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현실인식

제라울 2022. 7. 13. 13:56

현실인식이라는 것이 참 어려운 것이긴 하다.

그런데 이걸 안 하면 또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걸 해야 인간의 격이 되는 것이어서 합쳐서 인격이라 서다.

그런데 여긴 시작부터 어려운 관문이 있는데 그건 현실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이라고 하지만 이미 지나간 지금이다. 지금 지금 해봐야 시간은 이미 과거를 말하는 것이고 과거를 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다가오는 곧이라고 해봐야 오지 않은 것을 말하는 오류가 되기도 하다.

곧 곧이라는 것이 여기가 아니라 또 다른 다른 곳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곧과 지금 사이의 어딘가 인지 모르겠는데 논리로야 뭘 말하지 못할까

 

현실 그 지금 여기 무엇이 있는 것인지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으로 하고 있는지 

그것이 난관이면서 관건이다.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턱이 된다.

그렇지 못하면 과거를 보는 자가 되는 미치지 못한 자가 되거나 미래를 보면서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며 지금을 버리는 것이기도 된다.

 

우린 죽으면 과거만을 보면서 꿈속을 거닐듯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만 세상을 보면서 사는데 이걸 자기 속에서만 산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이런 결핍된 인식 속에서만 사는 존재가 되는데 이걸 귀신이나 악령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린 잠재된 귀신이다. 그래서 죽지 못하게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죽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미 악령이다.

더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그리고 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은 그만큼 주변에 해를 끼치고 있고 그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해를 준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심하면 오히려 이득을 준다고 속이기도 한다.

이미 세상의 흉악함이 되어 있지만 스스로도 주변도 그걸 알기엔 모두가 이런 상태가 되어 있다.

 

가끔 현실인식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고통으로 눈감고 살아야 하거나 모른척하고 살거나 도망가서 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눈감으면 결국 저들은 현실인식을 할 수 없고 그러면 언제까지도 세상은 나아가지 않는데 그래서 그들 중에 뭔 가라도 하고 뭔가라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또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이 이미 그런 사람들을 밀어주고 원하기도 해서인데 그렇게 우린 알게 되고 또 알면서 잊게 되고 다시 알게 되고 그러다가 곡해하고 또 바로 보려고 하고 다시 잊어간다.

 

현실을 보는 것은 우선 눈앞의 사물들을 보는 것이고 내 앞에 있는 것들이 있음을 보고 있을 수 있었던 많은 과거들의 집합을 보는 것이다.

거슬러 보면서 여기에 오게 되는 그런 과정들을 인식한다.

현실을 보기 위해선 과거를 봐야 하고 그 과거에서 여기로 오는 그 과정 속에서 이 현실은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서 미래로 가는 것도 짐작하게 된다. 현실이란 과거와 미래에서 지금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해서이다.

어느 시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간에서 조망하고 견주면서 무엇이 있는지 또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아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 무엇으로서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내 앞에 있는 사건이나 정보나 사물들을 어떻게 보게 되는지 보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보는 것을 멈출 수 없는지 보아야만 하는지 그런 것을 생각할수록 더욱 현실은 뚜렷해지는데 그것은 힘겨운 작업이다.

내가 보려고 했나 남이 보라고 하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려고 하나 

무엇으로 보는지 아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이미 보고 잇고 보게 된다.

자신이 그것을 그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재인식하는 자는 없다. 

그건 자기부정이기도 해서인데 자기부정을 못하거나 할 생각이 없어서 이건 어려운 작업이다.

내가 안경은 안경으로 본다고 다시 생각하게 될 때 이미 안경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이 전제된 사고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안경을 안경이 아니라고 보려는 것을 누가 하나 장난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식을 자식이 아니라고 해보자 이러면 부모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 것인데 그냥 생각도 못하게 하지만 그걸 진지하게 하자고 하면 폭력을 부를지도 모른다.

얼마나 깊게 부정해보았을까? 그 당연한 것들을 그 진지한 것들일 수록 했을까?

내가 이런 것을 여기 저거 썼으니 형식적으로나 그냥 마지못해 해 보긴 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해봤다고 대답하면 이런 사람은 다시는 부정이라는 것을 하지 못할 것이다.

부정하면서 이미 방어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반응 자체가 빠져나갈 방법이기도 해서이다.

너 이거 해봤어? 어!

너 이거 알어? 어!

이미 방어했다. 더 이상의 추궁은 서로 얼굴 붉힐 일이 된다.

 

이렇듯 내가 사물을 사물로서 보는 것부터 이미 따지고 들면 한없이 어려운 말이 된다.

누구나 사물을 보지만 누구도 보지 않는데 보는 것에도 깊이와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이다.

그대는 보고 있는가?

아닐 것이다. 보고 있는 것이 뭔지 고민해봤으면 본다는 것이 성립 안 되는 것이 되어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다고 넘어가는 것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는 게 뭔지 진지하게 따져보는 인간도 별로 없지만.

하지만 이걸 안 하면 결국 우린 현실을 볼 수가 없다.

현실을 보려면 현실이라는 것을 내가 만들어야 하고 인식하는 방법을 정해야 하는데 이게 뭔지도 모르면 본다고 알고 살고 산다고 알고 살겠다.

우린 현실을 보는 것인가?

여긴 먼저 말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걸 알고 싶긴 한가?

우린이 누구?

현실이긴 해? 

시간 나눔이 우리에게만 의미 있나 아님 모든 존재들의 의문인가?

시간이 알아지나?

있긴 하고?

본다고? 왜? 뭘? 그게 뭔데? 뭐가? 누가? 어떻게?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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