리처럼 회전해서 뒤돌아서 멈추게 된다. 이걸 회룡 고조라고 하는데 이러면 안산이 멀리 내가 온 곳 출발한 그 조산(조상산)을 보게 되는데 이럴 경우만 안산이 멀어도 된다고 한다. 그 외는 안산이 바로 앞에 있어야 하는데 멀면 성취에 시간이 걸리고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진룡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다지 신경 쓸 것은 없다고 본다.
진룡이라면서 좌우가 호위하는 산이 있는 것을 찾는데 그런 것은 임금이나 지위가 있는 자들이 사람들에게 호위하며 있는 것이고 권력을 잡고 있는 모습인데 우리 일반인들은 그런 것을 굳이 바랄 것은 없다.
또 그런 것이 아니라도 권력을 잡기도 하는 세상이다. 물 하나 감싸서 지위가 오르고 산하나 이뻐서 오르기도 한다.
그러니 진룡이나 간룡이나 하면서 진가를 구분하는 것은 그다지 신경 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게 하나 내서 먹고사는 것을 충족하면 되고 좀 더 확장해서 부자가 되면 더 좋고라면 이런 진룡 따위 구분할게 아니다. 아무 산이나 감싸주기만 해도 좋고 바람을 막아주기만 해도 좋으며 이런 정도만으로도 부자가 되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다.
그래도 이왕이면 이쁘게 된 산이면 한다. 왜냐하면 이상하게 생긴 산이 부자는 되는데 엿같은 인간이거나 남 등쳐서 돈을 버는 것일 수도 있어서이다.
간룡의 구분은 그래도 하면 산보는 것에 도움이 되고 의미 이해가 되는 것이 있다.
그래서 간룡은 주된 산줄기라고 하면 주된 사회의 위치라고 하는 것이다.
강물이 양쪽에서 따라가는 산줄기나 산들이 양쪽에서 따라가는 산줄기가 간룡이다. 대충 이런 것이면 되고 지나치게 이게 간룡이다 아니다를 구분하려고 애쓸 것은 없다. 비슷하면 비슷한 발응이 있을 것이니 그러면 되지 명확한 구분이라고 응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생긴 산줄기 그대로를 보면서 이해하고 발응 하는 것을 보면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산경표에 의해 각종 정맥들을 구분해서 이름을 지어 놓아서 보기가 좋다. 이걸 기준으로 보면 된다. 이렇게 이미 간룡이 대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간룡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뒷산이나 앞산이 어떤가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나에게 부를 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낮으면 낮아서 그런 방법으로 하면 되고 높으면 높은 방법으로 하면 되는 것이지 꼭 이런 형태이어야 하는 것은 없다.
강물이 길게 길게 오는 것은 그만큼 크고 세력이 있는 땅이기도 하다. 물줄기의 길고 짧음으로 강약을 따지는 것이다.
그 강물이 원기이고 생명수이다. 길수록 저력이 있고 깊은 학문을 가진 사람이거나 자본이 있는 기업이거나 역사가 있는 나라가 된다.
사람이면 학문이 깊거나 자본이 많거나 역사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외 탐할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던가
산에 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강물이 빗물이 시냇물이 기라서 물을 어디로 흐르게 하고 어디에 모이게 하고 얼마나 빨리 흐르게 하고 느리게 흐르게 하고 얼마나 깊고를 주는 것이 산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마을과 도시도 어떤 산맥이 와서 멈춘 것인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간룡일수록 큰 도시이고 지룡일수록 작은 도시이고 이왕이면 관청은 큰 산줄기가 와서 모인 곳에서 하면 좋다.
수구는 산들이나 바위가 막아주는 듯한 자세가 좋은데 수구를 보는 이유는 동하게 해서이다.
물이 나가고 들어오는 관문을 만든 곳이라서 어떻게 들고나고 가 어떻게 사회에 들고나고가 되어 수구가 좁게 되었을수록 중요하게 나가고 중요하게 들어온다. 수구가 넓으면 막 나가고 막 들어와서 제어가 안된다.
그리고 나가면서 산들의 모양이 어떤 신분이나 정체로 나가는가가 된다. 대문을 나가면서 하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지위이다. 그래서 수구의 산이나 형태를 보고 그 안쪽의 상태를 안다.
산들이 그 자리로 와서 낮아지면 숙이는 것이면 좋다. 머리를 들면 대들기도 하는 거라서 이왕이면 숙여주고 엎드리면 편하다고 책에 쓰여있다. 이런 것이 복종을 바라는 심리인데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고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체제라서 그러하다. 지금은 이런 복종적인 인간은 필요 없다.
언제나 창조적이고 다른 것을 할 수 있어야 살아남고 남과는 다른 재능과 기술과 발상을 요구하는 시대에선 이렇게 산줄기가 와서 엎드리고 숙이면서 복종하는 듯한 것보다 특립하고 똑바로 서있고 당당한 형태이어야 한다.
조산처럼 앞에 있는 산이 낮으면 낮은 곳으로 하고 높으면 높은 곳으로 한다.
앞이 너무 높으면 위로 가서 그 높은 것과 높이를 맞추어서 내가 압력을 받는 것처럼 되는 것을 피한다.
너무 앞이 낮은 산이면 내가 낮은 곳으로 가서 그 산하고 높이를 맞추어야 서로 교류가 되는 것이다. 아니면 어긋나는 상황이라서 이룸이 적다.
이게 맞추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조산이나 앞이 너무 높아서 나도 높을 곳으로 가고 싶지만 그런 장소가 나오지 않으면 감수 할 수밖에 없다. 압박을 이기고 일어설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그 압력이 더 오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 그 장소의 의미를 상세히 봐야지 너무 한 두 가지만 보고 아쉬워할 건 없다.
그 자리에 바람이 불면 삭막한 인생이고 물이 없어지는 곳이면 되는 일이 없다.
바람은 살면서 어려움이 처하고 일마다 저항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앉는 자세라도 피하듯이 해서 바람을 이기고 해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물은 이루어진 결과가 잘 나지 않고 뭐든 모이지도 않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니 이럴 경우에도 수구라도 막아서 좁게 해주어야 한다. 땅이 물이 마르더라도 멀리 나가는 수구가 막히면 그런대로 일의 성취는 일어날 것이다. 이것도 안되면 바람이라도 머물게 하면서 대인관계를 추구하고 정신적인 안정을 찾아가야 한다.
전순이 있는데 이건 손오공의 근두운 같다. 묘 앞에서 사람들이 서 있고 절하는 그 장소를 말하는데 그리고 그 밑으로 이중 턱처럼 두툼해지는 것이 있으면 더 좋다. 없으면 절약해서 살고 차근히 모으는 것이면 그런대로 되는 것이니 너무 과욕만 안 부리면 괜찮다.
내가 타고 있는 것이고 방석 같아 내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산줄기에 놓은 곳은 이 전순이 필요한데 그래야 안정적으로 산줄기에 올라타고 있는 듯이 보여서이다.
이런 방석 같은 것을 먼저 펼치고 거기에 앉아야 하는 것이다.
낮은 평원에서는 그다지 불필요하다. 이미 낮아서 그런 위험이나 불안해 보이지 않아서 이다.
산의 등과 얼굴을 구분해야 하는데
산의 앞뒤의 경사를 보고 급경사가 있는 쪽을 등이라고 하고 완만하면 얼굴이라고 한다.
산의 좌우나 앞뒤의 경사도로 보는 것이니 경사가 완만할수록 얼굴이다.
이런 식이다.
숫자가 있는 쪽이 얼굴이다.
그리고 3번은 봉우리가 살짝 3번 쪽으로 수그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다고 대충 보면 그렇게 봉우리가 숙여주는 쪽이 얼굴이라고 한다.
또 다른 방법은 물이 둥글게 감싸주면서 흘러가는 쪽이 얼굴이다.
그런데 막상 산을 보면 좌우나 앞뒤가 비슷하게 경사진 게 있다. 비슷하게 완만하거나 비슷하게 가파르다면 얼굴과 등이 비슷해서 다 얼굴로 보거나 다 등으로 보거나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기울기가 완만하여 얼굴이라고 보았는데
반대쪽 경사가 좀 있는 쪽이 강물이 감싸면서 갈 수도 있다. 이런 경우도 두 방향 다 그에 따른 장소의 대응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실제로 보게 되면 산이 등 쪽이라고 거기를 안 쓰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대표적인데 산의 등 쪽에 우리나라의 최고 수장이 있으니 이걸 보면 등과 얼굴을 구분하지만 등이라고 버리는 것은 아니다.
구분은 할 수 있지만 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다 땅의 형태에 따른 용도나 의미가 있어서 그 의미에 맞으면 취하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산의 등 쪽을 지금 사회는 더 좋아한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종적인 종교나 권위를 좋아하면 그런 곳을 간다. 산의 등이라는 것이 가파르니 그러한 위엄 있고 힘 있어 보이는 형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기가 좋다고 할 수 있고 대기업이나 거대 조직도 그런 산의 등 쪽에 해당하는 위엄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경우 산의 등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가게를 열고 그 대기업의 프랜차이즈를 하게 된다. 바다 건너오듯이 해외 대기업의 프랜차이즈를 낼 경우 산과 가게 중간에 도로가 있게 하거나 조금 떨어져서 산의 위압에 거리 두는 것이다.
그리고 도로가 있다는 것은 묘의 주인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니 도로가 흉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영업하고 살면 된다.
그래서 무조건 산의 얼굴만을 취한다는 식의 과거 이런 책의 말은 그르다고 생각한다. 실재 그런 것이 지켜지지도 않을뿐더러 산을 오해하는 것이다. 즉 땅의 의미를 이해 못한 것이다.
산의 형태에 대한 의미로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지 버리고 말고 할 대상이 아니다.
산이 무서우면 무서운 것과 어떻게 관계하며 내 것을 이루고 살지를 고민하는 것이고 산이 험악하면 역시 그런 험악한 것과 어떻게 관계하고 서로 잘 살 궁리를 하면서 사는 것이다.
청와대가 그런 험하고 등 돌린 산이라서 우리가 그런 것과 살기 위해 해온 과정이 있다. 이것이 잘못이라거나 땅 때문에 망한다거나 하면서 할 말이 아니다. 우린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자기가 살아온 것을 부정하거나 이상한 재단을 하는 것은 교양 없는 짓이다.
그렇게 살아가고 또 그런 삶에서 성취하고 존중하며 인생의 꿈을 꾸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때론 저항이고 질곡이고 극복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잘라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파도 안고 가는 것이 자기 인생이고 자기가 사는 곳에 대한 마음이다. 땅은 함께 할 대상이지 자신의 이득에 따라 재단할 곳이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좌우 전후의 평형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건 설명이 많이 필요하다.
어느 땅이나 장소를 가든 땅은 기울어져 있다. 평평한 곳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물이 흘러갈 방향은 있어야 한다. 아니면 물이 고이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흐르면 왼쪽으로 기운 것이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오른쪽으로 기운 것인데 이러한 기운 방향을 우선 살펴야 한다. 그게 아니라 평평한 곳이면 앞으로 가서 합쳐지면서 앞으로 흐르게 된다.
이렇게 앞에서 합쳐지고 앞으로 흐르게 되면 안산이 없으면 쭉 물이 빠져나가니 그것을 보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1번으로 말하면 그 물이 흐르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산이나 언덕이나 건물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 균형이 맞는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방향과 상반되는 높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이 흘러가는 쪽이 그 땅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그래서 그 낮은 곳을 채워주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건 마당이 기운 것인데 그 기운 것에 반대쪽에 저러한 언덕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도 완전한 평지라서 그다지 기울기가 없는 곳이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 약간의 언덕이나 오르막에 집이 있을 경우 분명 그 땅의 기울기는 있다. 그러면 그 기울기에 보완해주는 상반되는 언덕이나 산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건 수구를 말하는데 저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가 제일 낮은 곳이라서 그 위에 산이 저렇게 솟아야 한다.
그래야 균형이 된다.
이건 물이 빠져나가는 쪽만 산이 둘러쳐지지 않아서 그쪽이 허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균형이 안 맞는 것이다. 그곳을 보완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개울에 다리를 만들고 정승을 만들고 하면서 보완한다.
산이나 물은 내쪽을 감싼 듯이 하는 것이 좋다. 산이 끝이 내쪽으로 살짝만 감싸도 좋고 감싼 듯이 해도 좋은데
이것처럼 산이 감싼 듯하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완전히 구부러져서 감싸면 좋지만 실제로 이런 것도 많다.
이것도 감싼 것이다. 두 번째는 등고선으로 보면 저렇게 보이고 옆에서 보면 저렇게 산의 얼굴 쪽이 내가 있는 쪽으로 향해준 것이다. 바라만 봐도 좋다는 것이다.
책에는 또 암공수의 좋음을 말하는데 물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지만 크게 돌아서 나를 감싸고 있는 길한 물줄기가 더 좋다는 말도 있다.
뒷산 너머에서의 암공수와 안산 너머에서의 암공수든 어디든 암공수는 좋다.
낙동강이 부산에서 안 보이지만 그것 때문에 부산이 그리 발전한 거라고도 하는 식이다.
산이 가다가 멈출 때 이런 경우들이 있다.
1번은 양쪽의 물이 합쳐지면서 산이 멈추게 된 것이고
2번은 물이 돌아 산이 멈춘 것이다.
2번을 회룡고조라고 한다. 용이 돌아서 할아버지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