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자유의지

제라울 2021. 10. 10. 12:56

이 글은 상당히 장황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주제 역시 어려우니까요

어려울 이유는 없는데 사람들은 이걸 어려워해요 내가 보기엔 미련인 거 같은데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도 같구요

미련이라고 하는 이유는 정해져 있어도 아쉽고 정해지지 않아도 아쉬운 것이 되어서라고 봐요 그러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기 생각을 바꾸지도 못하고 그런 상태로 살뿐 별다른 의견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고딩시절 친구가 "운명이 정해진 거라고 보냐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난 "정해진 것도 아닌 것도 있다고 본다" 하니 구태스런 대답이라면서 흘려 넘기더군요

왜 그렇게 보는지 설명을 하기엔 돌아오는 반응이 들을 맘이 없어 보여 그냥 넘어간 기억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설득당하는 것도 기분 별로인 거고 그냥 물은거지 딱히 뭘 알거라고 보고 물은건 아니기도 하고 누가 이걸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학창 시절의 개똥철학으로 치부 하거나 단순 의문이나 호기심으로 듣고 마는 것이기도 하죠

 

지금 이런 질문을 들으면 어떤 대답을 할지 생각해보면 답답한 건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설명이 쉬운 것도 아닌데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이 그다지 마음을 열고 듣지도 않을 것이고 대개 사람들은 운명이 정해졌거나 아니거나 하나를 생각하곤 있지만 그다지 깊은 생각은 없어서 대답할수록 더 답답하겠죠

한 평생을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보지만 그 안에 어떤 섭리나 원리가 작용하는지 별다른 성찰은 없습니다.

정해진 운명을 산 건지 정해가고 있었는지 나름의 논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합리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조차 왜 그래야 하냐고 의문을 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을 하기 전에 사람들은 생각을 이미 하고 있을 것인데

운명은 정해졌다거나 아니거나 어느 한쪽을요 고딩때의 나처럼 그런 것도 아닌 것도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지만요

그럼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그걸 알아야 합니다.

운명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걸까요?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사람이야 당연한 걸 묻는다고 할지 모릅니다. 이런 경운 사고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제쳐두고 어쩌면 돈 많고 아쉬우게 없이 사는 사람은 운명이 정해져 있든 없든 별 관심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좋긴 하죠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심정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는 게 내 운명이다라고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겁니다.

돈이 있어 아쉬운게 없다면 당연히 그냥 사는 거지 운명을 논할 이유조차 없습니다.

종교적인 고민을 한다고 신이 정해준 거라고 난 돈 있고 힘 있게 살게 한 거라고 우월감을 느끼면서 살지도 모르지만요 난 있는게 운명이고 넌 없는게 운명이다라면서 살겠죠

이러면 돈 없으면 더 비참한데 이렇게 하찮게 살게 신이 정해준 건가 하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보게 되겠죠

그러니 인생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본 사람들이 대개 이런 경우입니다. 현실이 힘들고 처지가 별로이니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거죠

그리고 다른 것도 있는데 위의 것은 지금의 현실이고 우리의 심층은 미래나 인생 전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애초에 던져진 인생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두 가지가 다 영향을 미친 사고 결과일 것입니다.

던져진 인생이란 사람들이 시간적인 순서로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 인생이 태어나는 순간 죽음까지의 긴 서사가 한꺼번에 내던져진 것이고 그것을 풀어가고 순서적으로 나열되어가는 것이 인생을 사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을 던져진 거라고 한 것입니다.

우린 지금이기도 뭉텅이이기도 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인생 전체를 한 뭉텅이라고 하는거죠 이런 지금과 뭉텅이도 정해진 것이기도 아니기도 하다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뭉텅이로 보면 정해진거라고 한 것이니까요)

<시간이 없다면> 이라는 생각을 가끔 할 것인데 시간이 없을 순 없고 약해진다면 내 인생 전반의 정보라고 할지 살아가며 경험할 것들을 한 순간에 인식되면 머리가 터져버리거나 힘겨워할 것인데 사후에 살아온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시간적으로 인지하는 습관이 사후에도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시 습관이 무섭습니다.

다시말해 심층에 우리 인생 전체가 뭉쳐져 있습니다. 그것이 풀어지면서 우리가 감각해가는 과정이 인생인거죠 그래서 시간을 넘어 자기 삶의 전반적인 상황을 아는 심층이 주는 영향에 의식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도 자기 관찰을 통해서 알아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를 모르는 것인데 이건 도공부에 기초를 모르는 것이 되어 엉성하게 됩니다.(대강 이렇고 각자가 자기만의 인생차이로 인해 어떤 생각을 결정하는지 살피는 건 알아서 해야죠)

 

생각의 유래를 아는 것이 시작이고 언제나 해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어떤 생각을 하게 된 거라면 왜 굳이 그 결론인가라는 유래를 알아야 합니다.

즉 이미 우리의 심층은 인생 전반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 어떤 인생을 살지가 있죠 그걸 의식은 느낄 순 있지만 곡해를 통해야 합니다. 인생의 전체를 의식의 언어라는 인지방법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데 그걸 하려면 그만한 곡해를 거쳐야 하니까요

우린 일기를 시간에 따라 쓰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우리의 하루가 시간순서에 따라의미가 정해지던가요?

이렇게 알아서 역사도 시간대에 따라 적어놓고 역사라고 하는 등신들만 있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엔 메타역사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시도를 아주 조금 해보려는 삼국유사는 정사로 인정하지 않고 싶어하니까요 삼국유사가 역사가 아니라 역사철학이라는 개념도 없는거 같긴 합니다. 대놓고 역사철학이라는 또는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연구나 왜 역사가 가능한지 왜 그런 역사가 되었는지 원리, 원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한 해설을 하려는 시도를 안하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는 사고를 할 수 있을 능력이 없었나 봅니다. 

아무튼 심층은 그런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걸 의식이 모르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련하게 알고 느낌으로도 약한 것이고 또 의미에 대한 이해가 안되어서 모르는 것으로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고형태를 만드는 동기로서 은근히 있는 것이라 그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 그 심층의 또 인생의 전반적인 의미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과 대화할 때 이걸 보게 됩니다. 상대의 심층을요

상대방이 어떤 문장을 쓰게 되면 그 문장을 쓰게 되는 거대한 빙산의 숨은 체계를 보게 되는거죠

그래서 운명이 정해진게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하게 되는 체계를 보게 되는 것이죠

즉 한마디의 말은 말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입니다. 그 상대의 체계를 알아볼 수 있으려고 노력해가야 합니다. 물론 자기부터이지만요 내가 왜 이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그것에 대한 맥락을 찾을 수 있어야 하죠

그래서 정리하면 두 가지를 말한 것인데 지금의 현실에 처한 것과 각자의 인생전반이 주는 내면의 욕구가 그렇게 말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게 전부는 아니고 이거부터 알아가는 것이죠

상대가 무엇 때문에 그런말하는가를 알려고 할때요

알 필요는 대개 없지만요 ㅎㅎ

어떻게 살아와서 어떻게 살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집하고 있다면 그사람은 자기 삶이나 감정이나 생각을 객관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객관화를 하려고 제3의 눈이고 관조자고 의식분리이고 유체이탈이고 초월이라고 하는 말들을 써가면서 말하지만 글쎄요 알고 있었나요?

죽기보다 힘들겁니다. 요즘 정치성향을 드러내는 분들을 보면 참 하찮죠 이런 것도 하지 못하는 것들이 나라나 정치나 뭔가 아는 듯이 떠들고 있으니까요 자기의 감정 그것을 객관화 하는 것이 그리 힘든가?

 

그다음 정해진 게 뭔지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면 너무도 많은 것들이 이미 정해진 것이고 규칙적이기도 하고 법칙이 있습니다.

지구의 자전, 공전, 사계절, 하늘, 땅, 날씨들, 이런 자연이나 사회를 보면 사회의 구조나 성격이나 하다못해 내 신체의 성이나 체질도 정해져 있습니다. 이걸 내 임의로 바꾸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내 자유의지로 한건 아니니까요(일단은 이렇다고 말하고)

도대체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뭘 말하는 건지부터 헷갈립니다. 그런 것이 있긴 한가?

가끔 날씨를 바꾼다고 하는 초월 능력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있는데 사실 이 말도 대가리 나쁜 소리라 그냥 농담으로 하는 거지 진짜는 아닙니다.

아니라기보다 그걸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보듬산(등산)을 해야 하는데 비가 와서 비를 하산할 때까지 못 오게 한 것이라면 날씨를 바꾼 것이라고 말할 순 있지만 말 그대로는 아닙니다. 내가 비를 맞을 이유가 있느냐 없느냐이고 또 그전에 비를 맞든 아니든 비가 오는 상황이 되었느냐가 됩니다. 날씨를 바꾸든 말든 그래서 비를 맞든 아니든 어떤 사건의 진행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경험상 비를 안 맞을 순 있었는데 그 비의 의미가 없어지진 않았습니다. 또 없어지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날씨를 바꾼다고 말하는게 너무 유치한 것이 됩니다. 겨우 그런 정도만 보는 안목이라는 것이 되니까요 의미이어짐과 맥락을 보지 못하는 거죠 비안맞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비로인해 일어나는 사건맥락과 미래의 의미가 더 중요하잖아요

 

비를 안 맞아서 바꾼 운명은 있지만 그게 "그래 넌 어찌 되었든 마음 편히 니 갈길을 가는구나" 하는 비난이 된 운명이 될 뿐이었습니다.(매번 이런 의미가 아니라 경험상 그전에 그런 적이 있다는 것이죠)

올해도 비를 맞았고 이로 인해 어떤 결과가 올지 알았는데도 그냥 가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의 사건은 참담했는데 이건 바꾸어선 안 되는 것이라 알면서도 비를 맞아야 하는 그날의 그 장소의 멈칫거리는 내 의식을 무시하는 심층을 보는 그 시기를 기억합니다.

어찌 보면 뭔가 바꾸긴 했습니다. 다만 그 바꿈이 긍정적이냐 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고요

바꾸더라도 한계는 있고 한계 넘어 바꾸어 가려면 다른 방식이 필요한 것이겠죠 어떤 대세의 흐름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죠 가속이 붙었거나 거스를수 없는 흐름이 된건 바꾸지 못합니다. 그건 그것이 대세가 되기 전에 해야 하죠 운명을 바꾸는 것도 시기가 있다는 것이 되죠 이걸 알아야 바꾸지만 선택의 갈림에서 판단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아까 말한대로 의식이 이거 아닌데 하는 것을 알더라도 그것이 이미 때가 늦은 것을 이해한다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그때도 억지로 뭘 하고 뭔가 다르게 해보려고 행동할 순 있습니다. 그러면 또 아까 말했듯이 작은 변화라도 가능하겠죠 아님 거대한 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요 그리고 그 대가는 다시 다르게 돌아오게 되죠 이거 막으려다가 저게 터져가는 것입니다. 난 편할 순 있습니다. 싹싹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하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겠죠 그래서 운명을 바꾼다면 혼자만의 의미일땐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만 다른 사람이나 사건이나 의미가 확장되고 사회로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그만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웬만하면 비 오면 맞고 아니면 말고 날씨든 뭐든 인위적으로 뭔가를 바꾸어서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안 합니다.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행동습관인데 가끔 엄하게 해보려 한 것이 아주 없진 않았다는 것이고 그 결과가 꼭 좋으냐는 것은 또 다른 것이고 그래서 바꾼 것이냐고 말하는 것이 너무 단순한 발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수확이면 수확이겠죠

(언젠가 누군가가 나에게 왜 정명돌파만 하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건 비를 맞는다는 것이 되죠 비오면 맞지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두번 오지 못하게 한 경우가 있는데 그건 나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있을때 였습니다. 비가 온다고 우산안쓰고 맞는 것은 아니고 우산이 매일 가져가고 가방에 무조건 넣어 놨습니다. 벌건 대낮 이어도 아무리 맑아도 가방에 넣고 다닙니다. 그래도 비를 맞아야 할 경우 그 우산도 없더군요 그냥 넣어 둔 가방이 마침 없는 상황이 되죠 도둑 맞을려면 개도 안짓는다는 그런 것입니다. 그 상황이 되면 아무리 준비해도 어절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래도 열심히 준비합니다. 노력은 계속되어야죠 어떻게든 더 나은 상황이 되게 하기위해 노심초사하며 준비하고 조심합니다. 이건 운명을 바구기 위해서고 이런 의지가 마구하면서 더 나은 세상이 되게 하려는 의지로 나아갑니다. 노력했는데 조심해가면서 왔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차이를 만들고 다른 운명으로 가는 것이지 생각없이 살다가 그냥 벌어지는 것에 별다른 의미도없는 인생일 뿐이게 됩니다.)

 

초월 능력을 거부하는 것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려는 나약한 마음의 감정이 스스로 자천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초월되면 뒷감당을 원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내 문제가 남에게 넘어가는 것도 있어서 그게 더 싫기도 합니다. 이타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거 외에 자유의지이기 때문입니다.

내 문제가 내안에서 해결되면 내 의지로 좌우하는 것인데 그것이 남에게까지 가거나 남과 함께 뭔가 해야 하거나 하면 내 자유의지는 그만큼 적어지고 남이나 외부의 영향이 있어야 하는 것이 되어서 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내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직접 얻었거나 바꾸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이 좋든 나쁘든 간다면 이것도 역시 남이 내가 운명을 변화하는 것을 도운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한게 아니라 그 사람이 해준것이 되는 이상한 의미가 되버리죠 이러면 내 자유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할 수가 없고 남의 의사를 봐야 하고 남의 도움을 기대해야 하는 것이 되니까요 이런 운명이 되어간다는 거죠 인과도 만들어지고요 이건 운명을 이상하게 꼬이게 한 것이죠 자유로움이 아니라 더 복잡하게가 됩니다.

 

자유로울려면 자유롭지 않게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넘어가야 하는데 일단 내건 내가 해야 그것이 나중에 내 의지로 결정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 있어서 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내가 하거나 내가 해결하거나식으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할 것과 남이 할 것과 남에게 의지해서 할 것과 함께 할 것과 이런 것들을 헤아려보고 한다는 것입ㄴ니다. 무조건 이래야 한다는식의 고집이 있으면 일단 내 이야기는 곡해가 되는 것이니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초월이나 뭔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할 때입니다.

 

무조건 운명이란 바꿀 수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을 말할 순 없는데 이런 논리를 해버리면 대개는 골치 아파서 안 듣습니다. 그냥 정해진 거냐 아니냐 하는 단순한 결론을 바라죠 인생에서 그렇게 간단한 결론은 없는데도 그걸 알면서도 또 그걸 바라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이러면 대화도 설명도 안됩니다. 또 제끼죠

태어나면 부모의 환경이 있습니다.

부자이면 난 가난하게 되든 유지하든 그런 인생이 이미 정해지고,

가난한 부모이면 자수성가하든 더 부자가 되든 아니면 유지이든 이런 것은 태어나는 순간 정해진 것이 됩니다.

벗어날 방향 자체가 없습니다. 부자가 되냐 아니냐 하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서 더 부자 되든 아니든이 되어서 좀 다른 관점이니까요

아마 이런식의 비교는 좀 생소할 것인데 어떤 관점으로 볼지는 어떤 관점을 만들어서 보느냐가 되어서 입니다.

자기가 볼 관점을 스스로 만들어서 세상을 비교분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야 정말 자유의지가 가능합니다. 남들 기준이 아닌 내 기준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기준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되고 그 기준을 자유롭게 만들고 바꾸고 전환하면서 다양한 관점으로 자기판단을 할 수 있게 되구요

 

흔한 관점은 흔하게 쓰는 거고 다른 관점이 있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보는냐는 보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지 남이나 외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정해진거냐 아니냐인데 정해진 것을 싫어하면서도 남이 정해준 기준이나 의미로만 보는 또 어설픈 인간들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내가 부자 되는 것이 정해졌냐 아니냐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부모와의 비교에서라면 이미 저렇게 정해진 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날려면 기준 즉, 관점을 벗어나면 됩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되죠 난 돈에 관심없어서 도닦는 인생이라고 하면 다른거죠 부모보다 잘산다 아니다가 아니라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부모보다 더 깨우쳤냐 아니냐도 가능한거라서 또 복잡합니다.

난 어릴때 부모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 것인데 성공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습니다. 관점에 따라 성공한 것이 있고 없고 하죠

 

아무튼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태생을 바꾸지 않는 한 이건 불변이죠 

이런 식으로 하면 바꿀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요

이미 태어난 순간 체질이 정해져서 일할 수 있거나 없거나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머리 나쁘거나 말거나 체력이 좋거나 말거나 거기에 남들 보다 낫냐 아니냐가 또 있어서 이건 역시 정해집니다.

정해진 걸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외부가 다 정해진 것이니까요

그럼 정해지지 않는 것은 어떻게 찾을까요 뭐가 있죠? 아까 말하듯이 우리가 보는 관점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해진 것처럼 사니 대개의 사람은 이것도 정해져 있습니다. 저처럼 관점을 자유롭게 바꾸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본적이 없어서 그냥 생각도 정해진거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내가 명리학을 공부하니 정해진 운명을 알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라는 것을 모르면 이리됩니다. 같음에서 다름을 본다는 식의 관용어를 모르진 않을 것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뭐지 알면 또 그러지 않을 것인데도 그래서 너무 안일한 공부한다고 나에게 혼나죠

정해진 운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은 것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해진 것에서 어떤 간극을 보는 거죠 차이이고 다름이고 그 틈요

분명 세상은 정해진 것으로 보기가 더 쉽습니다.

운명을 개척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있지만 뭘 개척하거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개척했다고 하는 그것이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면 이걸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여행 가는 거나 아이스크림 먹을지 밥 먹을지 결정하는 거나 이 옷 입을지 저 옷 입을지 사업할지 말지 이런 일상의 결정을 해가면서 자기가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이런 지능도 제낍니다.

고딩이라면 이런 사고를 하는 것도 봐줄 만한데 나이 들어서도 이런 단순한 사고에서 머문다면 실망이죠 더더군다나 광룡정에선 더욱 더요 아무리 내가 고민해서 선택한 것이나 아무리 뼈빠지게 노력해서 이룬 성취라고 해도 이미 그렇게 하게 되었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현실엔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있고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안되는게 있고 넘어갈 수 없는 벽은 항상 있습니다.

이걸 모르는 어리숙함으로 뭔가 사고한다고 대화 시도하면 안 되는 것이겠죠

정해진 것을 인정하고 정해지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고 그래야 정해지는 방법에서 정해져 가는 원리로 다르게 정해가게 하는 것을 찾는 것이죠 정해진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다음으로의 진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해졌다고 하면 이미 그것으로 끝이라고 여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세상은 변합니다.

이 변화를 알면서도 이런 정해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긴 합니다.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고 그것이 영원불멸하는 것은 아닌데 왜 두려운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들은 영원히 정해지길 바라고 그러려고 온갖 수단을 찾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되는 것은 아닐 건데요 자기가 보는 시공간 내에서의 정해짐인데 어거지는 어거지이고 결국 변합니다.

그래서 정해진다고 말할때 정해져서 그게 끝이라고 하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있고,

그게 아니라 정해진건 정해진 것인데 그렇다고 끝이 아니라 그것도 결국은 다른 것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아니면 무조건 안정해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죠 이런 사람도 별생각 없는 사람입니다. 딱히 이유를 알아서가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피해의식이겠죠

또는 다만 그 시간이 문제거나 변하게 하는 방법의 어려움이나 될지 안될지 모르겠어서이거나 하는 조건이 붙을 때 입니다.

즉 정해진거다 아니다라고하는 단순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그다음의 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정해진게 아니다 정해진거다라는 사고를 하는 경우면 이것도 제낍니다.

 

자유의지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무엇에?

라는 질문도 해야 합니다. 대개는 자유의지를 들이댈 수가 없습니다.

우린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내가 자유로운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을 했나요?

자유의지를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그런 논의조차 없습니다. 그저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만 따지는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멈추죠

자유의지가 있어도 노력해야 하고 없다면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내가 자유롭게 뭔가를 결정하려고 한다면 정말 내가 지금 자유롭게 된 것인지를 일단 봐야 합니다.

내가 커피냐 녹차냐를 결정한다면 누구나 알 듯이 난 커피라는 것을 선택할 거라고 알 것입니다.(내가 커피 중독인걸 다들 알 것이니)

내가 커피를 마시면 마실수록 녹차에 대한 자유의지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녹차를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적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걸 선택할 수 있고 없고 하는 그런 감정적인 신체적인 습관이 어떻게 들어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자기 관찰이죠 내가 점점 자유로운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을 보죠

사회에 세상에 길들여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들여져 있어서 다른 판단이나 생각을 못하게 된 이데올로기도 봐야 합니다. 내가 가진 관념 형태를 볼 수 있어야 내가 어떤 것에 자유롭고 아니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자유의지를 논할 수 있습니다.

그냥 자유의지가 있다 없다가 아닌 것입니다.

쫌!!

단순한 사고를 헤어나시길 바랍니다. 

외계인과 대화하거나 신과 대화해서 책을 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선이나 악이나 빛이나 어둠이나 이러면서 말하면 "참 열심히 산다"라고 말하고 싶게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고딩 수준인데 그러고 놀고 있나

저런 말들이 뭔가 고차원적인 말처럼 들리거나 대단한 것으로 아니 그런말을 하면서 놀고 있는 거죠

저게 얼마나 하찮고 질 떨어지는 말인지 알면 부끄러워서 낮을 들수가 없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비웃습니다. 그런 사고정도론 신이나 외계인이라고 말하지 말라고요 지능이 너무 떨어지자나 내가 저런 말을 하면 신이 얼마나 같잖게 보면서 비웃음을 흘리는지 아나? 촴나

이원론도 아니고 일원론도 아니고 뭐라해야하나 하나이면서 그것이 나아가는 중인 것을 말하는 단어가 있나? 태역? 혼원일기? 훔 모르것네 암튼 어떤 규정된 단어나 개념이나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규정해야 하는 이유가 주어지면 그때서야 대강한다는 것을 알아야 일단 대화가 된다고요

 

말에는 그렇게 말하게 하는 자유의지가 없거나 있거나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자유롭지 않아요 하던 말을 또 할 뿐이고 하던 행동을 또 할 뿐이고 그렇죠

왜요? 자유가 없습니다. 그와는 다른 말을 할 자유요 자기가 말을 맘대로 하고 있고 자유가 있다고 한다면 참으로 멍청하다고 하겠죠 어제와 다르게 말한 것이 뭐가 있는지 알기는 할까요? 

자기가 어떤 개념을 매일 욕구하는지 알기는 할까요?

내가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전에 한 말을 또해요 달을 지나고 년을 지나서 만나도 예전에 말한 그걸 또 말해요

이런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것에 차이를 둔게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죠 나도 같은 말을 하는데 어떤부분에서 차이를 만들어 다르게 말하는지 모르죠 자기가 한말을 또하는 사람들은 듣는 것도 같은 것을 듣지 다른 것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말한 것을 다시 듣는거니까요 말한 만큼 듣는 것이고 말하는 수준에 맞게만 듣는 것이고요

이러는데도 자기가 말하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보면 난 정말 미치도록 웃게 됩니다. 내가 젤 힘들어하는 것이 한걸 또하는 것인데 그런걸 하도 봐와서 만남을 안하는 것도 되는데 그러면서 자유의지가 있다거나 정해진게 싫다고 말하면 이건 아니지 누굴 속터져 죽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자기가 어떤 자유가 있고 없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할 자유는 있는데 저걸 말할 자유는 없구나 하죠 그리고 없게 된 원인도 알아야 합니다. 있는 원인 없는 원인을 알아야 하죠

나도 내가 글쓰는 방법을 보면서 이렇게만 쓸 수 있구나 다른 방식으로 글쓰기가 안되는구나 하는 내 규칙성이나 틀을 보게 되죠

 

자유의지를 말하게 되면

이세상이 자유의지가 허용된건가 세상의 정해진 법칙중에 하나인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또 역설이 됩니다. 자유의지가 정해진 것이면 이게 자유의지인가 아닌가

그래서 앞에서 말한 것인데 자유의지가 되려면 노력해야 하는 것이죠

자유의지가 사람마다 다르고 그 크기와 정도가 다르고 종류도 다르고 기간도 다르고 다르다는 것이죠

그냥 단순하게 내가 자유의지가 있어 없어 하는 질문이나 

그래서 내가 성공하는 것이 정해진거야 아냐 하는 정도의 사고만을 원한다면 이런 사람은 이 글을 안읽을거니 별로 신경쓸건 없겠죠 이런 분들은 이런 골치아픈 말들은 변명이고 핑계고 모른다는 거자나 하는 식의 단순한 상식만을 아는 정도일꺼나까요

내가 녹차를 선택할 자유를 가질려면 녹차를 자주 마시거나 커피를 줄이거나 둘다 하거나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느냐도 있습니다. 

억지로 녹차 마시거나 억지로 커피 참는 거냐 아니면 녹차를 마시는 환경에 처하게 하냐 커피 못마시는 환경에 처하냐하는 것도 있고요 능동적인 방법과 부정적인 방법이라는 큰 갈림이 있을 수 있고 그 방법상으로 세세한 것은 엄청 다르게 할 순 있겠죠

내가 성공하려면 성공하게 되는 운명이 되게 하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죠

성공할 수 없는 운명이면 그럼에도 성공하게 하게 하기위해선 더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고 다른 것을 모색하거나 다른 성공을 하려고 하거나 그런 선택을 해야 하고요

즉 정해진걸 알아야 정해지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고 방법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뭐가 정해진건지 모르면 뭘 정해지지 않게 하느냐는 질문이 사라집니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은 정해진 법칙이죠 누가 정햇는지가 아니라 애초 우주구조자체가 그렇습니다. 소립자든 거대우주론이든 거기엔 자유의지가 있는데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불확정성이든 불완전성이든 그런 것이 자유의지의 다른 모습입니다.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으니까요 지구도 일년이 365일이 딱떨어지지 않아요 달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고 뭐든 딱 맞는게 하나도 없죠 그게 자유로움을 만들어요 불완전함에서 오히려 완전함을 보게 된다고 할 수 있죠 이런식으로 자유는 정해진 것입니다. 다만 그 자유를 어떻게 얼마나 어떤 것을 할지는 정해지지 않았고 그것을 근거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고 의지가 됩니다. 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그대의 자유의지이지만 쉽게는 못하겠죠 그대가 이 글을 이해할 자유가 그리 많지 않을거니까요 자유는 있지만 그 크기나 깊이는 모두가 다릅니다.

 

세상의 법칙이라는 것도 정도차가 있고 장소성이 있는 것이라서 여기선 법칙인데 저기선 아니고 어느정도의 법칙이고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절대성이 없으니 자유의지든 법칙이든 어떤 법칙 어떤 자유의지라는 구분이 명확해야 합니다.

그냥 헷갈리면서 말해선 안되는데 사실 이건 구분도 아무도 안하니 설명이 더 어렵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에겐 나와는 다른 세계관이 있으니까요 세계관이 다르면 대화가 근원적으로 안되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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