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겨우 산천이나 사주나 이런 것들을 익히고 있습니다.
그다지 이런 재주가 없다보니 익히는 것이 수월치가 않습니다.
이런걸 왜 익히느냐고 많이들 물어 보고 또 궁금해 하기도 하더군요.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갑니다. 언제나 가니 또 가는 것이고 앞으로도 갈 것이고 가려고 하겠죠.
가서 보니 지형의 형세가 있습니다. 산은 이런 모양이고 물은 어디로 흐르고 바위가 어떻게 생겼고 뭐가 있고 언제부터 있고 왜 있게 되었고 하는 것들이 당연히 있게 됩니다.
그런 형세들을 보면서 그곳에 간 이유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지리산을 간다고 해 봅시다.
지리산을 가면 노고단도 있고 천왕봉도 있고 여러 곳이 있는데 어디로 오르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그중에 가본 곳이 법계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보니 여러 유물도 있고 적멸보궁도 있고 역사적인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형세를 보니 바로 앞에 안산이 솟아 있습니다.
이렇게 안산이 같은 산줄기에서 있게 되면 뭔가가 두려워서 물러난 것이기도 하고 남이 드러나게 해야하니 물러난 것이기도 하고 아무튼 물러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다르겠죠. 그런데 이곳엔 물을 가두게 하는 장치들이 미약합니다.
남이 드러나면 난 그만큼 이득이 없고 해롭게 되겠죠.
언젠가 그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몇년이 흘러 어떤 사회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응기의 시기가 좀 한 두해가 지나서 되니 늦게 응기한 것이 됩니다. 그당시엔 하나의 것 보다 장기적이고 준비하는 것이라서 바로 응하는 것보단 토대 만드는 일이 있어서 그럴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당시엔 이런 산천이나 응기법을 쓰지 않았지요.
지금은 쓰게도 되니 이런 것을 익히고 있습니다. 주변의 형세를 보고 의미를 파악하기도 하고 사실 물론 가기 전에 일에 대한 대략적인 가늠은 있습니다만 가서는 조금은 구체적인 현실성의 방향을 보기도 하는데 산천이 해석의 지표가 됩니다. 그리고 기문이나 여러 응기를 보는 방법으로 언제 일어날 것인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를 헤아리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는 것은 이런 것도 있습니다.
언젠가 동대문에 볼일 보러 가는데 종로 3가에서 소화기를 던지며 개세끼라고 욕하는 분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동대문의 일을 하지 말고 돌아가야 할 거 같았습니다. 그래도 긴가민가 하면서 좀 기다려서 갈까 하는 꼼수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서점 같은데나 카페서 기다리고 다른 시간대에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자니 영 거시기 했거든요.
그런데 결정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렇게 감정의 아쉬움을 견디는 결단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게 기문을 보자는 것인데 그 시간의 기문을 보고 판단할 생각에 살펴보니 다른 건 기억이 안나는데 이말은 기억납니다. 진흉퇴길 이라고 시간궁이 이랬습니다. 나아가면 흉하고 물러나면 길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실소를 하고 바로 돌아서 지하철 타고 집에 왔습니다. 억지로 뭔가를 하려고 하니 대놓고 돌아가라고 하는 듯해서 멎쩍은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쓰기도 하고 응기라고 언제 그일이 일어날지도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일어나고 어떤 일이고 하는 것도 알 수도 있구요.
그래서 이런 것을 익히면 이런 것을 알게 되니 하는 것인데 꼭 이런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이런 것을 하지 않았는데 그건 응기가 바로 되는 것을 한게 아니고 그런 식으로 바로바로 현실에 대응되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문이나 육임 따위로 그 기간이나 크기나 종류를 한정하려고 하지 않았죠.
그러면서 차츰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으로 마구를 정한게 있는 것이 그전 현통기에 있으니 말이죠.
거기에 지금은 좀 더 기간과 크기와 종류들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먼 일이나 좀 더 상위의 것은 안 그렇지만 때에따라 이런 것으로 제한하면서 그 응기성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건 이런 산천이나 기문이나 이런 것이어야 하느냐면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이런게 있으니 이걸 쓰는 것이고 없다면 다른 방식을 적용해서 할 것입니다.
뭘로 사용하느냐이지 이걸 사용한다고 이게 그런 것이고 그렇게 대단한 것이고 이런식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응기를 보는게 기문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주도 되고 육임도 되고 주역이나 뭐나 여러가지로 다 되는 거라서 하면되지 이거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수학이나 물리학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개념을 번역하는 것이라서 수로 번역하느냐 논리로 하느냐 과학으로 하느냐 음양오행으로 하느냐 십간십이지지로 하느냐 구궁으로 하느냐 그건 자기의 지식의 한계내에서 하는 것입니다.
어디가면 산천을 봅니다.
그러면 뭔일인지 대강 아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절에 가니 그 절의 산천이 이런 것이고 그러면 그런 의미와 내가 가늠하는 의미와 비슷하거나 일관성이 있다면 좀 더 잘 되겠지요. 산이나 도시나 건물이나 다 비슷합니다.
그것을 보고 읽고 이해하고 파악하는 방식을 알려는 것이고 알면 되는 것이고 그러면 행동의 제약을 줄 수 있어서 더 행동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