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니 : 니말은 헷갈리는데 영적인 것을 내적인 욕망으로 말하거나 사회적인 것으로 말하다가도 신적이거나 신비함이나 그런 것을 또 말하잖아 왜 그런 헷갈리게 말을 하냐는 거야
제라울 : 그건말야 이건 이것뿐이다라고 하나만 말하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어 어떤 것이든 관점 따라 다르게 말하는 것이고 같은 단어도 입장이 다르고 시점이 다르면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이 우리의 언어인데 별 수 있나
그러니 상황이나 문맥 따라 다르게 의미하는 것을 살피면서 들어야 하는 것이지
상황에 따른 해석과 알아들음을 할 수 없으면 답답할 것인데 내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 언어도 그럴 것이니 그게 어쩌것어
돕니 : 그럼 확실하게 말을 구분해서 해줘 봐
제라울 :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이 될까?
영적인 감각이 있거나 그런 식으로 뭔가 알거나 경험하는 것이 있지 그런 사람이 많이 있어
그런데 이경우 어려운 건 그런 영적인 방법으로 뭔가를 알아갈 때 객관적으로 정해진 규칙이 없다는 것이야
보는 능력이 있다면서 뭔가 보이면 정말로 뭔가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문제는 시각적인 것은 눈으로 하는 것이네 영적인 것이 왜 눈을 닮았는가야
이것이 감각적인 거라면 시각이나 청각이나 이런 것처럼 전혀 다른 방식의 감각이어야지 시각을 닮으면 그냥 시각으로 하면 되는데 영안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야?
광선과 다른 방식으로 뭔가의 형태를 감지해가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그것에 대한 어떤 이해가 그다지 객관적으로 없어
허상이라고 무시하거나 남다른 능력이라고 선망하거나 그러한데 무엇이라고 하든 그것을 다수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을 할 수 없으면 결국 보았든 못 보았든 자신의 문제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 돼
어떤 감각이든 감각이 문제가 아니라 감각한 것을 다른 사람과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것이 되는가인데
교류하기 위해선 자신이 감각한 것에 대한 신뢰성부터 먼저 증명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전에 우리가 그런 영적인 것으로 알려고 하는 그 정보나 지식이나 대상이 뭐냐는 것이야?
우린 뭘 그런 방법으로 알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야? 아니면 소수의 지들끼리의 궁금증인 것이야?
돕니 : 간단히 일반적으로 영혼을 보고 싶어 하잖아
제라울 : 정말 보고 싶은 건가?
돕니 : 난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
제라울 : 그럼 왜 안 보이는 건데
돕니 : 안보이니까 보고 싶지
제라울 : 안 보이는 것은 오감과 상관없는 거라서 그럴 것인데
그럼 왜 영혼은 오감과 상관없는 것이 되었지?
또 오감과 상관없는 것을 오감의 형식으로 감각한다고 하면 그 중간에서 어떤 변환 과정이 있다는 것이 되는데 이게 뭔지 아나? 아니면 이런 건 따지는 거지 상관없는 건가?
돕니 : 그럼 넌 정말 전혀 그런 것을 보는 것이나 감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거야?
제라울 : 그렇게 질문하면 아니라고 해야지
난 그런 것을 감각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생각보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거라고 봐
다만 의식하지 못하는 건데 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뭔지 왜 그런지 이걸 해결해야 한다고 봐 이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떠드는 것이니까
돕니 : 그게 무슨 말이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뭔 소리야
제라울 : 이미 감각하고 있는데 의식하지 못해서 감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또 의식하는 방법을 오해해서 곡해해서 받아들인다고 보는 거지
돕니 : 말이 어려운데 쉽게 안되나
제라울 : 이 부분부턴 사고력의 영역이야 그래서 사고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그냥 되지는 않아
그리고 그러해서 이게 아무나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해도 곡해되는 이유야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실 지금은 이목구비로 감각하는 것조차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세상이야(도덕경이나 불경에 의해 또 서구의 데카르트에 의해 적어도 이런 상식을 가지고 감각에 대한 서로 간의 전제가 되어 교류하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선 별로 신경안 쓰지만 약간의 지식이나 인문이나 사고나 뭔가 공부하려고 시작하면 오감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고 그러하니 좀 더 설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면 그만한 근거들을 가져야 해
수학도 불완전하다는 것이 되어서 그러한 확고한 바닥이 없다는 서로 간의 공감대가 있고서 대화하고 있는 것이 전문영역의 세상인데 여기 도닦는 곳에서도 역시 그래야 해
왜냐하면 우리 역시 전문가라서 일반인의 지적 수준을 넘어서이지
좀 더 일반인에게 다가가려고 설명하고 말하고 풀어서 가르치지만 그 가르칠 지식이라는 것이 일단 일반적인 지식이나 상식으로 다가가는 곳이 아니라서 그런 번역이 필요하고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수하고서 할 수 있을 만큼이 되지
이걸 전제하고서 말하고 들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조차도 하지 못한다면 어찌하겠나
그러니 영안이나 영적인 방법으로 뭔가를 감각한 것에 대해선 말할 것이 없어 이런 건 오감보다도 저열한 방식이라서 그래 아니 저열하다기보다 전혀 다른 것을 감각하려고 하는 건데 이걸 모르지
내 앞에 있는 자판기를 시각이 아닌 다른 것을 감각하다간 이런 글을 쓰는데 수백 년이 걸릴지 모를 지난한 짓이야
어떤 것도 시각으로 해야 하면 육안이 제일이고
사물 간의 사이에서 일어난 소리 같은 것은 청각이 제일이고
이런 건 당연한데 영적인 것은 어디에 쓰는 것이고 무엇을 알기 위함인지부터 애매해 그래서 이걸 이해해야 해
게다가 영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책임회피를 잘해
자신이 그것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보이거나 느껴진다는 것이라서 순응하려고 하거나 그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로 인한 결과에 좋으면 내가 잘한 것이고 나쁘면 난 그렇게 보여진 것이지 이유는 모르다는 식이겠지
이렇게 되는 이유는 역시 그 감각으로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인지를 오해해서 그래
우리가 오감을 쓰는 것을 따로 배울 필요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지만
전문영역으로 가면 그것을 따로 배워야 진짜 지식인이 돼
실험이라는 것이 왜 하나? 과학적인 사고라는 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인데 합리적인 사고하고 어떤 것이 그것인지 정의하기 위해서 배우고 사물과 사실을 알기 위해 일단 배워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그렇게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으로 하지 않는 것이 돼
하나의 사실을 말하기 위해선 오감으로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거기에도 방법이 따로 있고 복잡한 철차가 있어
적어도 설득하기 위한 나름의 정합적인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
아직도 많은 사람이 오감이 이미 깨진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이 오감은 커피를 살 때나 필요하지
도를 배우거나 말하는 때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거기에 영안은 논의 대상으로 된 적이 없어
어느 경전에 영안을 도를 닦는 방법으로 쓰고 도를 논하는 방법으로 쓰는 것으로 하나
오감마저도 그 한계를 알고 버리는데 영안 따위는 애초 대상조차도 되지 못해
내가 육신통을 말한 하늘공부를 읽기는 한 건가 거기에 다르게 해석한 게 그냥 재미로 한 것으로 보이나?
돕니 : 그렇지만 너도 신관을 말하잖아 그게 다른 사람에겐 얼마나 엄청난 판타지인지 알아?
넌 아무렇게나 말하듯이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니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야
제라울 : 알아! 그걸 그래서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해.
해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의도한 게 있어서 하고,
그래서 내가 신관을 안 만난다고 하기도 하잖아 그런 것이 없어도 스스로의 판단을 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더 맞다고 말하잖아
사물을 보고 사회를 보고 사건을 보고 세상을 보는 것이 되면 그런 신비로움은 그다지 바라지 않게 돼
보이는 것이 없어서 다른 보임을 바라고 그러다가 이상한 것으로 빠져가는 것이지 애초 이런 건 지식의 미치지 못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해
그래서 이렇게 자꾸 이치 설명을 하는 거라고 영적인 것으로 뭔가 알려고 하거나 받아들이지 말고 사고하고 판단하라고 그리고 그런 과정으로 결정한 것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잖아 이게 중요하잖아
이런 건전한 사고가 되는 사람이라면 그때서야 그 외의 것을 말할 수 있는 거야
다른 세상이 없나? 있어
다른 존재 없나? 있어
있는 건 있는 것이야 없다고 하자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런 것들도 역시 사회에서의 행동과 내가 세상과 대응해서 활동할 토대로서의 수단이지 그것이 목적이나 지향이 되지는 않아 내가 중심이 없으면 그런 건 아무 의미 없고 오히려 독이 돼
신관이나 기이한 현상이나 무엇이든 그런 것이 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에서 나타난 부수적인 것이지 그것이 주요한 게 아니잖아
기준은 이 세상이고 사회이고 우리인데 기준을 신이나 다른 것이나 이상한 것에 두면 안 되지
사회의 어떤 맥락에서 신관의 흐름이 있는 것이야
신관이 어떤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사회가 가는 것에 다른 작용으로서 신관이나 보이지 않는 작용이 여럿 있는 것인데 이것을 본말을 뒤집어서 이해하면 이미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된다고
그래서 내가 보는 영적 현상은 내 심층이고 사회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사건들이 또 천재지변들이 영적인 현상이고 이영적인 현상은 사회의 심층이야
그래서 내가 날 알면 심층을 알 것이고 사회를 알면 그 이면의 흐름들의 의도를 알지
자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인 감각을 말하면 이미 곡해된 사고체계가 있어서 정상적인 의견으로 보기가 어려워 그다지 참고 대상조차도 아니지
차라리 지나가는 아이의 뜬금없는 한마디가 더 내가 판단하는 것에 도움이 돼(이건 관매역수를 보면 안다)
내 심층의 의도를 내 위주로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에서 찾는 것이지
심층은 내가 보는 그곳에 이미 널렸거든
보이지 않는 심연에 있는 것이 아냐
돕니 : 그럼 넌 영적인 것은 불필요하다는 거야?
제라울 : 아냐 영적은 것으로 할 것이 따로 있다는 거야 결국 이것을 할 수 있게 되려고 도를 닦는 다고 해도 돼
도로서 사람을 인도하고 더 나은 세계를 되길 바란다면 그만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결국 세상을 알아야 하잖아
그러려면 당연히 그만한 앎이 있는 것인데 알기 위해서 필요해
다만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인가는 다른 것이지
돕니 : 그럼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제라울 : 지금은 심리학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사회과학이나 인문적이거나 이공적인 곳에서 연구가 많이 되어서 이런 것을 우선 어느 정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다만 그들 학문 간에도 서로 이어짐이라든가 융합이라든가 그런 게 안돼서 다 따로따로 하니 좀 헷갈리는데
시간이 지나서 인과를 알아가는 것을 심리학이 말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꼭 도를 배우는 사람은 알아야 해
심리든 사회현상이든 인과가 바로 되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이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그리고 사람들의 대중들의 의식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해서 그들의 관심과 욕구들에 대한 이해도 여러 곳에서 연구하고 말하니 그런 것을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해 사회과학을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되지
사람에 대한 연구도 이미 철학적으로 잘되어 있으니까 이것도 배워야 하고
과학이 알려주는 사물에 대한 지식은 기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이런 것이 과거에 영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상당히 지난한 어려움이 있었지
그런데 이걸 이미 여러 곳에서 지식으로 정리해주고 있는데 얼마나 좋아 이거 없이 영적인 것을 말하면 그게 얼마나 바보같이 멍청해 보이는지를 정말 모르데
어떤 경우 사람의 상처 받은 마음을 하나의 영상으로 영화처럼 보면서 위로해주고 빙의라면서 때어주는 듯하면서 심리치료가 되게 하는 기이한 경우도 있었어
이분이 심리학을 알지도 못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정신치료와 위로와 그로 인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있는데 잘하는 경우야 이 분의 경우는 말야
원리상 뭔가 영적으로 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처를 나름대로의 영상으로 보는 것이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는 게 대단해 보이지만 사람의 심층은 그런 이야기 만들기를 정말 잘해 누구나 다 하지
영적인 감각이 현실에 얼마나 적합하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달라
전혀 다른 것 같은데도 그로 인해 뭔가 긍정적으로 해나간다면 그것도 인정할 수 있어
그런데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아 아주 드물지 대개는 영적인 감각과 현실과의 연결을 잘 못해서 힘들게 사는 것이 더 많아
이런 감각과 현실 사이의 연관을 잘해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려거든
만약 큰 양을 봤다면 이게 美 가 되어서 미국의 대선에 내가 뭔가 영향을 준거라고 알면 참 대책 없는 것이고
미자가 될지 선미가 될지 미띠가 될지 아니면 양고기 먹는 것이 될지 양고기를 단순히 티브이로 보는 것이 될지 미아리가 될지 어찌 아나
얼마나 현실과의 관계에서 잘 이어가는가가 그 사람의 인생이 갈림이 돼 너무 왜곡해서 이해하고 해석하면 그만큼 현실과 괴리되어 힘든 삶이 되겠지
영적인 해결이라고 해서 영감이나 안다 안다 다안다식의 헛소리가 아니라 하나하나 연구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는데 객관적인 자료가 없고 실험할 수 있거나 축적된 지식들이 없다 보니 또 그런 누적을 혼자만의 감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신비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기이한 이적이나 영통으로 해결하려고 했지
영적인 것으로 한다고 해도 어떤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현실에 또 실재 대상에 적용하기 위해 나름의 숙고와 고된 훈련과 숙련이 거친 것이지 그냥 하루아침에 다 깨달은 것처럼 하는 것은 시간을 생략한 일화들에 속은 거지
예를 들어 이제마가 하나의 의학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실재 사람을 치료하고 적용하기 위해 하루아침에 알고 그다음 날부터 다 치료한 건 아니듯이 원리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적용하면서 깊이를 더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려면 자료도 있어야 하고 납득할 만한 설명도 있어야 하잖아
우리가 영적으로 느끼는 것이 복합적이고 누적된 것이며 시공적으로 덩어리이기도 하고 연결된 것들이 너무도 복잡한 것인데 그것을 한 번의 영감으로 안다고 될 것이 아니다.
그 영감을 체험한다면 그 체험한 것을 손으로 발로 입으로 행동으로 나오게 해서 다시 그로 인해 사람에게 사물에게 사회에 적용되게 하기 위해서 단련이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하고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오랜 세월이 필요해
이것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한데 뭔가 느낀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고
그런데 그 느낀 것이 무엇이 되고 어디로 갈 것이고 왜 느낀 것이고 그것을 알아야 느낀 것을 현실에 나오게 할 것이 아닌가
잘 보면 영적인 감각이 있다는 사람이 하나같이 남의 전생을 본다고 떠들어
뭔가 느낀 것을 전생이라고 이해한 것인데 그런데 이건 너무 쉽게 단정지은 거라는 걸 아나
느낀 것이 전생이라고 다시 느껴진다고 해서 정말 그러한 것인가?
내가 뭘 알고 싶다는 생각을 그 이전에 한 것은 아나? 내가 전생을 알고 싶어 했고 그전에 또 내가 전생을 알고 싶어 한 이유는 또 있다는 것이고 이걸 알까?
이걸 알아야 그것이 전생을 보는 것인지 전생을 보려고 내가 감각을 설정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게 가능한 것인지도 알아야 해
내가 본 것 중에 이런 게 있었는데
내가 어제 어떤 위인에 해당하는 글을 읽고 누군가와 대화도 하고 그러면서 떠든 것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어떤 분을 소개받았는데 그분이 영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러면서 나보고 어떤 위인의 후신이라고 한다.
난 말을 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에 내가 글을 읽고 대화 주제로 삼은 그 사람이다.
이분은 내가 그것으로 대화 주제 삼아서 내 주위에 떠돌고 있는 상을 읽은 것이다. 참 대단한 감지력이다.
문제는 이걸 그 사람은 전생이라는 여과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 위인이 느껴지는데 이유를 아냐고 나에게 물었어야 한다. 그러면 얼마 전에 대화 주제로 삼아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관심 가진 것이 내 주위에 한동한 떠돌고 있는 그 묘한 기운의 이치를 배울 것이지 영적인 감각이 사고하는 것을 앗아간 것이 되게 해서는 안되는데, 사실 사람을 보면 그 주위에 아주 다양하고 별별 것들이 다 떠다닌다. 그중에 어느 것을 느끼고 어느 것은 못 느끼고 하면서 그러한 것에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의식이 해석해주는 방식으로 인식하면 바보가 되어가는 거야
의식이 보여주고 해석해주는 것은 이미 의식의 사후 논리라는 지식을 몰라서인데 이건 이미 학계에서 연구된 논리야 이런 세상의 지식의 흐름을 좀 알아야 한다고 아니면 정말 한심해져
이걸 알고 모르고 가 얼마나 사고하고 지식을 정의해가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지 알아?
과거엔 이런 걸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아내 다 알았어
과거 사람들의 사고력을 우습게 보는 거야 그러니 그들이 영적인 것으로만 뭔가 알거나 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들이 얼마나 사고하려고 노력하고 이치를 공부했는지 지금 사람이 그들에 비해 너무 터무니없이 안 해
그래서 지식을 알아야 해 어떤 지식이 지금 연구되어 알려지고 있는지 모르면 자꾸 시대에 뒤쳐지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 바보가 된다는 말이야
땅속이 투시되어서 풍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풍수는 그런 능력과는 하등의 연관이 없어요
이런 상식적인 것을 모르면 정말 곤란한데 그 능력으로 그다음의 것을 연구해서 이치를 만들어서 그로 인해 나름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지 그 능력만으로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야
자기의 정합적인 설명을 가지지 못하는 건 어떤 것이든 잡것이야
영적인 것이 뭔가를 알 수 있는 동기로 작용하고 영감이 되어 풀리지 않는 것을 풀 수 있는 자기만의 운으로 사용하면 되고 남과는 다른 좋은 것이 되어 더 나은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일찍이 없었고 어느 위인도 또 어느 영웅도 그런 적이 없었어
그 위대한 한글을 만든 세종이 영적인 능력으로 만들었다고 하던가 그 한글을 만들기 위한 고통을 그렇게 뭉갤 수 있나
이순신이 하루하루 전쟁의 나날 동안의 내적인 고통을 아나
그런 가장 위대한 사람 역시 그런 영적인 것으로 해결된 건 없어 약간의 보조적인 것이고 그로 인해 남다른 어떤 무기로 썼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이겨내면서 극복하는 것이다.
거북선의 모든 설계가 논 앞에 보이거나 계시되어 그것을 만든 것이 아니야
그렇게 보여도 결국 그 당시의 배 만드는 기술과 직접 만들 장인들의 숙련이 해주는 한계 내에서의 설명이어야 하고 방법이어야 하는 것이지 신비한 뭔가로 해결될 거라고 보면 안 돼
거북선이 전쟁을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일 이기려는 이순신의 의지가 이기게 하는 것이야
그 의지를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눈으로 머리로 감각으로 행동으로 또 영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이기기 위한 모든 것을 다 하려는 그 의지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말이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
영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니가 뭔가 하고자 하는 것이 우선 있어야 하고 그것을 하기 위해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또 더 잘하기 위해 이런 것도 함양하고 갖추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결국 전도된 것이어서 별난 인간 취급이지 다른 게 아니게 돼
그래서 차라리 명리학을 공부하라고 하겠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수단으로써 쓰는 언어인데
알아낸 것이 명리로서가 아니라 명리로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한 것이지
알아낸 것은 영적인 것이든 다른 방법이든 그러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소통하고 교류하기 위해선 그 사람이 아는 지식을 이용해야 하지 않나
그 사람이 명리를 알면 명리로 말하고
그걸 모르고 과학적이면 과학으로 말하고
철학적이면 철학으로 말하는 것이지
그걸 내가 영안으로 봤는데 이러하다고 말하면 참으로 답답한 것이 돼
내가 영적으로 뭔가 보거나 느꼈다면 그렇게 느껴진 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일진이나 주위 환경들의 모양이나 상황 여건들을 참고하고 또 근래의 뉴스들 사회사건이나 이슈들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어떤 단어나 의미들을 참고해서 이해해가고 해석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시맨과 같은 상황이 된다.
<<1980년 9월, 아프리카 칼라하리에 원시생활을 그대로 영위하며 순진무구한 인간성을 간직한 부시맨이라는 소수의 인종이 살고 있다. 어느 날 그 부락 위를 날던 조종사가 빈 콜라병을 던진다. 난생처음 보는 병을 가지고 희비극이 발생, 고민하던 부시맨들은 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추장 차이(Xixo: 니카우 분)가 땅 끝에 가서 신에게 돌려주려고 길을 떠난다. 차이는 백인들이 사는 마을을 통과하면서 기상천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순진한 차이는 생활 방식의 차이로 문명인들과 충돌을 일으키다가 급기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그 지방에서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는 한 백인 학자(Andrew Steyn: 마리어스 웨이어스 분)와 여기자 케이트(Kate Thompson: 산드라 프린스로 분)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그의 연구 작업을 도와준다. 이때 그 지방에 공산 테러단이 경찰에 쫓겨 나타나자 차이의 활약으로 그들을 체포하고 인질로 있던 아이들을 구해낸다. 그리고 고향 칼라하리 사막으로 돌아와 가족들과도 재회한다. 다음 검색으로 나온 설명 ㅎㅎ>>
부시맨에서 콜라병이 뭔지 몰라서 이것으로 생활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나오는데 쓰레기 일뿐인 이것이 저렇게도 사용되는구나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쓰레기로만 보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보지 못함으로써 황당한 도구가 되기도 한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니 이것이 뭔지 모르고 그러다 보니 자기가 아는 지식 한계 내에서 만의 해석이니 이상하게 되는 것이다. 즉 바보가 된다.
뭔가 뜬금없이 보이거나 느끼면 하늘에서 콜라병이 떨어진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안다고 뭔가 느낀다고 외부와 소통하지 않으면 결국 이런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원시인은 잘못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에 단절된 것은 분명 스스로의 잘 못이다.
그런 삶으로 만족스럽고 그다지 갈등이나 번뇌 없이 살면 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갈등을 겪어보지 않은 것은 순수한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겪고 순수해진 것과 안 겪고 순수해 진건 다른 것이다. 원시나 원초나 순수에 대한 환상은 안된다고 본다.
우린 그런 사림이 되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자로서 또 판단하는 자로서 우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걸 원하지 않는다면 사실 여기서 내 글을 읽지도 앓을 것이고 그들 나름의 철학으로 살거니 관여할 것은 아니다.
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러하다는 것이고 도는 분명 혼자가 아니라 다수와 세상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니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