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개념화

제라울 2018. 12. 16. 20:20


개념화

언어화를 말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 경우를 말하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이런 것도 있다고 읽어야 합니다.

그건 뭐냐면,

일종의 순서 같기도 한데 모색이 있고 감화가 있고 개념화가 있고 언어화가 있다고 하게 되는데 개념이나 언어화가 그다지 차이가 적어서 감화와 개념화(언어화)라고 간단히 해도 될 거 같습니다. 다르지만 대강 그렇습니다.

감화라는 건 말그대로 감잡는 것인데, 어떤 것에 대한 감이 있게 됩니다. 대강의 짐작이나 어림의 폭을 잡는 거 같아서 뭔가 경계를 알거 같은에 막상 개념적인 정의를 내리려면 엉성하고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억지로 하면 아주 못할건 아닌데 성에 안차고 만족스럽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문득 정리되고 개념화가 되면서 언어화가 되어가면 글이나 말로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르게는 시절인연이듯 갑작스레 각성하는 듯이 오는 것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뭔가가 개념이 잡히듯 손에 잡히듯이 오는 것이겠죠. 또는 내면의 욕구가 드러나는 확인을 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감각은 욕구의 발현이라는 근거에서 입니다. 그것이 신성한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발상이든 개념이든 잡생각이든 뭐든 그렇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말이 되어지는 것도 경험하고 이때 말로서 만들어지는 재밌는 체험인데 그전에 감잡은 것이 이렇게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말하게 되어 흥분하며 떠들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려면 모색의 단계 감화의 단계 개념화의 단계 언어화의 단계들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게 어려움이 있는데 하루 이트의 관찰이 아니라 짧게는 수개월이고 수년에서 수십년의 기간이 이렇게 과정을 거치는 거라서 이건 꾀 힘겨운 것이 됩니다.(사실 이것을 단기간에 일어나게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건 이러한 것을 알고 다기간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오래 해야 합니다. 이 작업을 마구라고 대강 말하는데 이것만 따로 말하면 마구중에 이런 과정은 구분 되어야 하는데 이것도 개념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것도 구분될 정도로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찿고 삼아 보시길 바랍니다.)

그게 아니면 어떤 사회의 사건을 보거나 정보를 접하거나 빌미나 계기가 다가오는 여러 접촉의 동기가 되어지면 생각이 진행되고 구분되며 개념적 관계설정이라든가 정의하듯 이런 저런 규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건 경험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뭔가의 감으로서 있을 때 대강의 흐름을 이해합니다. 그 감으로 뭔가 의도하게 되는데 그 감 잡는 것이 구현되는 현상을 위해 책을 읽거나(이때 책을 딱히 뭘 볼지 알아서는 아니고 이거 저거 나름 생각나고 보고 싶어지거나 눈에 그냥 띄거나 접하게 되는 것을 읽다보면 감 잡는 것과 연관된 것이 보이고 한정되게 하는 개념이 있는 것도 보며 맥락이 비슷한 내용이 있기도 하는 거라서 이런 책을 읽어가는 것조차도 하나의 맥락에서 흘러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딘가를 가게 되거나 누군가를 만나게 되거나 뉴스를 접하거나 들려오고 보게 되고 다가오고 나가고 하는 일상이 일어납니다. 물론 하나의 이런 맥락만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사는 것을 보면 대부분이 무의미한 것들일 거 같고 사소하고 습관적인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 합니다.

일어나고 밥먹고 씻고 옷입고 걷고 차타고 이거 저거 먹고 이거저거 잡담이며 이거 저거 본거 또보고 한거 또하고 그런 사소한 것들이지 거기에서 뭐가 계기가 되고 기틀이 되는지 알 수가 없는 게 많습니다.

그런 것에서 계기를 인식하고 감 잡는 것이 있으며 서서히 사소함이 사소함이 아닌 것으로 접속되어가게 됩니다.

즉 이러면 감 잡았기 때문에 뭔가 감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일상에서 특이한 계기성이나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고 해석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의미부여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면 그 감잡는다는 것이 있기 이전이 있게 됩니다.

굳이 그런 것이 감잡아지느냐 인데,

이것이 어떤 것이 감잡아지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니다.

그건 우선 내가 관심가지고 신경쓰고 그래야 한다고 그랬으며 하는 이런 소원, 바람,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 바람이 곧 일상으로 나타날 때 쯤 감잡았다는 일이 일어 납니다.

그냥 내 안에서의 바람, 생각, 고민이었던 것이

외부로 접속되어 갈 때,

외부를 불러올 때,

외부를 설정해 갈 때,

그것의 기미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그런 분위기가 배경이 구현되어 가면서 감잡기가 일어 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진행되고 거역하기 힘들 당연함의 현상으로 나타날 때가 되면 언어화가 됩니다

즉, 언어화는 이미 구현성이 일어나게 된 것이고 일어날 때가 된 것이고 그리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래서 아무 말이나 하지 않으려고 하게 되죠.

이러면 좀 이상한 순서가 있습니다.

그건 이미 감 잡기 전에 소망하거나 바란 것이 있었는데 이 바람이 하나의 개념이고 언어로 된게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미 개념인데 다시 감 잡고 개념화 되면 이게 뭐가 다른 것이냐가 되죠.

그런데 여기선 다른 것이 있는데 처음의 모색의 단게에서 바라는 것이 이념 같아서 하나의 방향이거나 추상적인 개념이 됩니다. 이후의 개념화는 현실 구현성을 말하는 거라서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개념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으로 된다는 것인데 이상이 실현되는 간단히 이걸 말하는 것인데 이러려면 먼저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의지라든가 뜻이라든가 목적이라든가 그런 것이 있어야 그에 따른 바람을 가지고 그 바람이 모색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바람이 이루어지라는 오랜 숙고가 됩니다. 그 숙고가 외부에서 준비되고 받다들여지고 구조되어가는 것이 있게 되며 그것이 결국 이루어지는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게 감 잡아 가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말을 하는 것은 그 말을 하게 되는 깊고 오래된 흐름이 있다고 하는데 이걸 모색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된 바람의 이어짐이 있고 아픈 마음의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연처럼 오는 두려운" 이라는 글로 쓰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개념이 정리된다는 것은 그 개념에 해당하는 현상이 외부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이나 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아무 감정이나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언어, 사고, 행동에도 그것을 위한 이어지는 과정이 있게 됨을 알게 합니다.


감각의 예민함을 이루어야 하는데,

자천과정에서 또 일상에서 사람들은 압도적인 체험을 갈망합니다.

각성체험도 천지가 뒤흔들만한 감각을 원하고 영적인 현상들도 그런 경이적인 것이어야 더 대단하고 그러한 것을 원하고 추구하며 그것을 진가구분의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린 더무도 쉽고 무의미한 듯하게 지나가는 의식의 환기나 전환, 생각의 들고 남이나 감정이 변덕에서 너무도 많고 깊은 가치들이 지나가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큰걸 바라면 작은 것이 안보일 것이고 작은 거만 보고 있으면 거대한 방향을 놓칠 것입니다.

누누히 강조하듯이 크게 보고 작게 보는 유연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글을 쓰지만 서두에 말했듯이 내가 이런 것이 있는데 다른 분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모든 존재들은 이러한 것이 있을 것인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걸 감각할 수 있는냐이고 이것도 개념이라 이러한 개념을 인정할 수 있느냐이고,

또 자천하다보면 내외가 일치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 이러한 것이 되는 구조가 형성되어감을 인식하며 자천했느냐로 이러한 것을 더욱 발전시키거나 그 들고나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어디의 외부에서 온 것이고

나 혼자만의 생각이 어디의 외부로 구체화 되어가는지를 전체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파악하며 산다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인데 이런 것이 도덕이겠지만 왜냐하면 살아가는 것이고 삶이 도라고 했으며 내외의 교류이고 나와 전체가 하나이며 내가 하늘이고 우주이며 하늘과 우주가 나이며 이런 일체유심의 경지를 이어갈 수 있게 형성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긴 합니다. 이것도 불교에선 모두가 여래장이 있고 그것을 알면 바로 부처 된다고 하는 것이 되지만 중간에 너무도 많은 것을 생략한 것이 됩니다.

이게 새로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구나 이러한데 얼마나 개념화하고 자각하며 선명화를 이루었느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뭐든 새롭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것을 얼마나 재획득했느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누구나 부처인데 알면 부처이고 모르면 필부가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리 말하기만 해서 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우주내의 존재지만 누구나 우주와 함께 살지는 않습니다.

우주이전에 이 사회가 흘러가는 것만도 따라가기 벅차하고 가족이 살면서 나이들면서 사회생활 경제생활하면서 달라지고 변하며 삶에 지쳐가고 오염되어가면서 고착화되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까운 가족과도 유대하기 힘들고 공감대 형성하기 힘든데 우주와의 비교는 지랄하는 짓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잡아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데 그 이유가 냉정하지도 않고 다양한 시점을 인정하기 힘들어하고 자기의 관찰에서 어디로 빠지고 있고 왜 그런 심리가 있으며 판단하는 것의 근거를 확실히 알지 못해서입니다.

판단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대개는 자기의 감정이고 성격이며 기호이게 되는데 이런 것이며 이미 감이 아니고 의미부여도 아니며 사적인 욕심이고 관심이며 그이상이 될 수 없게 됩니다.

누구나 느끼지만 누구나 느낀 것이 되지 않는 것은 공의 각성이 미흡함이며 자천의 불철저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두가 의지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모두의 바람이 갑 잡아지고 개념되고 구현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중에서 그래도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감잡아지는 것이고 구현되어 갈 것입니다. 그걸 위해 장치도 하고 있는 것인데 어떤 것이 구현으로 가는냐는 시대적인 것이 있고 도덕적인 것이 있으며 자천자는 얼마나 철저한 도의 체득이 있느냐가 되겠죠.


개념을 보기 위해 어떤 개념들이 있는지 알아보려면 내가 개념이 없어야 하고 개념의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했는데 개념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개념이 있어서 그것으로만 보려하는데 이미 결론난 개념으로만 사는 것이어서 입니다.

다른 개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겠죠.

자기가 어떤 개념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고 그러니 그 개념을 어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 되겠죠.

개념은 소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개인적인 것인지 개인적인 것을 전체나 도덕적인 것이라고 우기는 것인지 그건 알아보기 쉽기도 어렵기도 합니다. 이건 남이 오히려 알아보기 쉽죠 본인은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감정이라 이게 왜 아니라고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는게 일반적인 반응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감정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성격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삶을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에서 나오지 못하니 모두 그렇고 모두 그러하니 개념을 모색하지도 감화되지도 개념화되지도 구현화 되지도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도 닦는 목적이지만 이게 도라고 아는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서 나에게로 다시 나에게서 하늘에게로

이말이 지금 쓴 글을 간단히 한 말인데, 과거에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인데, 이게 이말로 누가 알 수 있을지요

앞의 하늘과 뒤의 하늘이 다른 것이며 앞의 나와 뒤의 나가 다른 나입니다.

이 말이 이해 안된다면 제차 본문을 읽어보면 됩니다. 본문을 정리한 명제이니까요 개념입니다.

그래도 설명을 해야 되겠죠

하늘에서 나에게로는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각성해서 성취해가는 것입니다. 자천이지요

나에게서 하늘에게로는 공부한 것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타행이나 도덕행이나 자비이겠죠. 역시 자천입니다.

이걸 통틀어서 도라고 합니다.

배워서 남주라는 것이죠.


보충해서 말할게 있는데,

모색하고 감화 한다고 하는 것이 있을 것인데,

모색에 대한 것에 두가지라고 구분할 게 있습니다.

우선 위에 뜻이나 도덕이나 이런 말로 했던 것은 자천하는 사람이나 해당하는 것이고

보편적으로 누구나에 대한 것은 이렇다고 봅니다.

즉 딱히 모색이라고 할게 없을 것입니다.

모색은 능동적인 의미로 한 말이고 대개는 욕구입니다.

그냥 그러고 싶은 것이지 별다른 이유도 모르고 근거도 없으며 있어도 사회적인 것이고 감정채우고 달래기 위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즉 하루 하루 사는 이유가 돈벌기 위함이거나 사회적인 성공을 위함이거나 가정을 위하고 자기의 욕구 충족을 위하는 그정도의 일상입니다. 이것이 정상이겠죠.

거기에 이러지 않고 싶다 하더라도 뭘 해야 하는지 뭘 어찌해야 모색을 하는 것인지 하고 싶어도 모르는 것이 또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런 것을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가가 있는데 대다수가 이렇습니다.

이걸 거치면서 더 성장해가면 모색하는 것이 뭔지 알게 되고 그로인해 차차 해가는 것을 하겠지만 여기로 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는데 우선 가르쳐 주는 곳이 없고 이걸 아는 사람도 없으며 이걸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게 현실입니다.

아무도 도 닦아서 해야 할걸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나름으로 해가는 곳도 있을 것이겠지만 나도 그렇게 목소리가 높지 못해서 어떤면에선 나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무나 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 내외일치라고 했으니 이걸 잘 생각하면 생각대로 세상을 좌지우지한다고도 되어서 위험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분명 그런 면이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식이 아니어서 오해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차라리 오해 하는것이 두려움을 모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행하기 어렵고 행하기전에 알기도 어렵고 또 그전에 이걸 하라고 하는 것도 권하지 못하는 것이긴 했으며 과거엔 그러했지만 지금은 공개해도 역시나 아는 사람만이 다가오는 것이지 그다지 노출아닌 노출이 되고 있습니다. 이게 목소리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중모색 이것이 내가 하는 것이며 그 암중으로 모색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며 고대와는 다르게 이것이 암중모색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가 사라진지 수천년이고 다시 그것을 드러나게 하고 있다한다면 사라진 것이 이러한 것을 가르치기가 힘들고 알려는 사람도 흔치 않고 가르쳐도 배우지 못하기도 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도이며

이런 것은 아무리 말해도 빙빙돌리는 것 같아 혼란한데 그건 이런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모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천이고

모색해 가는 사람이 자천자가 되며

모색한 것이 또 자천입니다.


그래서 암중모색이 아니라 명중모색이 되는 것이 일어날 것인데 그것을 위한 암중모색이 있는 것이긴 하죠.

중요한건 모색이니 암중이나 명중이든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명중에서 모색한다고 그사람이 도를 닦은 사람인지 아닌지 일반인이 알 수도 모를 수도 있고 어설픈 도 닦은 사람들도 알 수도 모를 수도 있죠.

왜냐하면 모색만 하면 되지 그게 암이든 명이든은 부차적인 것이니까요

다들 자기의 지적 한계내에서 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한계라는 인식도 없으면 뭘 알게 되는게 아니라 남이 알려준거나 줍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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