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강마을

의무

제라울 2019. 5. 28. 14:38

의무

의무라고 하지만 사실은 왜 생각을 조심해야 하고 잡념을 정리하거나 없애야 하고 감정을 제어하고 남에게 떠넘기지 말라고 하는지 그런 것에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며 광룡원 만의 이유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도를 닦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내가 할 말은 이런 거 밖에 없습니다. 사회나 세상의 일은 굳이 말하지 않는데 미루어 보면 다 비슷한데 굳이 같은 말을 거기꺼까지 들추고 싶지는 않습니다. 미루어 짐작하는 것을 내가 다 해주면 읽는 분들이 할 일이 없으니 심심하잖아요


도를 닦으면서 잡념을 줄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거의 무념이라고 생각자체가 없어야 한다고도 하는데 심하긴 하죠. 그리고 감정도 다스려야 한다고 하지요. 생각처럼 무심이라고 없어야 한다고 하고 불가적으론 탐진치가 있으면 안되고 번뇌가 있으면 안되고 이런 식인데 이런 것이 너무 안일하게 유포되고 쉽게 접근하는 것이라 쉽게 해석하고 쉽게 아는 듯이 말하고 당연한 듯이 말을 말하게 됩니다.

어느 것이나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데 세상에 유포되면 그냥 상식이 되고 흘러다니는 뜬 말이 됩니다.

그냥 듣고 그냥 말하고 그냥 잊어가며 그냥 아는 듯이 말하고 생각해서 그냥 남에게 가르치려 들고 훈계하며 그렇게 그냥 그냥 합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들으니 또 그냥 그렇게 도를 공부하면서 합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억누르며 생각을 없애려고 하고 제어하려고 하며 감정이 일어나면 참고 누르면서 후회하고 생각이 맘대로 통제 되지 않는 것에 화가나고 자괴감을 가지며 그렇게 공부합니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깊이 사고한 것도 아닌 그냥 들은, 그냥의 지식을 진리인양, 그냥 받아들인 그런 결과로 인해 하는 것인데 이렇듯 우린 뭔가를 아는 것이 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 것이고, 그냥 자기에게 적용하면서, 그냥 힘들어 합니다. 뭐가 잘못된 거이고 어디서 오해가 생긴 것이고 어디서 문제가 일어나는지 고민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잘 안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그것을 해결해준다고 하면 혹해서 열성적으로 따르기도 하고 그런 상대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면서 그렇게 그냥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대다수는 생각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없고 훈련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당연한 생각의 진행이 누구나 같고 다들 그렇게 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삽니다.

그러다가 도를 공부한다고 하면서도 역시나 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또 버리라고 배우지도 못하고 사고하는 방법과 사고의 체계와 감정체계를 익혀야 하고 단련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인데도 역시나 그것보다 지금의 자기가 원하는 그것을 빨리 이루는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즉 생각이 없고 감정이 없어야 하는 것이,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없는 듯이 해서 다른 생각과 감정을 형성하고 생각 다루고 감정 다루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생각과 감정에대한 새로운 또는 진짜 의미와 행동법을 배우는 것이 도라서 그런 것인데 그런 것을 모르고 그냥 무념이나 무심을 추구 한다면 맹목적인 공부이지 제대로의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죠.

도를 배우면서 내가 생각하던 그것을 다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얼마나 알 것이며 이걸 모르고 도를 배우면 결국 헛발질이 되는 것을 알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넘어가지 못하면 그 너머의 감정이나 그 이상의 세계엔 접근조차 불가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요

이렇게 과거의 함축적이고 고원한 듯한 도에 대한 정의를 우리 말로 바꾸고 일상의 것으로 말하는 것인데 왜 사고하는 방법을 바꾸느냐고 하면 도는 우선 교육입니다. 배움이지요 그럼 뭘 배워야 하는 것일 까요? 그건 생각하는 방법, 감정하는 방법, 사는 방법, 아는 방법, 보는 방법, 행동하는 방법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과거엔 이걸 지금과는 다른 기반에서 설명하는 거라서 알아듣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게 그말인가 하는 당황스러운 언어와 말 표현이 있게 됩니다.

안배워도 아는 이런 것을 굳이 배우는 것은 안배우고는 어느 한계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그 기간도 장담 안되는 긴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좀더 수월하게 배우는 것이죠.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인데 좀더 사람다워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도 태어난다고 그신체의 능력을 다 사용하지는 못합니다. 효율적으로 쓰지도 못하고 능력치를 다 이끌어내지도 못하죠. 그건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그냥 태어난다고 그냥 산다고 자기 자신을 전부 다 쓰거나 다 다루거나 다 이끌어내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일부분, 그저 일정한 것만, 그저 쉽고 간단한 것만 활용할 뿐이게 됩니다. 그런 것을 더 효율있고 남김없이 이끌어내고 가능성과 잠재성의 제어를 하는 것이 도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배움이죠


이런 것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 결의를 하게 됩니다. 도를 배우려는 그 각오가 있어야 또 커야 성취가 있게 됩니다. 아니면 그저 그렇게 하는 듯 안하는 듯 하다가 세월을 보내는 것이며 아쉬움에 원이 남을 것입니다. 할 수 있을 때, 해도 되는 때, 그리고 하게 만들어서라도 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하면 그러지 못한 것이겠죠. ㅎㅎㅎ


그래서 생각이나 감정인데 그냥 남에게 화나 분통을 터트리지 말고 떠 넘기지 말고 남에게 풀지 말고 이렇게 쉽게 말하는데 그게 왜 그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공부하고, 마음을 다루고, 마음을 수련하고,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말하는데 그것이 자기가 착해지거나, 자기가 좋아지거나, 자기 마음이 편해지거나, 자기 마음이 고요해지거나 하는 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이 밖이고 밖이 아니며 내가 남이고 세상이며 남과 세상이 나인 것이며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는 부분이 되며 하나가 다이고 다가 하나입니다. 이런건 다 압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이, 내 밖의 생각과 감정이 됩니다. 나 혼자만의, 내 안에서만의, 나 만의, 자기만의 것이라고 하면서 하는 것은 이런 전체적인 시야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너 혼자만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생각은 밖으로 들어나고 나오며 밖과의 소통이고 교류이며 생각하자마자 이미 밖과 영향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사실은 생각 전부터 외부와의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잡념이 없어야 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서 전체와 주변과 외부와의 관계가 이미 일어나는 것이라서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생각에도 책임을 가지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잡념이 사라져서 열반이 되고 각성이 되고 도가 이루어지는 거라서가 아닙니다. 이런 목적이나 이유로 잡념 일어나는 것이나 번뇌를 싫어하는 것이나 원치 않는 것이라면 적어도 광룡의 가르침은 아니며 이말을 허락한다면 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겠습니다. 생각 하나도 주변과 세상과의연관에서 서로간의공명이라고 하든 사건의 주고 받음이라고 하든 그런 관계에서의 일어남이니 조심하는 것이나 이걸 아는 것이 각성이고 열반이라고 해서 자기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로 사는 것이 아니니 열반이고 무아입니다.

마음을 바루거나 마음을 맑고 밝게 하던가 마음을 공부하던가 마음을 어찌 하는 그런 말들도 역시 같습니다. 자기 마음을 위해서 하는 거라면 광룡의 가르침은 아니며 마음이 주변과 외부와 전체와의 관계에서 책임을 가지며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것이고 그래서 닦고 공부하며 다루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나 생각에 책임을 가지며 더 좋은 생각과 마음 주변을 이롭게 하는 마음을 적어도 자기의 마음을 다루거나 이해하는 것이 의무이며 잘 사용하고 잘 다루며 능력을 기르며 성장시키고 더 높은 곳을 원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도 공부를 자기의 법열이나 만족, 환희, 성취라서 남에게 보일 것도 남에게 검증이나 이해받을 것도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남에게 요구할 것도 남에게 이것이라고 이것이 맞다고 할 것도 없고 그렇게 외부와 단절하면서 자기 안에서의 체험이나 이해를 원하는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즉 분명 이러면 외부에게 자기에 대한 말을 할 것도 없고 자기가 맞다고 말하지도 않아야 하며 가르치려 들거나 요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일관성이 있는 행동이 됩니다.

꼭 남에게 이게 맞다고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미 자기가 말하는 도에 어긋남을 알아야 합니다.

이건 안의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것이 안의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난 말합니다.

이미 도는 안에서의 일이 아니라 밖과의 연관이 된다는 것을 어찌 모르는 것인지요.

이미 숨쉬면, 이미 말하면, 이미 행동하면, 이미 살아 있다면 모든 것은 외부와의 관계이고 개체가 전체와의 연결이 됩니다. 공부에 일관성을 가져야 하며 일관성은 아는 만큼 이해할 거라고 봅니다.

내 안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외부로 어떻게 나가는지 그거라도 우선 알아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죠.


그래서 생각이 감정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인데, 그것을 자기 공부를 위해서 자기 도 닦음을 위해서 열반하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우린 태생이 함께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도가 상승해도 역시나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고 가지런히 하려고 하며 감정을 지나치게 과잉으로 발산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감정에 책임지고 극단적 피해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무슨 착하게 살아야 한다. 좋은 사람되어야 한다식으로 아이들에게 윤리 가르치듯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왜 이런 것이 광룡원의 가르침이며 왜 이런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며 왜 이것이 맞는다고 하는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이건 주장입니다. 주장일 뿐이기도 합니다.


도를 닦다보면 내 생각으로 인해 주변이 변하거나 사건이 생기거나 영향을 주는 듯한 현상을 경험합니다.

매번 매 생각마다 영향을 주는 거 같지는 않다고 하겠지만 단 한번이라도 그 한번의 생각의 영향줌을 체험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도 이런 것을 알고 주의 한다면 좋지만 분명 우린 편범한 사람이고 그로인해 실수하고 경험하며 배워갑니다.

다만 이런 것을 한번 두번 연속적으로 보면서 경험하면서 그 원리를 모르고 그 피해나 파급을 모르고 그의미를 모르면서 행동한다면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조건 나쁜 영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좋은 긍정적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의 주의집중이나 생각이나 감정을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내가 생각하는 옳다는 것이라서 다른 사람들도 그것에 찬성할지는 모르는 것이고 사실 이런 것보다 우선 내가 주위에 주변에 전체에 어떤 관계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도를 배움에 무엇이 일어나고 무엇이 진행되며 그것이 내 주변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지 그것을 알고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생각하나 감정 하나에 혼자만의 자기만의 것이 아닌 전체와의 관계에서 보고 판단하며 의미추구를 해야 하는 그것을 말하자는 것이고 그래서 조심하고 다루고 경계한다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광룡원은 실재성이 없는 가르침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번뇌가 사라져야 한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면 깨달아야 한다면 그럼으로 인해 우리가 현실의 생활에서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어서라는 그 현실적 당위성을 가진거라서 입니다. 그게 아닌 이론만의 가르침은 없습니다.


'자천 > 강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지구획  (0) 2019.07.23
갈 길  (0) 2019.06.17
도덕의지  (0) 2019.02.05
공부에 이어서  (0) 2019.02.04
곤주태아  (0) 2019.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