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강마을

온건 되돌아온다

제라울 2020. 10. 5. 14:50

질문에 답하려고 쓰긴 했는데 설명이 좀 장황합니다. 부족하면 또 해주시고 그럼 또 열심히 답하겠습니다고.

 

제라울 : 좌선을 하면 (호흡이나 명상이나 호수를 외우는 것이나 산책을 하거나 무예적인 동작을 하거나 가만히 앉거나 서거나 어떤 자세로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면 다 좌선이라고 대강 말하고요)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처음엔 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달라서 그다지 별 생각이 없는 경우도 있어서 이것도 체질이거나 성향으로 그런 차이가 나는 듯이 보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 중에 기라고 하는 것이 가슴으로 가면 감정적인 느낌이 있고 머리로 가면 사고가 일어나는데 그래서 양적인 체질이라 가만히 있기 힘든 사람들은 그만 큼 생각도 많고 기운이 불안정해서 그 불안정함이 생각의 많음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기운의 불안정함이 기가 불완전함이 아니고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요동이 많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죠 

성격은 급한데 별 생각이 없을 수도 있어서 이것도 각자 다양한 상황이 있을 것이니 꼭 일반화할 건 없죠

그런 생각이 많고 끊이지 않는 것이 안된다고 하는 곳이 있어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거부하려고 너무 애쓰다 보면 그것이 오히려 탁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생각이 많은 것이 탈 나기보다 그것을 억누르면서 탈 나는 게 더 심할 것이죠

그러니 너무 억누르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권하지 않게 됩니다. 

 

돕니 : 그럼 생각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어?

제라울 : 생각이 사라지는 경우가 세가지 크게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체질상 수월하게 그리 되는 경우가 있을 거라고 봐요 난 아니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다지 생각이 없고 그것으로 좌선을 계속하다 보니 별로 잡생각 없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죠

둘은, 어떻게든 잡생각을 안하는 것으로 단련을 한 경우가 있겠죠 이게 쉬운 건 아닌데 하다 보니 또 오래 해서 그렇게 된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건 생각만 줄어든 것이지 그에 따른 도의 경지가 성취된 것은 아니라서 말 그대로 생각이 준거지 그게 다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잘 되고 있는 것은 맞죠

이것을 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오랜 수행의 기간이 있어야 하지만 또 다르게는 주변을 정리하고 그다지 사람을 만나고 갈등하고 사회생활하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부대끼는 생활을 적절히 또는 거의 끊고 살거나 그렇게 정리가 어느 정도 된 환경에서 사는 것이 된 경우입니다. 주변이 조용하면 생각도 조용하다는 것이 되어서입니다.

셋은 도의 경지도 함께 이루어져서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 경우인데 가장 바람직하다지만 가장 힘든 경우입니다.

 

제라울 : 좌선은 하면 할수록 분명 그에 따라 생각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이래야 하는 것으로 알면 그게 방해되는 것이라서 이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구해야 한다고 해서도 좀 잘 못 이해되는 것이기도 해서 그 적당한 마음 씀이 필요 한 부분입니다.

이런 것일 진데 그러다 보면 시간의 건너감도 경험하고 별생각 없이 한참을 있게 되는 것도 경험하고 다른 것이 보여서 시공의 혼란함이나 삼매에 든 거 같은 착각을 보기도 하고 여러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런 건 좌선 중에 겪는 다양한 현상 중에 나타나는 것이라서 이것이 공부의 진행으로 오해하거나 잘하는 것으로 여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체험이 공부의 진행이고 어떤 체험이 지나가는 현상인지를 알기는 좀 어려움이 있으니 이건 처음엔 다른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습니다.

영적인 현상이나 어떤 감각에 현혹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런 것은 분명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도의 진전으로 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초보자는 안되니 도움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죠

도움받는 것도 쉽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지를 굳게 세우고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하면서 좌선을 해가면 됩니다. 다른 것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죠 이것도 너무 억압해서 보이는 것을 억누르거나 느낌을 막으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마음씀이 다른 탈을 만들기도 하고 그런 것은 자신의 길이고 성향이라서 그런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그런 것에 따라가거나 확장하려고 하거나 보이는 영상이나 능력을 사실로만 알아서 인식능력에 왜곡이 되면 곤란하니 부디 이런 경우는 조언을 받을 분을 꼭 찾아서 상담하면서 해가시길 부탁합니다. 혼자 해결하고 혼자 의미를 구축하면 정말 안됩니다.

 

그렇게 자천하면서 서서히 생각이 줄어들게 되는데 생각이 줄어드는 이유가 주변이 정리되어서도 그런데 자천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나 사회생활에 대한 것이 그전과는 다른 그러니까 사람은 만날 수록 좋고 많을수록 좋고 확장하고 넓어져서 퍼져가는 식으로 인간관계든 사회생활이든 저질러만가는 것에서 수렴하고 가지도 쳐내고 불필요한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이해타산을 따져서 정리하는 것은 아닌데 안 해도 되는 것까지 나서거나 별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을 안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야 할 것이 줄어드는 것으로 생기는 생각이 줄어드는 것이 있고 그다음은 생각이라는 것이 해야 할 생각이 있고 할 수밖에 없는 생각이 있고 이런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고요함을 얻어서입니다.

 

좌선을 오래 하면 생각이 구분이 됩니다. 내가 하게 되는 감정이나 생각이 있고 내가 굳이 할 필요 없는 듯한 것이 자꾸 일어나는 것도 있고 감정이 일어나는 사건을 겪어서 그것이 잠잠해지기까지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도 있고 다른 생각이 끼어드는 것도 볼 수 있고 이런 것인데,

이런 것과는 다른 것이 있는데 생각으로 주변과 사회가 일어나고 이어지고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거나 알아야 해서 또 생각이 생각이 아니라 하나의 운의 흐름이라는 것이 되어 그 운명선이 보이거나 그것을 보고 싶어 하게 되거나 그 운명선이 내가 간섭해야 하는 것이거나 접속이 되어 있다거나 해서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는 것도 분명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꼭 해야 한다거나 이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경지 이룸이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고요하고 생각이 사라지고 감정이 잦아들고 감정도 별로 없다고 해서 도가 경지가 이루어졌다고 무조건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건 효과 중에 하나이고 그런 것이지 그것으로 경지가 성취되었다고 보는 기준은 아닙니다.

생각이나 감정이나 비슷한데 생각 일어남을 보는 것이 감정 일어남을 보는 것과 같아서 굳이 하나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혹여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나 그러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막거나 대비하거나 그치게 하고 싶다면 굳이 그런 것은 안 해도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일어나야 하는 것이지 막아야 하거나 그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입니다.

잡념도 정리되는 것이어야지 사라지게 해서도 안됩니다.

다만 원하지 않거나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감정이나 생각을 멈추고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안 한다거나 멈춘다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생각이나 감정으로 지금 나를 삼지 않는다는 의미가 중요해서입니다. 이걸 구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정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그 감정이 아니면 안 된다거나 그 감정으로 자신을 삼아서이고 그 감정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서 이럴 때 감정을 멈출 수 있느냐가 중요하게 됩니다.

만약 친구가 친한 사람이 가족이나 형제가 또는 나보다 그다지 나을 게 없던 누군가가 주식으로 대박이 나서 수 십억을 벌었습니다.

또는 내가 자격시험이나 국가시험이나 다른 뭔가 시도하려고 한 것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켜보던 가족이나 누군가가 비아냥을 하면서 그런 것도 못한다고 합니다.

일종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을 누군가가 한다면입니다. 해보려고 하는데, 시도하면서 나름으로 애쓰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비웃기만 하고, 그것이 일부러 하는 것도 있고, 어떨 땐 무심코 남들이 한 말이지만 그게 상처가 되어서 가슴에 꽂히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이 저변에서부터 올라오며 서글프고 서럽고 한스럽고 울분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대놓고 풀 수도 없고 누가 위로해줄 수도 없는 그런 참 답답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때 그런 감정의 휘몰아치거나 은근히 올라오면서 인생을 저주하거나 한스럽거나 너무도 서러워서 힘들 때 그런 감정에서 거리를 둘 수 있나요? 그런 감정에서 나와서 객관적으로 그 감정들을 볼 수 있나요? 위상을 바꾸거나 메타로 감정들을 다룰 수 있나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 마음 한 조각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럴 수 있으려면 오랜 좌선의 자천의 공부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자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하고 이럴 수 있어야 합니다. 좌선해서 생각 줄어들고 감정 사라지고 가 중요한 게 아닌 거죠

내가 좌선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보면서 만든 힘을 이런데에 써야 하고 이것을 일상에서 할 수 있으면 그때서야 도의 증진을 보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걸 잘할 수 있으면 그게 일상 삼매이고 언제나 자세나 자천하는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상의 아무 데나 아무 곳에서나 자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마음을 보고 다루고 확장하고 성취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진짜 기분 더러울 때 진짜 감정이 격해질 때 그때 그런 것에서 나와서 스스로를 세울 수 있으면 자천이 진전된 것입니다.

이것을 하려고 좌선을 하는 것이고 삼매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걸 위해서 기를 운행해왔던 것이고 호수를 외워왔던 것입니다.

기운행에서 독맥이나 임맥을 돌리면 감정의 격정적인 분출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감정 전이도 벗어나게 합니다. 이걸 소주천이라고 하면 이런 소주천을 하려고 한 이유가 여기 있게 됩니다. 그렇게 감정을 조절해서 마음을 지키고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가 자천해서 감정의 집요함에서 한 발을 떼어내지 못하면 그건 자천을 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말했듯이 마음 한 조각 그 작은 마음을 창조시키고 확장하면서 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마음을 발견하려면 또는 창조하려면 그 감정의 억울함, 질투 부러움, 분노, 탐욕 등등 그 집요함에서 한 번의 가라앉힘이 단전으로 들어가는 내적인 충실이고 자신감입니다. 

내가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되는 이유는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서입니다. 

 

돕니 : 그럼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알 수 있긴 해?

제라울 : 알 수 있는 것도 있죠

어린아이를 보는 것을 예로 들면 우린 아이의 행동이나 선택을 보면서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가지려고 하면 그 물건으로 나중에 아이가 어찌 될지 어떤 감정이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있기도 하잖아요?

우리가 그런 시절을 겪어봐서 그런 과정을 지내봐서 보이는 아이의 미래 감정이나 사건이 있습니다.

그건 아이와 우리의 시간의 차이 또 지능의 차이가 있어서겠죠

그래서 나를 보는 이런 마음이 생성되고 확장되면 내가 보이게 되는데 그 보이는 것이 점점 그로 인해 어찌 될지 대강 알 거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우린 비슷한 것을 또 하고 또 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또 이런 사건을 일으키네 또 이런 사물을 가지고 싶어 하고 또 저사람은 이런 걸 요구하네 이걸 하고 싶어 하고 이걸 가지려고 하네 이런 반응을 하네 이런 감정을 드러내내 이런 화를내내 이런 욕심을내내 하면서 보게 되면 아이를 보는 것과 같은 현상이 되죠 

대강 그로 인해 일어날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자꾸 보니 보이는 것이 있는 것이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런 것을 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별다른 생각도 없고 이러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것이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하려고 하는 것에서 하게 되는 것으로 되지 저절로는 없게 됩니다.

이런 것을 감각이나 영적인 느낌이나 뭔가 그런 것으로 미리 감정 일어나거나 생각이나 사건 일어나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는 것이 중요하지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서입니다.

안목이고 견해입니다. 그런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지 영적이나 초감각적이거나 직관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죠

그래서 감정은 감정의 이유나 원리나 사물과의 대응을 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고 그러면서 그것이 미래에 어떻게 되어가겠구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론 직감적이거나 직관이거나 느낌으로 오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그건 확충하기가 힘들고 다루는 것도 잘 안 되는 것이라서 그것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어서도 그렇습니다.

 

이것도 좌선 중에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잠잠해지고 하는 것을 보는 것이지만 그러다가 다른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짐작하거나 알 수 있거나 하는 것이 있기도 한데 그건 감정은 분명 내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거나 욕구라서 생기는 내적인 원인과 외부에서 오는 것인데 외부는 가족이나 친구나 경제활동 같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 것에서 오게 되는 감정들이겠죠

내일 약속이 있으니 이미 그로 인한 감정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물론 약속 있기 전에도 뭔가 있었고 그 이전에도 분명 아주 미약하지만 있습니다. 뭔가 계약이 되어야 하면 그것에 대한 감정이 분명 하루 종일 배경으로서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감정이 외부의 무엇으로 인해 당연히 있게 되어 깔려있는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저녁 약속, 경제활동, 가족, 친구, 공부할 거, 사소한 일상들, 공적인 일상들 너무도 복잡한 것이 감정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신변 정리하듯이 정리하고 가버리면 이에 대한 감정은 없는 삶이 되죠 출가하면요 그런데 출가해서도 이런 것에서 정리가 안된 삶을 살고 있으면 하나마나인데 그로 인한 감정이 배경으로 누층으로 되어 있을 것이니까요

감정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좀 느끼지 못할 낮은 곳으로 가라앉은 것이죠

그리고 감정이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라는 원리도 있는데 이건 설명이 좀 어렵죠 아무튼 이런 거라서 우린 감정에 벗어나는 것은 원리적으로 안됩니다.

내가 이따가 저녁에 마실 커피 한 잔도 이미 감정으로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 생각지도 못한 것이 오게 될 때 감정은 불안함이 이미 오고 있습니다. 내 의식으로 대강 이런 일이 있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갑자기 창졸간에 불현듯이 오는 것에 감정은 이미 느끼고 있는데 그런 것도 좌선해서 감각이 예민해지면 때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감정이란 우리의 인식 너머에서 오는 것도 느끼고 있는 것이 되어서 감정이 없다는 것은 느끼는 감수성이 둔해진 것이지 그게 도의 경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두 느껴야 하는 것이냐고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느껴야 할 것과 느낄 필요 없거나 하는 것은 굳이 인위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도 처음엔 민감해서 이거 저거 다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자신의 성향대로 느낄 것과 못 느낄 것들이 정리되는 거라서 일부러 느끼려고 애쓸 것도 안 느껴진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은 느껴지는 것이면 잘 느껴야 하는 것이고 감정을 막거나 억누르거나 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그러면 오히려 그것이 더 힘든 상황을 만듭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과거부터 해오던 것입니다.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지라고 하는 듯한 선문답이 어디 있을 거 같은데 ㅎㅎ

감정에 두려워하기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단, 마음 한 조각이 있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입니다. 

아니면 억압이고 그게 병이 되는 것은 알죠? 히스테리가 그런 것이고 이걸 알아낸 프로이트는 전설적인 사람이 되었죠

내가 감정이나 욕구를 해야 할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거나 풀지 못하고 지나가면 그것이 다시 되돌아옵니다. 그 기간이 한 시간이든 하루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십 년이든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히스테리든 업이든 한 건 한 것이고 안 한 건 안 한 것이 되고 그 한것이든 안한 것이든 감정이 되고 그건 되돌아옵니다. 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면 미래를 알게 되는 것이죠

내가 이런 행동이나 감정을 일으켰으니 이후에 이것이 이렇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것이죠

'자천 > 강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활에서......  (0) 2020.10.07
아프죠  (0) 2020.10.06
정점?  (0) 2020.10.05
교화  (0) 2020.10.04
그래?  (0) 2020.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