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살
뭔가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신살이라는 것도 막상 일상에서 사용하려고 하니 참 답답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용의 이해도 그렇고 그것의 적용도 역시 난감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항상 어렵습니다. 그것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은 더욱 그렇죠
육친을 이해하는 것만해도 수년이 걸리는 것인데 이 몇 개 안 되는 것을 알기가 그리도 어려운 이유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나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인데 공 같은 것도 누구나 말하고 이해하는 듯이 하지만 결국 얼마나 깊이 아느냐로 넘어가면 그다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여러 세상의 수도하거나 자천하는 사람들에게서 봅니다.
그래도 육친이나 신살같은 것은 잘 다루고 기이한 경지까지 가는 사람도 있는 거 같습니다.
이건 지식이다보니 이해하고 사용하면서 익숙해지면 되는 것이라서 그렇고
공은 그 사람의 근간이 변형되는 거라서 접근하는 방식의 다름으로 인해 또 다른 곤란함을 동반하는 것이라서 이걸 지식으로 같은 방식으로 공부하려고 접근하면 낭패를 주는 것인데 사실 잘 모르기도 합니다.
일반 지식을 배우는 것과 도를 배운 것엔 전혀 다른 인식의 전환을 해야하지만 누구나 뭔가를 대하고 익히는 수단이 있습니다. 그 수단 자체를 보는 것은 어려워해서 당연히 힘든 것이겠죠
이상한 서론이 길어지는데
신살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신살을 잘 사용하는 것인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도 이런 것을 근래에 들어 공부하고 있는 것이라서 내가 본 것이지 이것이 진리이거나 맞다고 할 것은 아닙니다.
다른 분이 이런 것으로 뭔가를 알고 싶거나 적용하는 것에 필요한 지식으로서의 정보가 되면 좋을 거 같아서 씁니다.
하나의 다른 설명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디서 내가 터득하는 것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서 마음을 열고 여러 설명과 이론을 보다 보면 자기의 길을 찾고 방향을 정하는 것에 이롭기도 합니다.
도닦으면 이런 거 다 저절로 아는 것이 아닌가라고 한다면 글쎄요
이론은 이론이지 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인데 굳이 이런 변명을 할거 없겠죠
신살에 대해서 여러 관점에서 설명을 할 것입니다.
하나의 방향에서만 설명하면 왜 그런지 전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해서입니다.
하나의 신살에 전혀 다른 듯한 의미가 뒤섞이는데 이러면 혼란해요
예를 들어서
천살이 있는데 이게 보충하는 것이고 비워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보충과 비워지는 것이 어떻게 같이 있게 되는 것인가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충이라고 해야 하는 접근 맥락과 비워지게 된다고 말하는 의미 맥락이 있게 됩니다.
그 맥락의 흐름을 알면 그럴 듯한데 그냥 보충과 비워짐이라고 하면 어라!! 하게 되죠
그럼 신살이라는 것이 뭔가 입니다.
이건 띠로 보는 것입니다. 그걸 확장해서 일지로도 보는데 월지나 시지로 봐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할 만큼 이해가 깊어지면입니다. 아니면 혼란하고 난삽한 헛소리가 되기도 하니 일단 띠로 한다고 시작합니다.
그럼 왜 띠로 인가하면,
그건 크기의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엔 시간이 더디 흘렀습니다.
과거라고 지구나 태양이 속도다 다를 것이 없는데 더디 흐른 것이 되는가 하겠는데 사회가 더디 흘러갑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과거시험을 본다면 일단 평생 공부해서 아무 때나 봐서 합격하면 됩니다.
물론 어린 나이에 하면 더욱 좋지요
하지만 그런 경쟁의식이 지금의 입시와는 전혀 다릅니다. 합격만 하면 가문의 영광이라서 그것만으로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맛을 보는 것이니 일생에 어떻게든 하면 되는 것이기도 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천천히 깊이 있게 장기적인 계획으로 공부하면서 자기의 길을 개척해도 되는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일단 양반은 포기가 엄청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처사로 남는다면 선택이지만 대학을 포기하는 것보다도 그 여파는 클 거라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라는 것이 사회가 주는 시간입니다.
사회가 천천히 흘러가니 개인도 그다지 경쟁의식이 강해 지거나 남을 이기고 더 빨리 뭔가 성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띠로 운명이나 환경이나 행동을 보는 것이 지금의 일지도 보는 것만큼 다가오는 결과가 비슷합니다.
그 체감속도가 비슷한 것이죠
그래서 수년에 걸쳐서 뭔가를 이루거나 수십 년에 걸쳐서 하나의 지식 습득이 자랑입니다.
지금은 그러다간 생계유지가 안되어 사회의 패배자가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수년이나 수십 년을 투자하지 않으면 그다지 성과로서의 완성도가 나지 않는 것이 지금도 그러하지 이게 문제입니다. 마음은 급하지만 성과는 과거보다 빨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빨리 결과나 나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개는 이런 것에 매달려서 살게 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지금은 일지로 보면서 감각적인 체감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지만
우리 도 닦는 사람은 년지로 살아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견해를 멀리 깊이 보면서 그 내면과 숨은 의미들을 알려고 한다면 결국 그러한 감각을 습득해야 하는데 그래서 년지로 세상이 변하고 달라지고 결과 나고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보편이 더욱 현실적이라고 했는데
년지가 더욱 보편에 가깝고 그것이 지금은 당장의 현실에 영향을 더욱 주고 있습니다.
내가 임자 생으로 수가 장성입니다. 그래서 수에 해당하는 것을 앞장서고 자신 있을 수 있고 중심을 잡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내 말이 맞거덩~~ 이러고 있죠
일지는 편인인데 화개라서 그런 자신 있는 것 내가 한 말은 내가 책임진다는 식의 개념은 없습니다.
나와 다르게 말하는 자가 누구냐!!!!
이런 의식은 장성이어야 가능하죠
년지이지만 매 순간 이것으로 살고 있습니다. 일지가 하고 있는 것도 일간이 하고 있는 것도 아니죠
다른 것은 몰라도 水이니 도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건방지고 교만해져 가며 말이 많습니다.
장성의 나쁜 점입니다.
그럼 신살이 뭐냐인데
분위기라고도 했었는데 일종의 바람결 같습니다.
그런 바람이 붑니다. 그런 결이 있어서 그 결에 맞추어서 진행되어 갑니다.
그 바람결에 거부하거나 순응하거나 다른 각도를 가지거나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다만 그에따른 저항은 감당해야 하지요
운명은 결정된 것을 말하려고 떠는 것이 아니라 그 결을 알고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물길을 알아야 그걸 타고 원하는 곳으로 가는 배와 같습니다.
우린 운명의 결을 타고 스스로 태어난 것을 성취하려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