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론/견해를 위해

이게 알기 힘든데

제라울 2021. 5. 6. 18:37

나와 주위가 동조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이런 걸 모를 땐 상관없는데 나에게 이런 것을 들으면 이걸 경험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과 사회나 주위가 서로 연결되어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죠

요즘은 코로나가 있으니 내 감정이나 내 신변의 변화와 내가 사는 주변의 코로나 발생 현황이 서로 연관을 가지고 일어난다고 생각하기도 하겠죠

이런 것처럼 나와 주변과의 어떤 연결을 보게 되는 거죠

이러면서 뭔가 행동하고 어디를 가고 어떤 것을 알고 뭔가 의도를 하면서 그로 인해 마구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현상들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이런 것이 있을 것인데 이게 정말 그러한가는 좀 다른데 난 무조건 아니라고 말하죠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자신이 겪은 것이니 그 자기의 경험으로 나오는 사고를 버릴 생각이 없어서 한 번이라도 이런 것에 맛 들이면 헤어 나오기 힘들기도 합니다.

너만 되고 난 안 되냐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분명 그걸 보고 느끼는데 아니라고 하니 이상할 것도 같고 이게 그래서 어렵습니다.

 

일단 누구나 이렇게 되는 것이 가능해서 이런 것을 경험한다고 본인이 뭔가 대단한 무엇에 참여되거나 능력이 있거나 뭔가 하고 있는 것이거나가 아닌 게 됩니다.

누구나 하는 것이면 그냥 상식적인 것이지 별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흔한 말중에 내가 축구나 야구나 국가대표나 그런 경기를 보면 진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보면 골을 먹고 내가 보면 지고 내가 보면 이기던 시합도 패배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이걸 진짜로 믿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도 그것을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없죠

그래서 나와 어떤 연결 있는 듯이 보이는 사회나 주변의 사건들이 그냥 그런 것이지 그것이 진지할 무엇이 되지는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자주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난 허영이 있고 권력적인 욕구가 남보다 심한 거라고 말합니다.

그냥 허영입니다.

일종의 감정이입이나 신체이입인데 드라마 보며 감정이입으로 눈물 흐르고 우는 것과 같습니다.

사회현상에 내 신체 현상이나 흐름을 동조시키고 이입시키는 것인데 이런 것이 어찌 보면 특이 능력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그런 심층의 욕구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서 난 허영이라고 하죠

그대의 내면의 욕구가 그런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고 그 욕구라는 것이 자기가 세상을 지배하거나 영향 주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그런 심리가 있어서라는 것이죠

내가 이러했더니 사회가 이러했다고 말한다면,

나에게 이런 것이 일어나니까 사회에서 이런 사건이 나더라 라고 말한다면,

사회가 이런 일이 있을 것인데 스스로 그런 것에 자신의 운명을 맞추면서 내가 세상을 좌우한다는 착각을 가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르게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비슷하고 그럴듯한 것만 보고 그것만 집중하면서 다른 것을 안 보는 편중성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삼세 일체라서 미래가 이미 어느 정도 징조식으로 드러나고 느껴지고 있습니다.

뉴스에 나올만한 것을 자기 일상에 일으키는 능력이 누구나 있는 것이죠

사회의 사건에 자신을 동조시키는 거라서 자기의 일상을 사회에 동조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하려면 그만한 출력을 가져야 하지만 당연히 개인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의 행동이 사회나 세상에 영향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걸 가지기 위해선 두 가지의 경로가 있죠 그건 사회적인 리더의 그룹에 들거나 명예가 그만큼 있거나 권력과 재력이 있거나 한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권력자나 경제인이나 언론인이나 연예인이나 어떤 이유로 사회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거나 식으로 사회적인 파급력이 있는 경우입니다.

다른 경우는 이 처음 것도 아우르는 다른 힘인데 그건 계제죠

이 두가지의 경우가 아니면 개인은 그냥 개인입니다. 사회에 나를 동조한 거지 사회를 나에게 동조시킨 건 아닙니다.

내가 말한 것 중에 까마귀나 까치나 그 외 내 주변의 것들은 대개 사회에 나를 동조한 거라서 나도 일반인과 같습니다.

다만 가끔 그 반대의 경우를 합니다. 이걸 하기 위한 나름의 과정을 거친 거라서 그렇습니다.

 

집단 무의식까지 들먹이면 우리 심층에선 대강 미리 아는 것이 있죠

그래서 그런 사건이 있을 즈음에 자신의 인생을 그것에 맞추어서 진행시킵니다.

우리 동네에 화재가 날 즈음에 내가 감정적으로 화가 날만한 일을 벌입니다. 화낼 상대를 초대하거나 화낼 만한 사건이 되도록 치밀하게 진행된 만남이나 배열들이 있죠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리의 심층의 능력을 몰라서 그런데 그래서 이건 인위적으로 할 수 없다면서 그러니 이건 운명이고 세상의 흐름이고 그로 인해 내가 연결된 것이고 하면서 믿지 않을 수 있지만 그건 심층이 일부러 사회나 세상의 사건의 진행에 자신의 운명을 맞춘 거라서 자기의 또 다른 기만 현상입니다.

역학을 배우면 아는데 오늘 공부한 이론에 해당하는 손님을 받기도 합니다.

내가 그 이론을 공부해서 그런 손님이 오는지 그런 손님이 올만해서 내가 그 이론을 미리 숙지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일치가 있습니다. 

모임에 가도 내가 어떤 정보를 한참 검색하고 듣고 가면 그것에 해당하는 대화를 하게 되고 그것이 중요 안건이 되기도 하면서 수월하게 대화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역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라서 누구나 그런 경우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회와 미래와 동조를 합니다. 이걸 자기가 도닦아서 자기가 뭔가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서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교만이 시작되고 허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자신의 심층 그 깊은 곳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그것을 아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면 결국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원하는 대로 말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정말 그런 사건과 그 사건이 자기와 깊이깊이 관여된 무엇으로 보여도 결국 자기 심층의 기만입니다.

자기 관찰을 해서 스스로의 욕망을 보지 못하면 이런 것을 모르게 되어 결국 의식의 착각 속에 평생을 원하는 대로만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항상 이런 말을 하면서 찔리는 건 그럼 넌?

넌 뭐가 다르냐 너만 예외냐 하는 반문입니다.

근데 전 나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질 않습니다.

연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지 안될 된 것처럼 보이진 않아요

그래서 언제나 그 차이점 

내 생각과 다른 그 차이를 보게 되어 항상 왜 다르지?

그런 의구심을 가집니다.

아마 이 말을 믿지 않겠죠 내가 매일 이따구 말을 하면서 자기는 안 믿는다고 하니 이상하니까요

 

앞에서 내가 흐름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걸 보면 내가 다 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근데 그건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시작하는 것에 난 경제의 부의 평등을 바라면서 진주를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와 얼마나 같은 것인가요? 내 의도와 같나요?

다른 게 있지요 다르잖아요 당장은 그래요 시간이 흐르면 어찌 될지 모르지만 분명 내가 의도한 것과는 달라요

그리고 환일현상을 보면서 난 이건 경험에 의한 그리고 의미 해석을 해의 분산을 권력의 분산이라는 식의 유추로 한 것이라서 근거가 빈약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입니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거기에 정말 권력의 분산이나 약화가 일어난 건가?

이것도 대강 맞거나 아니거나이지 정말 어디까지 맞는 거냐고 따지면 애매합니다.

그럼 내가 지금의 권력을 약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느냐입니다.

이건 심층에서 바란 것이라서 의식이 모를 수 있는 것이긴 하죠

그런데 이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일시적으론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닐 거라는 것입니다.

권력이 약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으로 그다음의 무엇을 일어나게 하려고 하는 것인지입니다.

이걸 의식이 알아서 심층이 권력의 약화를 바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은 심층이 당장 일으키는 사건은 모르는데 그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압니다. 이미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게 아니면 내가 의도하는 거라고 하지 못하고 그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진주이고 왜 그날에 그 시간이어서 그러한 환일현상을 보게 되고 왜 숙소를 거기 정하고 왜 그 기관을 유심히 보면서 신경 쓰고 이런 것은 의식이 한 것이고 그렇게 하도록 심층이 밀어주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의식이 일일이 신경 쓰면서 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어디를 갈까? 이거로 한참을 고민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주를 느꼈지만 왜 진주를 가야 하나도 나름 의식이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 지역성과 그로 인한 미래로 주는 운의 흐름과 그곳의 사람들과 그런 여건들을 심층이 아니라 의식이 따져본 것이라서 말은 심층이 다했다고 하면서도 의식도 나름의 분석하고 따져가면서 정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쓰지는 않았는데 의식의 흐름을 다 쓰면 너무 난삽하고 복잡해서 그랬는데 이것도 조금씩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목적이 지금의 권력이 아니라서 무엇을 내 심층이 보고 있는지 그걸 모르면 언제나 헛다리 집게 되는 것인데 그래서 언제나 차이를 보려고 합니다.

안 맞는 부분 다른 부분 달라지는 부분 그리고 사회가 하는 것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

내 심층을 알기 위해 세상을 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내 심층이 한 것이고 어느 것이 세상이 한 것이고를 알아야 하니까요

 

우선 사회를 나에게 동조해야 하고 나도 사회에 동조해야 하는 양방향을 다 연마해야 합니다.

하나가 된다고 해서 다른 것이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사회를 내가 어떤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선 내가 그 가는 방향을 길목길목을 다 알아야 합니다.

그냥 이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론 안되고 무엇이 되고 무엇이 되어야 하고 그 후에 이게 되어서 저게 되고 하는 그 과정상의 것들을 알아야 내가 사회에 뭔가 의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과 다른 것이 나타나면 미래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되어 그에 대한 대처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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