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
글을 쓰고 싶은 것은 많은데 눈과 뇌에 문제가 생겨 점점 힘들어서 못하겠다.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만다.
이글도 그냥 넘어가려다가 왠일인지 쓰고 싶어서 해본다.
예전부터 알고 싶었던 것중에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화합해서 나라는 하나의 사태가 형성되나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어떻게 이러한 것을 연구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고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알 수 있을지 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가닥이 잡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도 그저 한 두가지 관점일 뿐이다.
불교에서도 우리가 인연의 화합물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서 어떤 인연들이 모여서 이런 사태가 되나가 된다. 인연이라고 하면 전생의 무슨인연식으로 이해하는게 보통인데 그거보다는 과학적으로는 여러 원자 분자 원소나 그런 것이겠지만 그런건 그곳에서 연구할 것이고 그외에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서 볼 수있느냐면 우선 명리학류의 것으로도 하겠다. 원래 천문으로 해야 하는게 먼저인데 내가 순서대로 배운 사람이 아니라서 천문은 잘 모르겠다.
또 산천학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여기엔 풍수에 대한 이론도 알아야 하고 지금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것도 섞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라서 복잡하다.
그래서 만만한게 명리다.
명리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이런저런 조건들이 있어서 그런 조건들의 이러저러한 조합으로 이러저런 인생을 산다고 말한다. 그런 조건들을 보면 명리가 말하고자 하는 즉 명리가 보려는 단면을 알 수 있다.
그런 명리가 보려는 것을 알면 그러한 것만으로 해석하면 되고 그외의 것은 명리가 아니니 그냥 모른다고 해야 한다. 이러면 조건들이 도대체 얼마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식으로 보면 다르고 이렇게 보면 이렇다면 보는 방식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모여서 사태를 만드는지 모른다.
10개 100개 1000개 10000개 십만개 억개 그렇게 딱 부러진 숫자가 있으면 좋지만 그렇기 보다 정해진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어렵다. 보기따라 다른 인연, 다른 조건, 다른 관계들이다.
하나의 사물같은 존재로 있는데 그것이 형성하게 된 요소들을 딱부러지게 정할 수 없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다. 우리가 온전하게 존재하는 듯하게 보이는 것도 착각이라서 그렇게 온전한 원칙을 정할 수가 없는 것이라서인데 이걸 인정하는 것도 수월한건 아니다. 존재가 단정해서 그렇게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없고 한 순간을 분절해서 말하는 임시적인 말이다.
명리적으론 나에게 있는 조건이 다른 사람에겐 없고 남에게 있는 것이 나에겐 없는 것들이 있다.
비슷하지만 다르게 있고 다르지만 비슷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요소처럼 구성물이 아니라 일종의 도식이고 구조라서 같은 요소로 다른 구조적인 효과를 내고 다른 요소가 같은 결과를 만드는 구조가 되기도 한다. 요소라는 것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런 것이 있는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요소적인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구조라는 것도 변하고 해체 재구성을 하는 거라서 이거역지 일시적인 현상이다.
즉 어떤 요소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요소가 같은데 결과가 다르게도 되는 것이어서 그렇다.
그래서 무엇이 있다. 무엇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이 이런 저런식의 결과를 만들어간다고 해야 한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뭔가가 존재하는 것이고 뭔가의 사태가 있다고 하는 것이라서 결과적인 현상들을 말한다. 그리고 결과는 다른 결과로 넘어가면서 완성되지 않는 듯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 요소들도 처음부터 정해지긴 했지만 변해가는 시간상의 변화도 있다. 시간에 따라 다르게 결과를 만들고 또 공간상에서도 다르게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건 참 해석하기 난감한 것들이다.
시간이 다르고 공간이 다르면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이 일관성 없는 해석이 되는 것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이것도 나름의 규칙성이 있어서 그 규칙성이 사태를 만들어간다.
사태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하는 단어이다. 사태이지 존재가 아니고 사물도 아니고 그때그때의 하나의 사태로서만 있는 것이다.
근데 사실 명리가 너무 엉성하긴하다.
그것으로 못보는 이순간의 조건들을 알 수도 있지만 그래봐야 몇개 안되는 것들이고 나머지는 결국 우리의 눈을 지나가면서 사라진다. 다른 기문이나 육임을 이용하면 더 많은 구조들이나 조건들을 알 수 있는데 그건 하기 나름이고 거기에도 나름의 규칙성이 있다.
이런 명리를 공부하는 이유가 정해진 규칙을 알려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알려는 것이 정해진 뭔가를 미리 알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은 것을 알려는 것이다.
미리 아는 것은 무엇이 일어날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외의 다른 변수나 불확실한 것을 알려는 것이다. 정해진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며 언제나 다른 것으로 흘러가는 것이니 다른 것을 찾으려는 것이며 차이를 알려는 것이다.
정해진게 아니라 차이를 알려는 것이 인간의 욕구이다.
인간이지만 내가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선 정해진 것이 너무도 많다. 인간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긴 때문에 정해진것과는 상관없다.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서 팔이 있지만 나에게 팔이 있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로인해 무엇을 하느냐이고
인간이라서 지식이 있지만 내가 지식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가는가가 있다.
그리고 굳이 명리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무언가와 또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어떤 운들이 오고가고 그런 것을 알아간다면 저런 말이 필요한건 아니다.
누군가가 있다면 난 거기에 어떤 관계를 형성할지 이미 정해진 규칙이 있다. 내가 윗사람인가 아랫사람인가 배우는 사람인가 가르치는 사람인가 친구인가 선후배인가 의례적인 만남인가 지속적인 만남인가 오래지내나 단기간인가 감정적으로 힘든가 편한가 불편한가 불편도 사람으로인가 사물로인가 서로간의 성향으로인가 이런것도 너무 거칠게 구분하는 것들인데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나이외에 것과는 분명 관계를 형상하고 그러한 관계형성으로 사태가 일어난다. 그런 사태는 그로인해 결과를 야기해야해서이다.
이런것이 자꾸 쌓여서 장기간으로 이어지면 삶이 되어 거기엔 삶의 사태라는 범위에서 의미를 도출하게 된다. 이 삶에 어떤 것이 일어나고 결과를 얻고 반응하는가가 이후의 존재사태에 주된 조건들을 형성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습관되고 규칙이 되어 쉽게 바꾸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결과에 대한 평가가 원동력이 될 것이니 이런 것을 알면 좀 수월하게 조건들을 완화하고 변형하기 쉽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고 해오던 것을 하려하고 감정적인 만족을 추구하면서 이런 인연들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결국 조건이나 인연이란 여러사태들의 굳어진 규칙이고 방향이며 그에따른 반응들이 오고가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변화하고 알아야 다른 것을 원할 수 있고 알아야 덜 갈등하고 알아야 덜 번뇌한다.
단어를 조건이나 사태나 인연이라는 것들로 말했지만 점점 단어들의 명확하 사용에 그다지 신경을 덜쓰게도 되었는데 단어보다는 문장의 의도가 더 중요한 거라서도 그렇고 머리가 나뻐진것도 같고 아무튼 이거외에 배치나 안배나 감응이나 설정이나 변수나 어떤 것으로 말하든 비슷하게 말하게 되는 거니 말의 의미가 파악된다면 단어에서 자유롭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