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서
철학을 하라고 했는데 이건 서구인들이 만든 학문입니다.
우린 이런 것을 만들지 않았고 시도조차도 안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열등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론 도 닦는 사람들이 서구인들의 철학을 많이 읽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서구에 경도된다면 안 되지만 결국 경도 된다면 한심한 공부겠죠.
조선시대에 주자학을 공부하면서 결국 그들은 차이나에 경도 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대개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경도 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가 어디에 경도 되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의지는 가상하나 능력이 모자름이 있는 것입니다. 내 어디에 어떤 것이 작용하는지 분별하지 못하고 이것을 하려고도 안하는 정도인데 이것 역시 대다수가 하는 것이라 나무란다고 될 것은 아닙니다.
서구 철학은 과학과 다를게 없습니다.
사물을 규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정의의 현란함은 다르고 시대와 함께 늘었어도 이러한 욕망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이건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나도 "서구철학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이 보일 것인데, 그런 것입니다.
근데 그건 아닐 것입니다. 정의를 강조했고 정의하도록 추궁 했으며 애매한 정의하는 것은 비판하기도 했는데 이런다고 나도 그런 사람으로 본다면 오해가 극심한 것이 되겠죠.
도에서 하는 짓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도의 욕망입니다.
어떤 것을 바로 알거나 정확히 알거나 규정하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정의를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정의이든 상관 없고 틀려도 상관없고 시시때때로 변해도 상관 없습니다.
정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그것이 중요하고 목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라고 한 것인데 그 의도를 모른다면 도를 엄하게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의도를 보아야 한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사람의 성장이 목적이지 어떤 학문이나 지식을 연구해서 알아내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런 연구가 사람들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저 그런 학문입니다. 서구인들에게 영향받은 학문입니다.
우리식 학문은 나와 상대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뭘 아는 자가 아니라 뭘 알 수 있는자인가가 요건이라는 것입니다.
알고 있음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뭘 알 수 있는 자세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고력이라고 했죠 사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이고 사고 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갖추려는 것입니다.
이미 아는 지식이 있고, 뭐고 얼마나 알고 있고 이런 것은 부차적입니다.
사고하고 있는가? 사고하려고 태도를 취하는가? 사고하는 중인가가 오직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안다 하지 말고 알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니가 뭘 아는지는 관심없다. 알려고 하는지가 문제다." 입니다.
이게 내가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넌 항상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위치이고싶냐, 가르치는 것만을 하고 싶냐, 누구나 다 너에게 배워야 하냐> 이런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이건 문맥을 오해하는 것인데 자세히 봐주시길 바랍니다.
알려고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안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알아가고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하며 정해진 것으로가 아니라 순간순간 정해가기만 하는 것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과 학생이 가르치고 배우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살피시길 바랍니다.
칸트의 '아 프리오리'를 선험적인 것으로 번역한다고 합니다.
선험이란 선천과는 다른 것인데 태어나기 전이 아니라 경험하기 전입니다. 경험은 수시로 일어나는 것인데 그런 일상에서 아무 때나 일어나는 경험에 그 경험하기 전에 전제된 선험적인 것을 연구합니다.
이건 중용의 이발과 미발이라는 것으로 본다면 너무 나간 것이긴 합니다.
서로 지향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서로 이어서 생각하며 나름의 관념을 형성하면서 이롭게 해석해도 된다고 봅니다. 자기의 학문을 이루는데 경계는 스스로 해결할 문제이니까요.
우린 인격의 성장을 추구하기 대문에 선험이나 후험이라는 것을 인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있지만 그 이상의 것으로 나가는데, 즉 내가 감정을 경험하면 그것을 경험하기 전과 이후를 나누게 됩니다.
감정을 극복하고 감정으로 인해 해야 할 것을 못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자기의 감정을 다루고 발전시키고 더나은 것에 합일 하기 위해 감정을 경험하는 것과 그것을 경험하기 전의 구분을 하며 스스로의 삶에 기여하게 합니다.
선험성과 후험성을 구분하면서 이런 자기의 경험하는 방식을 되돌아보고 관조하면서 행동의 방향을 정하고 더나은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하게 됩니다. 물론 칸트가 바라는 것이 이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린 분명 그것이 행동으로 또 마음으로 또 도덕으로 함양되고 생활하지 못하는 지식은 쓸모 없다는 전제를 가지는 것이라서 이런 철학을 보면서 그런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람이 다름을 말합니다. 인격이란 인간의 전체적인 의미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격이 다름을 말합니다.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그 격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지식도 이런 격의 이룸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린 서구인같은 철학이나 학문은 못했고 앞으로도 안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가 할 학문은 도학이니 도 닦는 것입니다. 인격의 이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