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명리학

사주는 자유로워지려고 배운다.

제라울 2018. 10. 9. 20:02

사주가 원리는 몇가지 됩니다.

천간 있고 지지 있고 여러 신살들 있고 오행생극에 형충파해나 지장간이나 이런 몇 가지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배우다보면 너무 많고 복잡하며 어렵다고 하지만 인생이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고 얼마나 오랜 역사가 있는지 생각하면 이건 그다지 복잡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단순하게도 생각 됩니다.

게다가 이런 몇 가지로 모든 사람과 모든 시대에 모든 사항에 다 적용한다고 하면 너무 이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의 원리로 이리저리 해석하는 것이고 이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억지로 갔다가 붙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급변하는 이런 시대에 그런 과거의 원리나 지식이 또 그런 정해진 몇가지 규칙으로 다 설명한다는 것이 어찌 신뢰를 할 수 있겠나 합니다.

정해진 것으로 한다면 정해진 몇 가지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 이건 다르다고 봅니다.

분명 정해진 몇 가지 요소들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이건 그리 간단하지 않은데 다른 예를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한정된 것이지만 그 한정된 단어로 무한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구는 다른 나라에서 한거 같은데 다시말해 정해진 몇 가지 요소가 있지만 그 몇 가지로 조합하고 응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고 다양하게 설명하고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정해진 몇가지 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봐야 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그 현실의 새로움, 현실의 지속적인 창발을 정확하게 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복잡하고 항상 다르게 나타나는 인생이나 사회를 보면서  억지로 따라가려고 하고 어떻게든 그런 것을 해석해보려고 무작정 들이 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다양하고 아무리 다른 것이 나온다고 해도 기본적인 맥락은 있다는 것이고 구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에서 설명한대로 극하는 것이나 생하는 것이나 이런 관계에서 이루어질 거라는 것이고 이건 세상이 변해도 그다지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사회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면서 형성된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합니다. 필연적으로 이런 사회나 국가체계라고 할 순 없지만 때론 전력적으로 이런 사회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있고 오랜 고뇌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이 만든 것이니 인간의 원리에서 나온 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활동하고 결과내며 거대해지며 보존하려는 것들인데 그외도 결국 인간이 아는 세상이고 인간이 필요에 의해 형성된 체계입니다. 그것이 꼭 그래야 한다, 그렇게만 이루어졌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는 않는 듯합니다. 오행도 육행으로 해도 되고 칠행으로 해도 되고 십성도 이십성으로 하지 못할 건 없습니다. 어떤 것도 꼭 그거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금은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예를 들어가면 내가 사회에 살아가려면 사회라는 규칙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이고 이건 관이라고 하는 것인데 나를 극하는 것입니다. 극이란 내가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것인데 이런 구조는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철학적으로 이런 것을 거부하고 다른 철학을 주장하기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철학을 하는 사람도 수학은 배우고 논리는 배웁니다.

배움을 바탕으로 자기 학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배움을 거부하고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주 역시 하나의 세상을 이해하는 논리이고 방법이라서 이걸 배우든 아니든 맘이지만 이런 논리를 연구하고 알고서 자기의 학문을 창조해가도 될 겁니다. 기분 건들리는 말을 하면 서구인들의 논리를 배우면서 자기 철학을 세워도 되지만 우리식의 논리를 만들 생각도 해야 할 것이고 이런 사주라는 논리로 철학을 한다고 안될 것은 없다고 보고 아마 언젠가는 지금의 형식논리같은 거 외에 다양한 논리가 나오는 시대가 올거라고 봅니다. 그러지 못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결핍이 있는 것이지 왜 그거 아니면 안되다는 생각으로 자기를 옭아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것이 道도 아니고 진리는 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인간인 이상 사고하기 위한 틀입니다.

그래서 이 사주로서 생생의 더욱 창발하며 항상 다른 것으로 차이화하는 것으로 사용해도 안 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한정된 원리로서 보는 방법이지만 한정된 것으로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기 정신의 무한한 상상을 위한 것으로 쓰라는 것입니다.

어느 부분에서 내가 한계에 부딪힌 것인지 어느 부분에서 복종적인 버릇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라서 뭔가 알고 비판하고 반성하기 위해선 기준이 있어야 하고 거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보다 여러개면 그만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 묻지않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도 있습니다.

인생은 결국 자기가 판단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걸 위한 방법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굳이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사주로서 고정관념을 가지고 한정된 사고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학문도 아닐 뿐더러 그런 것이 아닌 것으로 해야 합니다.

더욱 나아가고 달라져가는 존재의 드날림을 위해서 입니다.

사주의 한계성을 알고 사주로 할 것이 아닌 것은 굳이 할 필요가 없으며 뭐든지 이것으로 하겠다는 것도 우려스러운 것이니 뭐든지 막다른 곳까지 가서 그 한계를 봐야 하고 그래야 쓸데와 아닐데를 알고 할 곳과 아닌 곳을 알고 스스로 자유를 얻는 곳을 봐야 합니다.

운명의 한계에서 숙명의 어두움에서 그 빛을 보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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