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강마을

번역

제라울 2018. 11. 29. 00:30

내가 요즘은 번역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거 같다.

그러다보니 자천도 번역이라고 하겠다.

내 나이가 되어보니 (겨우 47살 이지만 요즘 수명엔 이건 반이나 온건가 ㅋㅋ)

암튼 살아오면서 본게 있고 들은게 있고 그렇다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면서 중년이 넘어가면 나름의 사고가 형성 된 게 있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경과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고 사회생활하면서 뭔가를 실현하려하고 그러면서 저항받고 그러면서 타협하고 성공도 실패도 좌절도 억울함도 분노도 다양한 감정적인 경험을 하면서 인생공부하고 고착화 되어가는 현실적인 또는 이념적인 관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고정되고 형성된 것이 도에 입각해서 보면 문제가 있는것이 다분하지만 우선 이렇게 자연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사고유형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나를 연구하거나 사고하거나 이렇게 자기를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드물지만 나름 보거나 들은게 있으면서 읽은 책도 있고 접한 신문이나 인터넷으로 정보도 본 것들이 있고 그러면서 분명 우린 엄청난 지식을 섭렵하고 있다.

누구나 노력을 조금만 더 하면 이러한 흔한 정보들에서 지식을 가지는 것은 수월하게 된 세상이기도 하다.

이런 것이 시간이 흐르면 나도 모르게 소화되고 내것이 되고 해석되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누구나 하는 해석을 넘어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관념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분명 남다른 과정을 거친 것이 될 것이다.

나이와 함께 가지는 연륜같은 세상이해와 다양한 정보들을 규합하면서 성취하게 되는 경험들도 있는 것인데,

그런 체계가 완성도를 가지면서 거기에 자천은 한 단계 더 인위적 가공을 하면 되겠다.

즉 관념적이라하든 지식적 체계든 생각하는 방식이든 사회를 보는 원칙이든 그런 것이 확신이 있다면 그 확신을 체화한다고 하는데 신체적 구현을 시키는 것이다.

이걸 난 번역이라고 한다. 즉 관념체계를 형성하고 그 관념체계에 맞는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럴듯하게 말하면,

광념체계나 각성을 몸으로 체화하는 것이고,

깨우침의 몸이 되어가는 것이며,

간단히 말해 관념체계를 구현하게 되며,

지식이나 견해를 신체로 번역하는 것인데, 이런 지식이나 번역된 또다른 신체나 몸이라는 것으로 한다. 신체가 몸으로의 번역까지 가는 것인데 이것의 차이는 신체는 변화된 신체가 있고 나아가서 몸으로 되어가는데 몸은 행동과 인생까지 그렇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생의 범위도 다르게 된다.

몸이 관념이 있고 번역된 신체가 있고 인생이 있고 하면서 구분하지만 구분은 인위적이고 공부 순서이지 이렇게 애초에 구분되어 있다고 말하진 않는다.

머리에서 부터 온몸으로 물들어 가는 것이고 지식에서부터 다른 신체로 번역되어 가는 것이다.

간단히 지식이 있고 번역해야 하는 것이 있다.

말이 어렵게 되었는데 간단히 내가 아는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번역한 몸이 있다는 것이다.

그 번역하는 방법을 호흡이라고 하거나 호수(주문)이라고 하거나 심법이라 행공같은 동작으로 하거나 어떤 것을 하든 번역의 방법이고 그것이 번역인 건 맞다. 그리고 인생으로 번역하기 위한 것은 별로 말하지 않는데 주위와 교류하면서 직장생활하면서 사회생활하면서 그안에서 자기가 이해한 지식이나 성취한 도를 실현해가는 것인데 알면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찾고 알아가며, 할 수 있다고 본 도덕이나 지적인 이해나 철학을 현실에서 그 한계와 경계를 보는 것이며 삶으로 구현한다는 것을 해가는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살고있는 그 전체적인 조망이다.

이런 순서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도 설명한다. 거꾸로도 있고 동시에 하는 것도 있는데 여기선 이 순서를 말한다.

호흡이나 호수를 하다보면 지루한 과정이다.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일년 이년...

끝없는 반복작업이 변화는 미미하고 이정표도 없는 허무한 일상이 된다.

어떤 것이 구현이고 번역이란 말인가 하는 회의가 들고 안일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심리적인 흔들림은 잠깐이고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지향하는 또 바라보는 또 이해한 지적체계는 달라지지 않고 더욱 미세하고 광범위하게 성장한다.

그에따라 내 자천도 함께 번역되어져 가는데 그 시일이 긴 여정은 참고 인내하며 하루 이틀의 누적되어 한달 두달이 되고 한달 두달이 누적되어 일년이 되는 과정없이 이루어지는 않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전에 번역해가는 것도 해가야 하고 일상체계에 번역하는 것도 해가야 하는 것인데 지식이나 관념을 신체변화로 또 인생변화로 하는 것이 자천이라고 하겠다.

물론 빠르게 건너가듯 간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을 말하거나 인지한 것이지

건너가서 돌아오고 다시 가며 또 건너가고 돌아오며 다져가야 하는데 그 반복의 폭의 다름이지 누적은 누적이고 그 한 번의 반복이 하나의 번역이고 그 번역이 자기 다짐이 되어 마음의 기반이 되어감을 말하지 않아서이다. 마음이 되어가야 그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되어갔는지는 긴 시공에서 알아보는 것이며 알아보는 사람만이 알아본다. 자기가 그런 시공적인 번역을 한사람이 성취가 있은 후에 그 성취를 바탕으로 이룩한 새로운 견해가 있는 사람만이 그런 번역을 하려는 것을 알아보고 성취해가는 것을 알아본다.

과거 말과는 달리 강을 거너면 배를 버리거나 잊지는 못한다. 한번 건넜다고 건널 수 있는 사람인 건 아니다. 그리고 자기만 건넌다고 될 것도 아니다. 건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지 건넌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물에 자유롭고  어떤 저항에도 넘나드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끝내 자천법은 반복이었다고 한다. 그 반복은 내적인 무한한 창발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위해서이다.

같은 행동, 같은 감정, 같은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복속에서 자유를 보는 것이며 그러한 자유는 반복의 누적이 같은 것의 누적이 아니라 다른 것이 누적되어 다른 것이 되어가는 반복이라서 이다.

우린 언제나 달라지는 누적을 달라짐의 누적으로 하는 것인데 그것이 번역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내가 달라지는 것이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사람으로 번역시키는 과정이 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에서 하나하나 정성을 들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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