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현실인지

제라울 2022. 7. 14. 16:49

현실에서 살면서 허무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세상이나 삶에 의구심에 들지 않아 봤다면 그 둔한 감성에 경의를 표하겠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만 앞으로 들 의문과 허무와 염세적인 감정에 미리 유감을 남겨주겠다.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있다고 이런저런 이론과 논설을 말한다면 그런 놈은 거짓 선구자이거나 사이비이거나 미친놈이거나 스스로의 절망을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의미가 없나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의미 있나 없나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긴 하다.

이건 이해할 것이 아니라 체득할 것이니

다른 설명을 하면 의미있어야 하는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세상의 존재에 의미부여를 하려고 하나 아닌가 하는 그것조차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어~ 생각해보니 그다지 의미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생각이 든다면 참 자기 성찰을 못한다고 쫑크를 줘야 한다.

감정적으로나 스스로가 그런 개념에 그다지 신경 쓰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그것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아는 그런 정도의 자기 관찰력이면 음.... 그것 참 자기 관찰을 내가 그렇게 떠들어도 성과가 없는 것은 그래서이지 자기 레이다에 잡혀야 뭐가 있는지를 알건대 자기가 레이다가 있다고 생각하니 문제지 없는 걸 있는지 아니 자기 관찰을 하지만 안 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또 의미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다면 그게 뭐냐 하면 의미를 붙일 것과 안 붙일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정할 수 있어야 한다.

대강 뭉특거려서 세상에 의미 있나? 이런 게 아니라 좀 더 세분하고 좀 더 정도의 차이를 두고 사물이나 사건이나 대상에 의미를 어느 정도 있는지 어디까지 있는지 어느 범위 정도인지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의미 있나 없나 만 신경 쓰니 의미라는 것을 조절하고 있게 하고 없게 하고 좌우하는 그것을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한 발 나아감 그것이 참 어렵더라

세상이 허무하다고? 육갑 떨지 마 니가 판단할 것이 아냐 그 허영부터 줄여 임마!!!!

 

또 다르게는 둔해서 무심하거나 너무 커진 마음에 그다지 감각이 사라진 것이거나 인데

우린 후자를 가려고 한다.

어느 이상의 인간격이 되면 그 공허와 무력감과 허무에 빠지고

또 어느 이상의 격을 넘으면 그런 감정이 하나의 관절이었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 관절 지나는 시간이 수일도 수년도 아니라 수생이라는 것이 되어 질릴 뿐이다.

그러면 해답을 알아서 달라지나? 그것도 아니다.

해답이 없어서인데 해답이 없으니 그건 해답이 아니라 그저 무감각하게 살거나 애써 외면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좀 다르다.

그런 처절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진하게 느껴서 문제다.

마음이 커져서 무뎌진 것이라서 열반에 든 거라고 할지 모르지만 커진 마음이라 하나만 느껴도 되는 고통을 두 개 새 개 그이 상의 너무도 많고 다양한 것을 중층으로 다각적으로 느껴서 이번에 이거에 저번에 저거에 집중하면서 그칠 날이 없는 것이라 그 존재는 질펀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괜찮으냐고 물으면 그 질문자에게 집중하니 당연히 괜찮다고 한다.

내가 느끼는 고통은 내가 느껴야 하는 고통이라서 다른 사람이 알 것도 없고 느껴야 할 것도 아니다. 그건 집중할 때의 내 마음이다.(근데 난 어설픈 건가 왜 힘들다는 말을 여기저기 싸질렀지 ㅠㅠ)

여기서 "나"는 제라울이 아니라 커진 마음을 가진 모든 자들을 나에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만약 이것이 뭔지 모르면 자기가 느끼는 고통에 매몰되어 커진 마음은 서서히 줄어들고 그전으로 돌아가 정말 고통으로 알고 살던 시절로 되돌아간다.

힘든데 정말 힘든데 한쪽에선 그 힘들다고 하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느낀다.

이 시선이 타인이 아니고 바로 나다. 관조자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의식이 상승하면 이런 의식 분리가 되고 내가 나를 보는 또 다른 나를 생성한다. 이러면 이런 것이 된다.

이걸 단전이라고 하니 별별 무협 지랄들이 생기고 이상한 수련단체에서 이걸 의미 과잉을 시키고는 있지만 그래서 이걸 사물로만 보게 되면 의미를 이해 못 하는 바보가 된다. 처음부터 의미를 보는 것을 안 해서 그렇다.

하긴 관조자 그러면 제3의 눈이라고 이마에 눈을 하나 더 만들더라 고대 그림이나 여기저기 사이비들이 이런 그림을 또 그려요 그래서 정말 이런 눈이 있는지 알기도 한다. 참 인간이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자들이 항상 문제인데 이걸 경계해서 안 가르쳐주던 과거가 있지만 알려주면 이런 사달이 난다. 그래도 말해야지 거짓 지식이 무서워서 말 안 하면 안 되지 구더기 무서워 장 안 담그는 것이니까 관조자나 단전이나 같은 것의 다른 시각인 것을 알 때가 되지 않았나? 아닌가 ㅠㅠ

 

이건 허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허무를 언제든지 알 수 있는 대기 상태 거나 한발 물러나서 언제든지 그 고통에 들어갈 준비 중인 것이다.

또 또 반복해서 그 고통의 감정은 새롭게 갱신되며 오게 되는데 그것에서 벗어나긴 불가능하다.

감정에 매몰되었다가 감정에 매몰되려고 하는 자로 변하는 것이 자천인데 이걸 아마 모를 것이다.

누구나 고통 없는 것을 바라는 거라서인데 난 그런 사람을 보면 말해준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고!!라고

역시나 그렇게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긴 아직 고통을 겪지도 주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는 아직인데 ㅎㅎㅎ

의미를 바라나?

그럼 더욱 처절하게 울부짖어라 그 찢어지는 고통이 더 큰 의미를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더 큰 의미를 다루는 존재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감정의 고통 정도로 나가떨어지면 그대가 감당할 의미는 그 정도에서 다이겠지 히히히히히

이 세상이? 또는 자기가 어떤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면 난 이걸 이렇게 듣겠다.

 

"더욱 깊은 고통을 받고 싶습니다." 그럼 난 '오케이!!! 그 말을 기다렸지요 자자 맞춤 고통이 여기 있습니다. 하하하'

 

세상은 그렇게 그렇게 돌아간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거나 그래야 하는 필연성이 있거나 하는 것은 없다.

이게 그렇게도 견디지 못할 것이 된다는 것을 또 모르는 둔함이 있다.

아무 의미 없다.

그런데 우린 의미를 바란다. 존재의 가벼움을 바라지 않아서이고 견디지 못해서이다.

근데 정말 의미는 없다. 

내가 글을 쓰지만 이게 의미가 있나? 없지. 그래도 하지 왜?

의미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서이고 이것이 무엇으로 하고 왜 하고 어떻게 되어갈지를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내가 그 의미를 바라서가 아니다. 이 글이 또 글을 써야 하는 내 욕망이 무엇에 의해 가는 것인지를 아니 그렇게 해간다.

그래서 의미가 없고 또 그런 의미로 어딘가로 간다. 

의미 두려고 하지 마라 의미가 그대를 잡아먹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사는 것에 그런 의미는 불필요하다. 

즉 의미가 이어지는 것은 운명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의미를 버리면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의미를 버리 수 있나?

그대가 살아서 이 글을 보고 있는 존재라면 그걸 못해서 살아서 이걸 보고 있는 것인데? 

의미를 버려!!!

그래야 의미가 돼 적어도 너에겐 의미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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