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상을 이루면서 하나의 이념을 만듭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 상을 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 즉 용을 하게 됩니다.
배우고 행동하며 주장하는 그러면서 자신의 지식인 상을 제시하면서 요구하고 강요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상을 역시나 체라고 배우고 받아들이며 살게 되고 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것이 엮이면서 맞물려 흐르게 되죠.
처음부터 상이었고 그 자가 성인이든 신이라고 하든 무엇이라고 하든 상인데 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엉성함이 있고 상인데 체라고 보는 이후 사람의 어리숙함이 또 있으며 이런 것을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어리섞은 사람들이 있는 것인데 여기에 이런 글을 보면서도 자신은 예외라고 여기며 아닌듯이 하거나 별다른 성찰이 안되는 한심함도 보이겠죠. 이 글 역시도 상인데 그것도 알면서 읽어야 겠죠. 제 욕망에 맞는 상을 구성해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떻다고 하든 상이고 상은 그 사람의 삶에서 즉 용에서 나오니 그냥 용이며 체는 그저 그렇게 있기도 없기도 하며 다양한 용을 허용합니다.
그렇게 보고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살아가니 용이고 그렇게 본 것을 보았다 하니 상입니다.
지식은 용이기도 상이기도 한데 행동에 필요하니 용이고 상에서 나온 것이라서 상입니다.
행동도 용인데 뭔가를 이루려면 목적을 두면서 행동하는 것이니 용입니다. 상은 스스로 이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고 그렇게 보는 것이 뭔가를 의도하면 용입니다. 상이 용이 되고 용이 상이 되는 것입니다.
상은 나와 모든 삼라만상이 가지는 삶에 대한 생존에 대한 이상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과대하게 보고 위대하게 보려고 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이런 것과 반대로 위축되고 죽고싶고 열등하다는 것을 깔고 있게 됩니다. 이러한 욕망들이 그렇게 보이게 합니다. 나무는 나무로 동물은 동물로 모든 존재는 자기를 표현합니다. 그게 생명이라고도 합니다. 표현해가는 것이 생존이죠 이런 자기 드러냄이 상입니다. 드래낼려고 보일려고 자랑하려고 그것이 위대하려고 대단하려고 힘을 가지려고 전체인양 본체인양 가장합니다. 그것이 안될까봐 위축하고 수그러들고 왜소해지며 죽으려고 하며 소멸하려고 하며 숨고 싶어 합니다. 상이란 이런 것일 겁니다.
용은 내가 외부에 남에게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나무가 스스로 드러내는 것으로 보면 상이고 그것을 그러한 나무로 보면 용입니다. 나무가 내 피부는 딱딱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누리가 나무를 그렇게 봅니다. 나무는 생존하기 위해이든 다른 목적에서이든 그렇게 생겼지만 우린 대수롭지 않게 나무는 껍질이 있고 얼마나 자랐고 그렇게 쉽게 말합니다. 즉 용은 내가 보는 사물이고 세상입니다. 관점이고 관법이고 임으로 세상을 다루며 제어해가는 것입니다.
심하면 폭력이고 자애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며 억압이기도 합니다. 나에게서 나가서 외부로 가서 뭔가를 하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과 용은 방향이 같은데 치중하는 곳이 다릅니다. 즉 나에게서 나가는 것에 중점이어서 살아가려고 존재하려고 하는 것에 치중한 것이 상이고 그러면서 저 이상과 위대함을 꿈꿉니다. 용은 내가 살아가려고 외부를 다루고 지배하려고 하는 것으로까지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권력적인 지향성이 나타납니다.
거기에 상과 용을 딱부러지게 분리하자는 것은 아니고 어느쪽에 가깝냐가 있지 딱 이거라고 정의되지는 않겠죠.
용과 체의 차이는 그런것으로 보겠다고 임으로 하면 용이고 그런거 같나? 하며 사실에 대한 의문성을 두는 것이니 체입니다.
체도 용이 되는데 역시 그렇게 여기면서 살면 됩니다. 체라고 딱히 뭐는 아니고 용이 되는 것이죠.
체가 있는 것은 어쩌면 질문의 잘못입니다.
뭐가 있냐 진짜가 뭐냐 근원이 있냐 본체는 어떠냐 하면서 궁극적인 질문이 들어가면 체는 나타나면서 사라집니다.
나타나는 것은 그런 질문을 하니 그런게 있나보다 하고 사라지는 건 해답이 없어서 사라집니다.
용만이 실재이고 체는 요구하면 결국 사라집니다.
이런 것이 그다지 의도를 모르겠고 쓰잘데기 없는 짓이기도 하는데,
논리적이라고 하고 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해서입니다.
사고하는 것에 순서있고 명분있으며 근거 있는 것이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건강하게 해야 하는데, 경험하고 보고 느끼는 것을 순서 지우고 그럴듯하게 그림 그리고 구조를 만들어야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괴이하지도 않고 힘들어도 견디며 유연해지게 됩니다.
생각도 나름의 체계와 관계가 연결되어 있고 그럴듯한 정합성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으며 흔들려도 돌아오고 그런 마음과 사고체계가 있어야 행동이 일관성이 있고 그러한 행동의 일관성이 마구의 순서가 되고 깊이가 되며 체계적인 흐름으로의 드러남이 됩니다.
마구 이전에 마음의 불규칙성이 사고의 불규칙이 되어가며 이러면 살면서 남과의 관계나 일어나는 일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마음의 상처가 되며 아쉬움이나 소외감이 되어 갑니다. 사고의 불규칙성이나 정합성의 미흡이 이런 불안하고 험난하며 광대한 세계에 왜소하고 자기위주의 작은 마음과 생각으로 그저그런 삶이 되어 갑니다.
외부를 접하고 내부가 대응해가는 방식에서 우리의 제각각 자아라는 삶의 질이 되는데 여기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만큼 세상은 두려움이나 상실을 주는 곳이 됩니다. 그러하면 자천은 이미 어렵고 마구로 가는 길은 멀어지게 되니 이런 것을 차근히 연구하고 배우며 사고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체계세우고 구조지우고 합리성을 이루어가는 것이 마음을 다루는 것이며 맑게 하는 것이며 공부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수련한다는 것을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마음을 닦는 것은 분명 어려운 것입니다. 공이라고 하든 비우라고 하든 온갖 방법으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우선 모든 사물이나 감정이나 공으로 인해 중요성의 순서가 평등함을 알아야 하며 그로인해 체계의 의미성을 인위적인 것이 됨을 이해하는 가치기준의 변혁을 하는 것이됩니다. 즉 자아에서부터 신에게까지 인위적인 억지 설정이지 그것이 진실이라고 아는 것에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즉 무든 것을 용으로서 설정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로 보면 곤란한 것이죠.
비워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의미 만드는 것이고 어떤 마음이 만들어졋는지 알기 위함이며 이걸 알아야 다른 마음으로 생성시키는 것이 됩니다. 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니 그냥 본다고 보이는 것도 비운다고 비워지는 것도 아니라서 보이지 않는 것은 비우지 못하며 보기 위해선 그에 맞는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해하기 쉬운데 알아야 보이는 것이라서 알아야 마음이 발견되고 발견되어야 그것을 다루게 됩니다.
이런 변혁을 하지 못한 마음이 무조건 나쁘거나 더럽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로인해 자기가 상처입고 남을 힘들게 해가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하며 변하기 위한 버림이고 정합성을 가지기 위한 버림이며 논리적인 순서와 마음의 체계인 그림을 그리기 위한 버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일어서기 위해 앉아 있음이고 더 나아가기 위한 자기 돌아봄이 됩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사고의 어긋남을 가끔 봅니다. 자주이기도 하구요.
스스로는 모르지만 논리적인 오류가 있죠.
그것이 오류이거나 잘못 짜맞춘 개념들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고라는 것에도 순서가 있고 생각에도 방법이 있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흔련이 안되기도 하고 그러려는 의지를 내지도 않고 배움에 마음을 내는 것조차 수비지 않으며 힘겹게 하는 공부를 싫어하고 쉽고 간단하며 노력없이 성과만 보려는 성급함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치를 알고 체득하는 것에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 이런 간단한 것조차 외면하는 둔감함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고의 오류가 그사람은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에서 마음의 상처입게 되는 원인이 되고 불만이 쌓이게 되며 억울함을 가지는 이유가 되는데도 운명탓을 하고 세상 탓을 하고 남 탓을 하면서 이런 것도 역시 습관적인 하소연이고 버릇이라 쉽게 고치지도 않고 고치는 것임을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에 구조가 있고 사고에도 체계가 있으며 그것이 어떠하냐로 인해 이런 결과들이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억울하다고 감정이 들면 그런 감정이 들게 만든 마음구조가 있다는 것이 됩니다.
소외감을 느낀다며 역시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안에 있고 사고에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군의 눈엔 대화로 하면 대화의 오해나 오류나 틈이 발견되기도 하고 행동에서 보이기도 하며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설명해주고 알여주어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도 마음구조가 필요하고 생각체계도 있어야 하는 것이니 어려운 설명이 됩니다.
이런 것을 자천에서 말하는 이유는 자천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고 더나은 사람이되어가는 것인데 정상적이고 건강한 마음과 사고를 가지게 하는 것부터라서 입니다.
그위에 상위적인 성취를 추구하는데 이런 기초적인 건전한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의 자천은 불안한 공부가 되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