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친이라고 해서 명리학적인 설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올라온 글이 있어 생각하던 것이 갑자기 생각나서 다른 의미로 말해야 할거 같아 씁니다.
그전에 내가 육친 체계 그러니까 사회의 가족관계라는 것에 얽매이게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를 닦으니 그런 관례나 선입견이나 감정체계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나 국가적인 한계에 구애받을 필요도 원리도 의미도 없어서인데 이런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선종이나 서양철학이나 다양한 연구가 되어 있어서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해해서는 또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고단자라고 하는 경계의 사람들이 하는 것을 말할 것인데요
내가 고단자라고 말하는 자들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자들이죠 인간의 한계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대화와 행동과 지식 체계를 가진 것을 말합니다. 명에 얽매이고 타인에 조직에 국가에 세계에 지식에 감정에 윤리에 도덕에 문명에 종교에 문화에 역사에 혈통에 종족에 무엇에 무엇에 무엇에 항상 다른 무엇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이런 것을 벗어난 자들이 가끔 아주 가끔 있습니다.
이들이 뭘하는가 하면
인간의 행동에 구애되지 않으니 인간적으로 살기도 아니기도 합니다. 만 애매하죠 알아듣기 힘든 이런 말은 의미 없습니다. 이건 이런 거다 저건 저런 거다 하는 무아이다 공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이런 말은 무아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문법입니다.
정말 무아인 사람은 그런사고를 하지 않죠 다시 말해 구애받는다 아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은 다른 구분입니다.
그래도 여기선 그것을 설명해야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말하고 그다음의 의미는 스스로 사고해봐야 합니다.
그럼 어떤가 하면 육친이라는 말로 하면
내가 육친체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면서 모든 체계나 지식이나 번뇌에서 벗어난 것인데 다시 그것에 들어가는 것은 그게 뭐하는 것인가 할 것인데
나 혼자선 무한 자유입니다. 아무런 거리낌이나 구애될 게 없죠
그런데 내 주위는 다릅니다. 가까이는 가족이지만 사회 국가 세상이 있습니다.
이들이 안보이면 모르지만 안 보일 수 없습니다. 이걸 보고도 모른 체하면 감정이 없어서 해탈한 게 아니라 잔인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고서 힘들어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는 감정을 가진다면 한심한 것입니다.
그건 협소한 감정 동조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에 자유로워야 더 큰 체계가 보입니다.
전에도 말했는데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감정이 내가 아니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만은 아니고 감정으로 대하면 더 크고 멀리 보기 어려워서입니다. 더 크고 멀리 깊이 봐야 근원적인 해결이 보이게 됩니다. 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혜안이나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그 근원적인 이 세상의 체계를 다르게 해서 슬퍼하는 사람이 줄어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며면 감정이나 지식이나 다양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공이고 무아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열반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견해를 가지기 위해서이고 이 견해가 필요한 이유는 더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이고 세상의 깊은 체계에 접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깊은 체계에서 행하면서 세상의 흐름과 지식과 사건과 의식과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의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도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사람이 줄어들 수 있게 세상의 체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회사건들을 보면 희생자의 가족들은 공적으로 하소연하면서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철저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물론 형식적인 말입니다. 듣는 사람도 형식적으로 듣죠
이런 형식적인 말을 하게 만든건 오랜 역사에서 오는 윤리교육이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라도 자기의 감정을 누르고 사회를 위하는 말을 하게 합니다.
근데 고단자가 되어가면 이런 형식적인 것을 구현되게 하려고 하는 것을 모색합니다.
남들에겐 그저 말일 뿐이고 그럴듯한 전형적인 것일 뿐인데 누구에겐 그것이 현실이고 당장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보며 그것의 절실함과 가까운 실효성을 보게 됩니다. 이걸 보지 못하면 견해의 부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당장의 성과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누적되며 변형되는 것을 거치면서 서서히 구현되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했는지 모르겠죠
눈앞의 가족의 눈물을 닦아 주지 않습니다. 앞으로 눈물 흘릴 더 많은 사람의 눈물을 닦으려는 것이니까요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편을 봅니다.
그 사람이나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더 깊은 체계와 흐름을 보는 것입니다. 상대하는 것도 그것이고요 그 사람과 관계하고 어울리고 사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보편에 접근하고 살고 어울리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선 다시 육친 체계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회윤리가 있는데 그것이 도를 닦는 입장에선 무아와 상충됩니다.
그다지 의미도 없고 깨우침도 아니고 잘못된 고정관념이며 관념 형태가 굳어진 습관이라서 무분별하게 쓰는 것이고 과거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억지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깨우침을 얻기위해선 그런 것에 해체를 하고 벗어나며 자유롭게 되는 것인데
다시 덕행을 하려고 하면 그러한 것을 내가 다시 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회윤리가 없어지면 그로 인한 사회문제가 더 심각해지기도 할거 같으면 그것을 유지하게 하려고 그러한 사회윤리를 유지되게 하는 행위를 할 것인데 그러면서 그 윤리에 해당하는 것에 따라 하거나 거역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뭔가를 합니다.
그것을 따라하면 그것이 유지되면 따라 하고 거역해야 그것이 유지되면 거역도 할 것입니다.
이건 그때의 상황따라 달라서 이것도 헷갈립니다.
어떤 것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선 그것을 몸소 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을 파괴하고 거스르면서 해야 하는지 그건 판단이 어렵습니다.
불로 싸질러서 다 없애고 다시 하는가 물 주고 북돋으면서 잘한다고 하면서 더 하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죠
그래서 도에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데 덕으로 넘어가 포덕을 해가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도덕을 지켜야 하며 말 잘 듣는 사람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도덕적인 선을 넘어가지 않죠
그것을 넘어갔을 때 벌어질 사회의 사건과 변화를 못 본다면 모르지만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넘어가지 못합니다.
난 착하게 살겠죠 왜냐하면 아닐 경우의 후폭풍을 견디기 힘들어서라고 하면 피해의식인데
그보다 내가 바라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에 그러한 것은 안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죠
이러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었으면 한다면 그러한 사람이 일단 내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런 것도 다들 압니다. 하지만 행동으로 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긴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너무도 집요하게 몰아세워서 짜증 났던 담임이 있었는데
이분이 담배를 더럽게도 많이 피웁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막으려고 감시하고 선도하는데 이 담임은 하지 않더군요 하지 못하는 거겠죠 본인이 골초니까요 최소한의 자기 역설을 견디는 것이겠죠
이 담임이 싫었지만 그 정도는 하는 인간이네 하는 기억이 ㅎㅎㅎ
난 착하게 살지 않겠죠
왜냐하면 착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한 사건들의 혼란을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혼란이 혼란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고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의도하는 뭔가로의 진행을 보기 위해서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걸 지켜보려면 오랜 시간과 인내와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보지 못하고 내가 이런 거라고 하는 것을 믿는다면 안되고 스스로 본 것이어야 자기의 것이 되어 이런 것을 행하는 자가 되어 갑니다. 그전에 그에 합당한 수준의 공부가 있어야 하지만요
하려던 말은 간단합니다.
도를 닦을 땐 해체한다면서 다 버리고 자유이고 깨면서 오르지만 덕으로 넘어가면 다시 버린 걸 주워 담아 지키는 것을 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물론 방법의 문제가 있어서 순하게 할지 거역하며 할지는 다르긴 합니다. 여기에 정도의 차이와 접근 방법상의 다양함까지 하면 알아보기도 힘든 것이지만 일단 이론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단계의 사람이 뭔가 이룬 사람처럼 행동하면 내가 비웃죠
너 공부하지? 공부해! 어설프게 이룬 자를 흉내 내지 말고!!
이런 것이 앞뒤 다르게 보여 헷갈리기도 할 것입니다.
어디선 그런 거 아니라고 해체하고 부정하고 그러면서 어디선 그래야 한다고 할 것이니까요
누군가 만나서 인사할 때 난 인사 안 합니다. 억지로 아는 체는 하죠 악수도 안 한다고 했는데 다들 하려고 하더군요
누군 허리 굽혀 인사하고 공손하게 스승 대하듯이 하기도 하죠
사소한 예의부터 몸에 버릇된 작은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어야 해서이고 초보자들이라 해체시켜야 해서입니다.
자기가 하는 행동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겐 인사나 사소한 예의 같은 것을 나에게 할 때 난 거절합니다.
신체의 행위로 사람을 보지 않아서 또 말로 사람을 보거나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하지 않아서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꾸미길 좋아하죠 그렇게 위선을 사회에서 배워서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도 그러니까요
이미 공부가 어느 정도 성취한 사람들에겐 뭘 하든지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악수하든 인사하든 절을 하든 하고 싶은대로지요 그러다가 그게 습관 되어 가거나 의도가 도와 무관해가고 있으면 냅다 욕하죠
아마 그러면 갑자기 내가 변했다고 하겠죠 변한건 본인인데요
그런데 이것도 후회되더군요 더 간섭하고 습성으로 굳어진 것을 깨트릴 때까지 다그쳐야 했었나 하는 후회요
도가 어설픈데 덕을 하려는 성급함이 있었죠
자유를 얻지도 철저히 비우지도 못하면서 비우고 채우는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는데....
그런데 이 사회체계나 육친체계에 다시 들어가면 너무 힘겹습니다.
그 부자유스러움과 사람들의 어리숙함이나 답답함이 있는데 나를 그들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 불편한데 이러면 거만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관점이 아니라 불필요한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자기 수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라서 안 해도 되거나 하면 안 되는 것인데도 합니다.
거꾸로 난 지키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어려움 없이 어기고 자기 감정대로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말로는 이러다 저런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이 될 때이고 이해득실이 걸릴 때이고
그게 아니면 같은 사항인데도 다른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다 열거하면 끝없이 하는데 남을 욕하는 것이니 그만하고요
그러면서 힘든 건 그러한 것에 내가 맞추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인데
그건 내가 하는 것이 끝날 때까지 일 겁니다. 내가 보는 뭔가가 있어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되면 그때까지 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음으로 넘어가죠
그다음으로 넘어가면 주위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은 달라진 내 태도나 행위에 당황할 것이니 이것도 신경 써서 아닌 척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러면서 느는 것은 거짓말이고 허위이고 위선입니다.
그러다가 꼬꾸라지거나 이러한 모순과 내적인 갈등이나 사람들과의 다른 사고와 견해에 상충이 일어나면서 점점 그들에게서 멀어지거나 내가 그들에게 먹히거나인데 이래도 힘겹고 저래도 힘겹죠
난 안 힘듭니다. 왜냐하면 힘들게 뭔가 하고 있는 거지 힘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난 힘듭니다. 죽을 거 같아요 왜냐하면 그래야 뭔가 조금은 변화가 일어납니다.(근래 가까운 곳의 천신중 누군가 와서 '힘들지?' 하는데 난 나도 모르게 "죽을 거 같.."를 말하다가 끝맺지 못했다. 내가 아직도 이런 말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직도 죽겠다고 하소연하나...)
난 거짓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왜냐하면 상대가 보는 것을 내가 보고 있지 않아서입니다. 서로 보는 곳이 다름은 거짓과 사실을 다르게 이해합니다. 언제나 내가 직시하고 있는 곳은 거기 거기인데 항상 말이 같았는데 이럴 땐 사실이라고 남이 말하고 저럴 땐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상처받았다고 말하면서 떠나갑니다. 그래도 난 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죠 왜냐하면 눈을 떼는 순간 세상의 근원은 달라집니다.
산신이 산을 떠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웬만하면 떠나는 순간부터 그 영역은 다른 것으로 변화해서 자기 것이 되지 않아서 인데(다른 이유도 많지만) 내가 그러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인간세상을 보고 있는 신들을 관음증 환자라고 놀렸는데 결국 나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욕은 함부로 할게 아닌가 봅니다. 그 욕에 내가 걸려들었다고 요즘 실소가 자주 납니다.
법을 굴린다는 전법륜이 있는데
그러면 그전과 이후는 다른 것이다. 이전에 한 말과 다른 말이어서 거짓말이고 모순이고 이걸 어찌 감당했으려나
사람들의 비난과 골치 아픈 머리 미숙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이미 꼬투리가 잡힌다.
여기선 무 라하고 저기에선 이걸 지켜야 한다 하면 이 사이의 간극은 뭘로 매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