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상용에 대한 이해가 쉬운 듯하면서 어려운데,
용이라는 것은 다루고 있는 그것이거나, 다룰 수 있는 것들이거나 그럴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냐 하는 완벽한 뭔가라는 식의 정의는 체라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알 수 없는 역설에 빠지기 때문에 확정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결국 용입니다. 체용론에서 체라고 하는 그것들이 사실 용입니다. 용을 체라고 말하거나 아까 말한데로 상을 체라고 하면서 다들 혼란 스러워 합니다. 거기엔 체를 아는 것이 도를 아는 것 같거나 근원을 아는 것이 되거나 깨달은 것이 되는 것처럼 해서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그런 성취를 이룬 것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러하고(상) 그렇게 쓰는(용) 것이지 정말 그러한지는 모른다는(체) 것입니다.
물론 이게 다이고 결국 체는 모르는 것이냐라고 하면 자천에선 아까 말했듯이 그게 아닙니다.
앎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되며 그런 어떤 선을 넘어가면 다른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상당히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인데 많은 사람들이 또 쉽게 이걸 이룬듯이 말하는 오해가 있어서 이 글을 쓴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선 산다는 것이어야 하고 뭔가 있다는 것이어야 하며 감각한다는 것이어야 하며 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용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존재하는지 그건 다른 것이지만 일단 우린 그렇다고 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스마트폰이 지금 내 손에 있다고 치고 살아갑니다. 집이 있다고 치고 살며 옷을 입었다고 치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이쁘게 입었다고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있다치고 삽니다. 정말 그러하냐고 다시 물으면 그때부터 우린 다른 지적 체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여긴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나오긴 쉽습니다. 누구나 나와 살기 때문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극소수라 다수의 것을 익히기 쉬우니까요
그리고 용은 이렇게 있다치고 그렇다 치고 하면서 어떤 주관이든 세계관이든 우리가 보는 방식이 있다는 것인데 그 방식, 방법, 관점 그것이 상입니다.
돈이 100억 있습니다. 이것도 분명 사회의 체계와 가치관과 욕망과 다양한 것들이 모여서 이루이진 개념입니다만, 분명 뭔가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때 현금이라고 하면 현금, 금덩어리면 금, 수표면 수표, 은행통장이면 통장의 방법이 용이고 그것이 100억이라면 그런 상이 됩니다. 이 상에는 돈이 많으면 좋은 것이고 지금 시대는 그래야 하며 돈의 여러 체계나 생산수단들, 그런 관념들 금융 체계나 그런 것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금용의 욕망이나 돈의 욕망이나 자본주의의 욕망이 그런 체계를 만들었고 그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통장이라는 것이 종이인데 또 은행이라는 체계, 은행이 될 수 있는 사회체계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상이며 그것을 그런 것으로 보는 것이 용입니다.
사실 잘 생각하면 용이나 상이나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있다는 것은 결국 있다는 것이 뭐냐는 질문이 있게 되며 이래서 있다는 것은 상인데 그것을 그러한 것으로 본다면 용이 됩니다. 용과 상이 서로 갈마들면서 의지하는 거라서 하나만 때어서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개념적으론 대강 구분하지만 실재론 구분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확정짓지 못하는 식으로 말해가면 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체상용이 하나의 사물에 있게 됩니다.
우린 일상에서 사니 분명 용입니다. 그 일상을 살면서 감정 생기고 관점 생기니 상입니다. 근데 정말 우린 사는 걸까요 뭘 산다고 하나요 하면서 의문이 드니 체입니다.
그래서 일상에서나 거의 대부분에선 용과 상만 다루고 있습니다.
체를 다루거나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그사람이 이런 체상용의 구조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인지 그것을 따져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공이 됩니다. 인도식이든 유럽식이든 차이나 식이든 어떤 나라 어떤 공부식으로 하든 공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공이 아니라 다른 언어로 말한다 해도 결국 비슷한 것이 됩니다.
오시리스도 신체가 잘려서 다시 붙이며 결국 성기가 없어집니다. 이런 것도 공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신체를 극복하는 것은 감각을 넘어가며 언어를 넘어가는 것인데 다른 개념으로 말하든 어떤 비유를 들어서며 말하든 결국 체상용이 됩니다. 상을 이해하려면 이데올로기식의 비판력이 있어야 하며 철학적인 논리력이 있어야 합니다. 회의로 시작해서 자기비판과 합리적인 사고력을 기르는 것인데 회의를 통해 하는 것을 보면 결국 거기도 공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얼마나 철저하느냐는 그 학문의 질적인 것이 되지만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미 수학도 자기비판에 의해 수학이 완벽한 학문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어서 수학이 젤 더딘 발전이었는데 이렇게 자기의 불완전함을 모르는 학문은 수준이 낮은 학문이 됩니다.
이러면 자기의 불완전함,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역시 그만큼 덜떨어진 것이 됩니다. 음 비약일까요? ㅋㅋ
그래야 상을 이해하고 상을 알아야 용을 말할 수 있어서 그로인해 체에 대해 접근하기 위해서 지식과 앏의 방법론에 대한 변혁이 일어난 이해력이 형성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도의 닦음은 결국 엉성한 자기 위안이고 같지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니 뭔가 안다면 이러한 체상용의 체계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어를 이용해 말하고 자랑하고 주장하니 언어를 듣는 분들에게 언어에 대한 경각심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보면 역설을 말하게 되며 개념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으며 비유적인 것이나 사실과 은유에 대한 이해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이 이미 왜곡이고 들으면서 왜곡이고 전하면서 왜곡이고 글로 왜곡이고 생각하는 것이 왜곡이고 감정일어나는 것이 왜곡이라서 이미 이런 6개는 기본으로 깔고 왜곡이 중첩되는 것인데 자기의 주장을 어떻게 쉽게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이 젤 의심스럽고 보았다는 사람의 감각이 심히 의아스러우며, 체험했다는 과정의 번역이 억지스럽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과정도 정밀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앎이나 감각이나 체험은 결국 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