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려고 해도 뇌가 이제 늙어서 그다지 정리가 잘 안된다.
뭔가 빈틈이 생기는 듯한 공포가 생기는데 웃기다.
안 그래도 내가 쓴 글을 보면 더 설명할 것을 건너뛰는 것이 있는데 좀 과격한 글쓰기가 되어 더 상세한 글쓰기를 하는 분들을 부러워도 했는데 이제 그마저도 안된다면 이건 뭔가 말이다.
근래 내가 쓴 글에 누적이라는 단어를 쓴 게 있다.
이걸 쓰면서도 이런 단어를 쓰기 시작하네! 하면서 눈도장을 찍으면서 썼다.
이 누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엔 몇가지 이유가 있다.
크게는 세상에 내 의지를 누적시킨 것이 드러나는 것들을 보면서 므훗한 것도 있고 이건 조심해야 한다. 자칫 거만하거나 교만함이 되는 빌미가 되면 바로 무저갱을 구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작게는 개인적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누적들을 봐서 그렇다.
그전에 언어의 습과화나 행동의 단출한 편협이나 다양한 정해져 가는 것들을 보면서 이런 것도 예상은 했지만 참 그러네...
이런 감상에 젖기도 해서 그렇다.
이런 것들의 근간에 감정의 누적이 있다.
난 30대 중후반까진 그다지 누적된 것들이 없었다.
이게 어찌 보면 되바리지기도 너무 거칠기도 한 무성의해 보인 것들로 비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이 누적이 보이는 또 다른 가치관이 되는 이상한 현상도 있다.
아무튼 딱히 마음에 누적된 것들이 없었다는 것은 가진 것이 없고 그래서 뭘 집착하거나 뺏기거나 소유하고 싶거나 하고 싶거나 주거나 받거나에 그다지 무심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뭘 누가 주면 엄청 감사했다. 엄청 좋아라 하면서 입술이 하늘로 올라간다.
이 사람은 왜 이걸 주지? 줄 하등의 이유도 없고 그런다고 내가 뭘 해주지도 않을 건데 주니 좋네 하는 감상이다.
주니 받는다. 그게 다이다.
그런데 난 엄청 좋아한다.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은 것에서 작은 뭔가를 얻게 되니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다.
엄청 좋아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뭘 받은 거 같은데? 음....
사실 이건 내가 소유에 무심해서도 그랬지만 항상 앞을 보고 있거나 언제나 지금 여기에라는 식의 닥치는 대로의 삶을 살아서도 그렇다.
이건 무슨 의미냐면 A라는 상황에서 뭔가 하다가 B라는 상황으로 넘어가면 방금 A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전에 가진 감정 사고 흐름이나 그런 것들이 사라진다.
이게 얼마나 심하냐면 감기로 앓고 있어도 건강한 사람과 만나면 아픈 게 사라진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돌아가면 다시 앓아눕는다 아파서 죽을 거 같아도 그렇다. 이런 것을 자주 경험했다. 다른 병은 안그러든데 ㅠㅠ
내가 누구 앞에서 바보 같이 굴거나 누구앞에서 이상하게 행동한다면 그 당사자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유는 그 사람과 같이 있어서 하는 행동이지 혼자 있으면 그런 거 없다. 그저 고민을 하는데 이후에 난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해야 할 것을 고민하지 그 외는 딱히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도 없고 멍하니 있거나 있기만 한다.
생각이라는 것도 20대에 다 했다. 이후에 거기서 더 발전한 것은 없다. 세밀해지긴 했어도 기본은 거기서 더 나아간 것이 아직 안 보이다. 내가 거기서 멈춘 것인가? 그런데 올해의 우리나라 국가 위상의 변화도 이미 그 당시에 설정한 것인데 아직 내가 생각해서 계획한 것이 진행 중이지 이게 끝나지 않으니 아직도 그 당시의 사고형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게 된다.
이런 식의 크기에서의 내 행동 이외의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행동은 그 사람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내 개인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내 관심사는 오직 저거뿐이다.
즉 상황이 바뀌면 나도 같이 바뀌다 보니 뒤돌아서면 방금 전의 것을 잊어버린다.
이게 잘못 이해하면 냉정해 보이고 잔인해 보이기도 하다.
무서운 인간이기도 하지....
그런데 누적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이게 약간 오염이 되는 것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던 텅 빈 마음에 건물이 들어서고 있던 것이다.
그로 인한 감정적인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와~~ 내가 이러네" 하는 조소를 한껏 날려주었다.
그러면서 그 후에도 들어서고 있는 건물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 이게 쌓이네 아~ 이게 생기네 아~ 이런 것도 하네 아~ 이것도 탐하네 아~ 이런 습관이 드네 아~ 이런 것을 원하네 아~ 나도 이 정도네 아~ 나도 똑같네 아~ 나라고 별수 없네 아~ 나도 그런 거지
그렇게 난 인간이 되어 갔다.
짐승에서 인간이 되는 건지 신에서 인간이 된 건지 그것도 애매하다.
그 둘 다 감정이 미숙하거나 없거나 다른 건 마찬가지인데 당연히 신이라고 하고 싶지만 글쎄 내가 생각하는 신이라는 것이 뭘까? 내가 경험한 신들은 그들의 감정과 가치관으로 날 힘들게 한 것만 기억난다.
그런다고 인간이 감정이 완숙되고 성숙된 것도 아니다. 감정만 알아서 또 다른 바보이기도 한데,
짐승은 말할 게 없고 신은 그걸 알면서 한다는 그 차이가 있다.
신!! 그들은 각오라는 것을 했다. 그걸 처음 보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20년이 지나도 기억이 날 정도이다. 내가 기억을 한다. 그건 그만큼 자극적인 것이다. 뒤돌아서면 잊었던 내가 잊지를 못한다.
그 각오의 눈빛 그건 지금껏 날 긴장하게 한다.
누적되어가는 것들을 보면서 난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했다.
이런 것이 없을 땐 각오는 쉬었다. 하면 되지 못할게 뭐야 하는 단순 명료함이 있다.
그런데 이런저런 감정이나 쌓여가는 많은 주위의 사물과 감정과 한 일들이 생기면서 내가 만나고 관계하고 저지르고 내가 행해서 일어난 많은 것들 그런 것을 매일 보면서 난 새로운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론 그러거나 말거나 그다지 심각할 건 없다.
난 무한한 자유에 아무런 걸림이 없을 수 있는 방법을 안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것도 안다.
이게 광오한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것은 대단한 깨우침도 수준도 아니다. 이런 것에도 원리가 있어서 보통 수준의 각성일 뿐이다. 이걸 모르면 개인 이외의 남을 보는 것이 안 되는 것이라서 이건 중요한 깨우침이지 수준의 깨우침이 아니라서 그렇다.
나에게서 남으로 넘어가는 그 중간에 무한이 있다는 그것을 말하는 것인데 수학으론 1과 2 사이가 무한하게 쪼개지는 그 수렴 무한이다. 난 나이고 남은 남이다 나에게서 남으로 가기 위해선 방법이 필요하다. 일단 무를 건너가는 그 위대한 한 발을 내딛는 어려움을 안다면 일단 견성이다.
그렇다 하고,
그래서 난 편했고 마음이 허무 속을 노닐 수 있던 것인데 누적이 자꾸 그것에서 무한을 지우고 있었다.
누군가를 편하게 대하려고 했고 막대하기도 하고 이런 행위를 하면서 느끼는 당황이나 스스로를 보면서 너도? 니가? 하는 비웃음을 날려주는 거도 잊지 않았다.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생기려는 것을 보고 헐~~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우려를 표현했다.
난 결벽주의인데 아닌 듯 내색하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식당에서 가만히 있으면 젓가락 줄을 맞춘다. 각도를 재고 다른 그릇과의 거리를 재고 그 위치가 아름다운지 불협이 되는지를 본다.
그래서 마음의 허무에 건물이 들어서면 일일이 꼬리표를 달았다. 하나하나 내가 모르는 것이 들어서는 것을 경계했고 일일이 다 확인하면서 기록하듯 했다.
하지만 이게 허튼짓인 건 안다.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나는 것이 뭘 기억하나? 이득이 돼서 기억하나 충격이거나 자극이어서 기억하나?
기억이 안되고 빠져나간 것이 다 많지 기억된 건 그중 일부인데 왜 굳이 그것을 기억하나?
이러면 기억되지 않은 거 건물로 누적으로 쌓인 것으로 보이지 않은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된다.
이것에도 방법은 있다. 기억되지 않고 무엇이 심층에 누적되어가는지 몰라도 무언가 있다면 그건 나오게 된다.
현실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알게 된다.
그래서 무엇이 나오는지 그것을 경계한다. 수문장 같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무엇이 나오는지 알 수 없기도 한 것이 있어서이다.
모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있다. 뭐가 나오는지 미리 알지 못하면 나와도 모르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난다. 내가 검열하지 못한 것을 남이 보게 되어서이다.
혼자 있으면 안 하던 행동을 사람을 만나거나 뭔가 행동하고 일을 벌이면서 생소한 내 모습을 찾는다. 그게 보이면 이게 원래 내 것인지 남 것인지 새로 생긴 것인지 고민하게 되어서이고 이 고민을 위해 만나고 일을 한다.
근데 이거보다 사람들이 날 보는 방식, 대하는 태도나 비판 평가들을 본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다. 그것이 무엇이 나오고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인데 이게 꼭 맞는것은 아니라는 점이 있지만 무엇인가 나온건 맞을 수 있어 일단 접수한다.
난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한 것이니 내가 책임을 져야 해서이다. 그래서 내가 알아야 할 때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힘들고 어려움을 동반해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그러면서 기다리면 알게 되는 그때가 되면 알게 해 준다. 난 항상 깨어 있으면서 기다리는 그것을 하면 된다. 하지만 깨어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깨어 있음을 오해하는 것을 보면 안다.
무엇이 깨어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깨어있는 것인가
이건 나도 오랜 세월 해온 것이라 한순간에 이룬 것이 아니다. 내 과거 전생의 누군가는 성성자라는 것까지 달고 다니면서 그것을 공부했다. 이런 오랜 세월의 공부 없이 뭔가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려는 사람들은 생각해봐야 한다. 그 하나를 성취하기 위해 수십 년을 투자했나 수백 년을 했나. 나도 그 전생에서 지금을 보면 400년이 넘는다. 그런 세월을 공부해온 것이 지금의 깨어있는 것이 뭔지 알게 하는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