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명리학

명리관념

제라울 2018. 10. 7. 21:45

명리라는 것엔 이런 전제된 관념이 있다고 보는데,

그건 주관과 객관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감정이나 성격같은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 있고

또 사물이나 사건이나 상황이나 사회구성이나 세계구조나 이런 객관의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이건 어찌 보면 애매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십성이 열개이지만 그 하나의 십성에 저러한 것이 복합적으로 있기 때문에 더욱 곤란한 것이기도 합니다.

심리적이면 심리적인거, 현실적인거면 현실적인거, 

사물오고 가는거면 사물 오고 가는 거 하면서 범주가 명확하면 더 이해하고 공부하기 쉬울 것인데.

각자의 인생이나 세상의 모든 사정, 상황을 중층적으로 다 해석해도 된다고 하니 너무 어림이랄까 너무 포괄적이랄까 그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성이라고 하면, 이것이 심리적으론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 되어서 그냥 감정을 인성이라고도 하며 또는 지식이기도 해서 책이나 공부하는 그 행위를 인성이라고도 합니다.

사랑하기도 사랑 받고도 싶은 수동, 능동의 그 양면성이 다 있습니다.

이것 만해도 머리 아프고 논리성이 떨어진다고 하겠죠. 능동과 수동의 분명 다른 것인데 사랑을 받게 된다는 거냐 내가 사랑을 해야 한다는 거냐 또 그렇게 된다는 거냐 이런 것은 따지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것이 일어나면 그냥 인성이라는 것입니다.


지식이냐 감정이냐에서 지식 있는 것이냐?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냐? 지식을 가르치는 거냐 지식관련 업에 가는냐 그런 것과 연관되냐 자격증을 따느냐 따려고 공부하냐 따야 하느냐 그런거 근처로 인연되냐 이런 것 역시 구분 안 합니다.

그건 그렇고 왜 책도 인성인가? 지식을 얻기위한 수단도 인성인가? 가르치는 것도 인성이라는데 지식을 얻기위한 주변이나 그런 것과의 만남 또 배치나 이런 것도 인성인가?

감정이냐 감정 일어나는 것이냐 감정 생기게 하는 상황이냐? 감정이라면 어떤 감정이냐?

따지고 들면 너무도 복잡한데 이런 것도 다 퉁쳐서 인성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이 너무 헷갈리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이런것을 구분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구분하면 철학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명확한 구분일뿐더러 이중에 하나만 붙잡고 자기 철학을 만들기도 한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회의에 의해서 난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데 이유는 모른다입니다. 이 존재하는데 왜 생각하느냐 둘 사이의 비약이 뭐냐고 따집니다. 그럼 존재는 뭐고 이런걸 생각하며 그것을 나름 설명하면 자기 철학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성 가지고 혼자 생각하는 걸 가지고 말한 것인데도 이게 철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세세한 구분이 있게 됩니다. 관념론에 가까우면 인성이 되고 경험론에 가까우면 재성이 되는데 이것들을 조화시킬려는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감정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서도 또 도장도 인성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사물입니다. 사물 마저도 인성이라고 하니 너무 멍청해서 또 과거인들이 머리가 나뻐서 이런 구분을 하지 못해서 이렇게 된 것이냐고 할 수도 있는데 현대의 서구적인 논리나 합리적인 사고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복잡함이거나 초라한 사고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도장이라는 것을 보면 그 도장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장이라고 하면서 일어나는 그 주변의 것이어서 이건 은유입니다. 즉 은유로 유추되는 것들 도장으로 은유되는 것들은 다 인성이라는 것도 된다는 것입니다. 도장만이 아니라 문서도 그렇고 지식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은유마저도 다 인성이라하는데 그러면 얼마나 많은 것이 인성인지 헤아릴 수가 없고 게다가 진짜 문제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런 인성적인 상황이나 의미로 볼 수 있으면 인성이라는 것이 되어 이렇게 확장해가면 입을 다물 수가 없게 놀랍다고 해야 합니다.


부모가 후원이 되고 지지가 됩니다. 부모란 내가 있다는 근거가 되니 주민등록증 처럼 문서로 된 여러 규칙들과 일하기 위한 서류들 뭔가의 근거라는 의미입니다.

이건 엄마만이 아니라 엄마같이 행동하면 나에게 엄마가 되고 나보다 윗사람이면 인성이 되고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어도 내가 의지하며 기대면 인성이고 그외 이런식으로 무조건 부모도 인성이 아니고 문서도 인성이 아니고 그보다 그렇게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며 또는 전에 말했듯이 전제성이 있어 보이는 것들이나 선천적인 것들이나 이런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면 인성이라고 합니다.

이건 대단히 이상한 관념이 됩니다.

도대체 뭐가 인성이라는 것인가 입니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을 십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걸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그리고 주관적인 모든 것들 객관적인 모든 것들이 십성으로 표현하고 다루는데 그러면 이건 주객분리가 아니라 합일이며 거기에 사물도 아니고 사물 아닌것도 아닌 것이라는 의미도 되어 정체를 알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식상의 작용을 하는지

무엇이 관성 작용을 하는지이고

그러면 식상 작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관성작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하는, 움직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되어 규정되고 고정시켜서 보는 것에 익숙한 지금의 우리에겐 낮설게 됩니다. 그래서 이걸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거기에 과거의 것을 보고 미래를 알려는 것이 되어 이건 맥락을 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흐름을 이어가는지를 보고 앞으로 일어날 것을 보는 것이어서

십성이나 천간지지나 이런 것의 맥락 이어짐을 보면서 앞으로 일어날 현상의 맥락을 알려는 것입니다.

이러니 시공을 초월도 한다는 것인데,

사주의 범위가 너무 방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까 말대로 과거인들이 무지해서 그런 것인지 이게 맞아서 그런 것인지는 내가 굳이 말할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말한게 너무 많으니까요.

아무튼 위에 쓴 말을 잘 음미하시길 바랍니다.

아뢰야식이 객관과 주관이 다 들어 있는 곳인데 그 아뢰야식이 전개되면 기세간도 되고 내 주관도 되어서 이걸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당시도 없어서 이걸 가지고 싸우기도 합니다.

근데 사주는 이런 것을 굳이 다투지 않습니다.

축구공이 식상이라서 내가 가지고 노는 것이기도 하고 식상이라는 것이 활동성이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객관하고 주관을 그다지 구분하지 않으면서 다루고 있습니다.

식상을 구분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상위개념이라고 하면 그건 활동입니다. 축구공이든 망치든 그것으로 내가 하는 단순한 활동이든 뭔가 지향하는 것이 있어 이루기 위한 활동이든 그걸 식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객관이나 주관이라는 식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분은 서구에서 온거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구분법입니다. 그것에 지식, 성격, 운명 이런 것들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미 아뢰야식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식상이 있다는 것이 축구공이 있게 하는 것이고 식상의 성격이 있게 하는 의미가 됩니다.

주객을 다 있게 하는 그것이 식상이고 십성이며 천간이나 지지나 오행생극이나 모든 역학의 구조들이고 작용들이 그렇게 됩니다. 형충파해등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그건 묻지 않고 다루지도 않고 현실에 일어나는 그것에 의해 말할 뿐입니다.

중요한 건 현실에 무엇이 있고 어떤 작용이 있느냐이지 신념이나 사상으로 따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런 어설픈 짓은 그전부터 있어서 유교에 미친자들이 아버지를 편재로 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내가 극하는게 어찌 아버지가 된느냐는식의 논리인데 그 천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논리나 이념으로 근거해서 말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냐고 봐야하며 실재 증험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바로 현실의 변화를 봐야 한다는 그것하나라도 잘알면 난 천재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나 나이들고 지식이 생기고 그러면 자기가 기준삼고 근거삼는 것이 있고 그것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인성으로 마무리하니 그런데 그것이 보수가 되어가지만 보수가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듯한 어리석음을 면하려면 언제나 현실의 끊임없는 달라짐을 알아야 합니다.

인성의 상상이 우주 끝까지 가더라도 뇌라는 것을 사용했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여기 이자리로 돌아오는 재성의 실재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이 바뀌면 해석도 바뀝니다.

과거는 여자는 남자가 관성이지만 앞으론 남자처럼 재성으로 될지도 모른다고 보고 이미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여자가 남자를 관성으로 다루냐 입니다. 그건 의지하고 지배당하는 존재로 남자가 되었으며 남자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도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 기대어 살고 여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남자는 여자가 관성이 아닌가요?

여자도 남자를 극할 대상 즉 자기 능력으로 사귀는 것이고 재미보려고 하는 것이 되지 못할 거라고 보는 사람이 지금 어딨어요 이게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주해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방법대로 하면 안 맞으니 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현실에 눈가리고 외면하면 결국 도태되겠지요. 못 벌어 먹을 것이니까요. 맞아야 사주보러 갈 것인데 틀리면 누가 점 보러 가겠어요.

그게 아니라도 사주는 현실의 나타나는 결과를 보고 지속적으로 이론을 수정하고 변화시켜가는 것이 되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론을 수정한다고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다르게 접속하고 관계짓고 확대하면서 다르게 변해서 안맞는 이론을 발견하면 분명 대단한 안목이겠지만 그런 것을 살아 생전에 경험한다는 것은 가만큼 사회가 급변했다는 것인데 이건 좋다고만 하긴 그렇습니다. 그렇게 좋아진 사회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분명 격변이되어 불안한 것입니다.


마구하는 여기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는데 마구한다고 하면 내가 한참을 비웃을 건데 어쩌것어요?

사주가 너무 심오한게 많은데 그것을 관심없고 맞추기 위한 공부만 하는 것은 그런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고 그 원리에 관심있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런 원리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고 자기를 다그치고 경계하는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뭘 배우냐가 아니라 무엇이든지 그것에서 뭘 배우느냐 입니다. 어떻게 적용해서 하려고 하는 것에 적합하게 하느냐 입니다.


즉 주객의 분리 안한다.

능동, 수동 구분없다.

어떤 심리적인거나 사건이나 일으키게 하는거, 원인제공하는 거, 그 다양한 속성들, 진행 상태들, 결과들, 이런 것이 구분 안 된다.

또 거기에 자아라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어떤 인생을 살고 뭘 겪고 그런 것을 말하지 그 사주의 주인의 마음이나 자아의 차이나 다름, 그것엔 관심없습니다.

또 선악도 없어서 좋은 놈 나쁜놈 이 구분 안 됩니다. 그렇게 사는 자입니다.

예를 들어 남을 때리는 인생이라고 사주가 있으면,

그냥 남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은유라고 했으니 그런식의 어떤 작용입니다.

격투기 선수일 수도 있고 형사일 수도 있고 안마사일 수도 있으며 정신을 때려서 정신과의사일 수도 있고 돈으로 때려서 은행일수도 주식할 수도 있고 이건 다양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폭력배라서 때리는 사주가 아닙니다.

선악은 없고 사는 방식만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그래서 나쁜 놈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주변이나 배치된 것들이나 처해진 상황전체를 말합니다.

아까 말한대로 인성이 가르침에 관한 거라서 가르치는 모든 것들이 인성입니다.

선생님, 학생, 책상, 칠판, 교실, 책, 교육부, 출판사를 비롯해 가르치면 그 가르치는 선생만이 아니라 그 선생의 가족, 형제까지 포함하고 학생도 그 학생의 가족도 포함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물의 주변 전체 그 학생의 장 전체입니다. 즉 장 입니다. 뭉텅이의 장으로 말하는 것이지 하나의 무엇이 아닙니다.

물상도 되어 비슷하게 생겼거나 비슷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거나 그런것도 다 됩니다.

띠나 일간이나 그 성향이나 의미하는 것이나 유행이나 뭐든 다됩니다.

즉 오늘이 유 일 즉 닭의 날이라면 닭띠가 연락하거나 만나거나 병일이면 병 일간을 만나거나 그사람이 문제 일으키거나이고 닭이면 금속이나 그 비슷한 것과 관련되거나 그런 유행이거나 그런 성격의 사람이나 그런 사건이나 분위기가 있는 것이거나 이런 것인데 이걸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의 뭔가가 주어지면 즉 천간이나 지지나 십성이나 뭐나 그것이 주어지면 그것으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것드리 재배열 되게 됩니다.

그와 조금이라도 비슷하거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거나 요소가 있거나 가능성이라도 있을 것이면 다 응해진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 사주의 주인에 따라 취사선택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또 다른 의미가 되어 이게 왜 가능한지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말하기 어려운데 아무튼 사주엔 이런 것들이 다양하게 얽혀져 있는 것입니다.

육하원칙이라는 식의 개념들이 다 적용가능하게 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왜나 이런게 다 하나의 십성이나 천간지지로 또 생극이나 신살원리로 합니다.

이런 것이 전체적인 것을 즉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고 전반적인 환경의 응함을 보는 것이고 포괄적인 것입니다.

어설픈 지식으로 나누고 분리하며 분석해서 따라갈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우리의 지성을 넘어서서 있는 거라서 결과적인 것을 보면서 이해하게 됩니다.

이원론도 아니고 다양성도 아니고 단일성도 아닙니다. 결정된 것도 아니고 비결정도 아니며 항구적인 것도 아니고 비항구적인 것도 아니며 전체적인 것도 개별적인 것도 아닙니다.

현실을 이론으로 구성해서 이론을 보지 현실을 안보는 어설픔은 언제나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데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주를 공부하는데 이게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위에 쓴거 처럼 이건 구분이 잘 안 되어 있는 것인데 그래서 내가 어떻게 구분하고 줄세우고 순서 잡아서 해석하느냐로 다른 것이 되고 자기 관법도 되는 것이어서 동양의 특징인 자기 재량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린 보편적인 이치를 추구하지만 그와함게 자기만의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어야 해서 그런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을 연습합니다.

너무 함축적이고 전일적인것이어서 이런 구성을 보아야 합니다.

보면서 익숙해지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만상을 다 보면 딱히 정해진 의미가 있는게 아니고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니다. 사물이 가르쳐주고 보여주는 것은 있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것만이기도 한데 서구인들은 그것을 누구나 본다는 식으로 논리를 만들지만 누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법에 따라서 사물이 달라지는 것이며 운명도 달라지는 것이라서 그냥 사물에 종속되어 그 본래의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맥락을 잡고 이치로 구속해서 그렇게 진행되어 가게 하면서 그에 따라 살고 그런 의미를 구축하며 그렇게 인지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분명 전혀 다는 사물보기인데 무엇이 더 나을지는 선택이겟지만 이걸 모르고서 하는 맹목적인 지식선호는 경계해야 합니다.

즉 사물을 보는 것에서 사물과 같이 사는 것으로 가는 것이고 같이 살기 위해서 서로 주고 받는 영향을 알게 되며 영향이란 서로간의 운명의 공명과 변화를 같이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물도 살아가고 나도 살아가는 그 과정에서 접속되는 방법을 사주로 한다는 것입니다. 엄밀히는 지식입니다. 내가 아는 지식이 그런 운명을 부른다. 그런 사물을 부른다 그런 사건을 부른다. 입니다.

만상의 다양함을 어떻게 맥락짓고 어떻게 계열화하며 어떻게 유추해 가는지가 있어서 그것들을 보는 것이고 익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는 우리만 합니다.

서구는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서구인들이나 그걸 배운 사람들이 비웃거나 좀 불편해하거나 유비적인 사고라고 구별시키는데 이것의 훌륭함을 외면합니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마구에 쓰는데 마구 이전에 사물을 보는 원칙이 있으면 합니다.

기수련을 해도 기를 전기흐름이나 에너지 흐름이나 어떤 자기장이나 뭔가의 느낌, 현상, 빛이나 움직이는 뭔가로 보는 것이 너무 편협한데 사주처럼 사물이기도 감정이기도 사건이기도 운명이기도 하는 그런 통합적인 이해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기 역시도 이런 복합적인 것이어서 한 두가지 성질로 정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대로 감각되고 살아가는 것이지 그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즉 아까 말했듯이 사물을 알아가는 것이 사물을 정해가는 것이고 그러한 것이 사물에 영향주는 것이어서 그렇게 서로 운명을 같이 가게 됩니다.

그렇게 알면 그렇게 살고 사물도 그에따라 응해줍니다.

우린 관념과 객관을 구분하지 않는데 단순히 구분하지 않는게 아니라 구분하면서 서로 유기적이고 전일적인 구분없는 뒤얽힘으로 생활하는 것이어서 입니다.

사물이 나를 규정하고 나도 규정하는데 이 규정이라는 것이 서로를 정의하는 것이면서 그런 존재라는 것이며 그렇게 산다는 것이며 산다는 것은 운명이라는 것이며 그렇게 미래가 진행되어 갈거라는 것입니다.

사물만이 아니라 심리이든 어떤 것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든 그것엔 이런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또 세상을 정의하는 것이고 그 정의는 운명을 부릅니다. 운명이란 분명 객관의 것들이 응해오는 것이고 그러하기때문에 서로 같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창조는 우리가 과거식으로 이해하면 없는 것에서 딱하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면서 서로를 규정하고 그것이 삶이라는 것이며 이렇게 끊임없이 변해하는 창발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주론 운이라는 것이 있는데 10년 대운이나 매년의 년운이나 달 일 시간등으로 말하는데 이게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건 운에 따라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이 바뀌고 선호하는 것이 달라지고 이런다고 하는데, 이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자아라는 것이 있으면 일관성 있고 어떤 성격을 지녀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운따라 달라지면 어떤 것이 내가 되는지가 헷갈립니다.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내가 다른 것이 나인지

그렇게 변해가도 조금뿐이라서 진짜 나는 항상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변하는 것을 부정하고 말면 되는 것인지

분명 사주로는 변합니다.

이건 그 사람의 의지를 외면한다는 것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변하고 싶지 않아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인데 운이 달라지는 별 수 없다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흔한 거겠죠.

운이 달라지니 사람이 달라져서 헤어집니다.

그전깥은 감정이 안나오니 방법이 없습니다. 라지만 감정도 웃기는 것입니다.

감정이 왜 운따라 다르게 나오는 가요?

또 운따라 길한 것이 흉이 되고 흉이 길이 되는 것도 있는데,

집 때문에 내가 고생을 했다면 운이 바뀌면 집이 길하게 되어서 돈이 됩니다.

그럼 어떤 사물도 정해진 길흉이나 좋고 나쁨이 없고 그건 사람이나 사건이나 뭐든 그렇다는 것인데 운이 달라지면 다른 의미가 되어서 의미라는 것도 때에 따라 다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뭐든지 정해진 의미도 없고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고 이런것이 되어 버립니다.

나도 변하고 사물도 변하고 가치도 변하고 그로인해 삶의 행불행도 변하고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을 기대어야 하고 어떻게 마음잡고 살아야 하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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