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사물에 인간이나 동물이나 포함되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말한다고 일단 짚고 시작합니다.
사물엔 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이 있다고 하면
우선 보여주기 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사물이 스스로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그 사물의 형태가 됩니다. 어떤 모습을 한 것인가라면 그 모습을 이룬 것이 보여주는 각자의 방법이겠죠
나를 예로 들면 배가 나오는데 이건 선천적으로 배부분이 둥글게 생겨서입니다.
사람들의 허리가 타원형인데 난 좀 더 둥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밥만 먹어도 배가 나온 거 같은 둥근 배가 되었습니다. 체중이 45킬로였을 고딩시절에도 그랬으니 마른 비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일단 배 모양 자체가 그렇게 만듭니다.
이것의 원인은 대인관계에서 또 주변이 원만하게 되기를 바라서 일거라고 봅니다.
모나고 각 세우고 다투고 긴장되는 주변이나 관계보다 원만한 분위기나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거죠
다르게는 오락성 있는 분위기를 원하거나 항상 별 문제없기만을 바라는 것으로 나약한 심성일 수도 있습니다.
일지가 상관은 아닌데 상관국이기도 해서 대인관계에서 장난스러운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어서 오락성 같거나 재미를 원한다고도 할 수 있고 둥근 건 관상에서 수형이라서 수가 놀고먹으며 좋은 게 좋다 식의 성향이 있어서입니다.
게으른 거나 나태한 것도 되는데 이건 배 나오고 둥글넓적한 것이 육기론으로 태음지기이기도 해서입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는 게 맞는다고는 못합니다. 내가 생각한 성향이 있는데 이런 쪽에 선 이런 식으로 보기도 하니 거기에 근거를 대는 것이 있는 거지 이런 것으로 성향을 유추한 건 아닙니다. 거꾸로죠
성향을 우선 알아내고 저런 걸 공부해보니 그렇게 말하더라입니다.
즉 내가 이러한 신체 형상을 가지는 것에 이러한 성향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인데 어떤 모양이든 그 성향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 됩니다. 또 성향은 심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인생을 산다는 것으로 사건을 말합니다.
난 뭔가 주도하면서 일하는 것을 안 하며 이왕이면 즐겁게 하기를 바라며 나서서 일 저지르는 것을 안 하며 게으릅니다.
지금도 집에서 방콕 하며 이걸 쓰고 있고 올해는 일간 입묘라서도 그런지 백신 맞고 40여 일을 심장이 조여와서 집을 나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먹고 자면서 살만 쪘죠 배가 동글동글합니다.
직장이 있었으면 그래도 덜할 것인데 직장이 없는 게 이런 성향으로 살게 되어 있어서입니다.
직장 없음이란 것이 신체의 모양에서 이미 그런 사건이 있게 한 것인데 그런 행동할 것이라서 그런 모양이다가 되는 것이죠
수형이라서 그런 건 아닐 것입니다. 수는 여기저기 굴러다녀서 돌아다니는 것을 잘하는 것이고 너무 돌아다녀서 문제인 것이기도 한데 난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은 있는데 다른 신체가 그와 다른 성향이 있어서 눌러버린 것이죠
이런 걸 일일이 따지긴 복잡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모양이 된다는 것은 그런 행동으로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식물이나 광물도 그런 모양이 그런 성질이 있고 그렇게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의학에선 그 식물이나 광물의 모양을 보고 어디에 좋은지 아는 것이기도 하죠
겉에 드러난 것이 속의 욕망이다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런 성향이 그렇게 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고 이렇게 살게 됩니다.
즉 사물이 그렇게 생긴 것은 그 사물이 그런 행동을 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을 구성할 외부의 인연들을 조합한 것이죠 다시 말해 지구 상에서는 지구의 물질들을 이용해 신체구성을 한 것입니다.
사후로 가면 사후에 있는 무언가로 그런 구성을 하겠죠
그래서 정리하면 욕망이 있다. 욕망과 삶은 같은 것인데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사건들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외부 구성 요소들이 있다. 외부의 관계가 그렇게 형태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런 것으로 무엇을 원하느냐입니다. 욕망과 외부가 만나서 이루어진 건 그로 인해하려고 하는 무엇이 있어서입니다.
내가 이런 배가 된 건 그러면서 이생에서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을 뺀다고 해서 배를 다시 홀쭉하게 만들면 그 하려고 하는 것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 되는 거죠
내가 살 빼면서 일어난 것은 이 광룡원이 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할까요 강제 다이어트가 되었죠 빠져나가는 게 문제라기 보단 내가 나서는걸 안 하다가 나서면서 일이 생긴 거죠 배가 나와서 배나 두드리고 느긋하게 있어야 하는데 배를 없애니 갠히 나서면서 일을 만든 거죠
그 형태가 그런 사건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여기서 목적이 있다는 거죠 뭘 하려고 가 있어서 그런 걸 한다는 거죠 이걸 알아야 하는데 자천하는 우린 말이죠
세간엔 자기가 사는 목적이나 행동하는 목적을 사회의 의미로 보는 게 있죠
돈 벌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가정을 이루려고 투자하고 집 사고 영어 배우고 해외 가고 이런 사회적인 목적을 하면서 뭔가 하죠 오디션 보려고 살을 빼고식으로요
이런 건 단기적인 목적이고 인생 자체의 목적은 잘 모르기도 합니다. 이걸 알아야 단기 목적이 더욱 확실해질 것인데 사실 힘들죠
난 왜 그랬을까요? 말을 했는데 기억을 못 하겠죠 ㅋㅋㅋ
아무튼 이런 것이 보여주기입니다.
내가 외부로 드러나고 있다면 그래서 다른 외부나 타인이나 그 사물들이 날 인지한다면 내 성향이 그렇게 활동하게 하고 그런 활동하고 성향을 가짐으로 인해서 형성된 모습일 겁니다. 막말로 "니가 그러니 그런 생김새다."인 거죠
여기 이상한 예를 들면, 관상으로 보면 이혼할 만한 상이 있습니다. 꼭 이혼한다고 하지는 못하는데 그런 가능성을 우선 남보다 더 있는 상인데 이런 경우면 애초 이혼할 작정을 하고 있는 성향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이러면 그렇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혼할 마음이 처음부터 있고 그것이 그런 생김새를 가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심층은 그럴 마음이지만 의식으로 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따진다면 별다른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자기가 앞으로 어찌할지 모르는 것인데 그건 누구나 그렇습니다. 심층은 가려져 잇으니까요
그래서 성향이라는 것이 누구나 아는 그 사람의 성격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층에 있는 가려져 있는 것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성향이라는 것이 날 이루는 신체나 욕망이나 인생살이의 방향인데 그것을 전부 의식이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지만 있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다음이 보는 것인데 내가 남이나 외부에 보여주는 것은 저러한데 내가 남이나 사물을 볼 경우 어떻게 보느냐죠
여긴 일단 내가 보려는 것이 있고 그다음 사물이 보여주려는 것이 있고 그다음 외부 영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물이 보여주기는 위에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려는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내가 뭘 보려고 하고 왜 보려고 하고 어떻게 보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하죠
어떻게 보는가는
내 욕망이 상대를 그것으로 규정하게 합니다. 내가 미인을 좋아하면 여자를 볼 때 이것이 기준이 되죠 거기에 자천하다 보면 여자로 인해 실수할 수도 있죠 꿈에 보이거나 뭔가가 여자로서 유혹하면 누진통이 날아가죠
그런 사건을 만들게 됩니다. 내가 보는 방식이 내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는 보여주는 방식이 규정하는 것과 보길 바라는 것이 규정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나 미인을 좋아하지 할 것인데 그렇진 않아요
감정에도 선이 있습니다. 미인일수록 그 상대에게 선을 넘어가기가 쉬울 것인데 그러면서도 선을 안 넘어가려는 사람은 있고 덜 넘어가거나 막 넘어가거나 그 정도 차이는 있습니다. 이런 것이 성향이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모양을 만들죠
이러면서 내가 상대를 보려는 방법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미인을 더 보려고 하는 정도 차이가 이런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해소되지 않았을 경우에도 그 본 것에 대한 대처에서 간극이 발생합니다.
자천하는 곳에서 선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나 꿈에서 여자 연예인을 나오게 하는 것이 그런 추구가 그런 현상을 만들고 상대가 무엇이기 전에 무엇이었으면 하는 것이 됩니다. 여자이고 미인이고 연예인이고 이런 것이 될만한 기미가 있으면 그렇게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보다 잘 됩니다. 꿈은 내가 원하는 것이 꾸어지고 영적인 현상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나타나고 보고 싶은 모습으로 조작을 내가 하기도 하고 내가 원해서 상대가 해주면서 이득을 취해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사람을 보면서 이런 것을 추구하면서 쌓인 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풀거나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건 오히려 알 기 쉽습니다. 자천하다 보면 허영이 드는데 스스로가 대단한 뭔가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의미 있는 가치 있는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니 그런 것이 보이고 그런 것으로 보이게 해오며 그런 것만 봅니다. 그러면 그로 인한 행동을 또 할 것이고 그러면서 점점 자기의 굴레에서 챗바퀴를 돌며 고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이건 자기의 욕망이 있는데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면서 외부를 곡해하면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곡해까지는 아니라도 대상을 대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이 뭘 볼지 자기가 정한 경우입니다.
뭘 보려고 하는지는 능동적으로 외부를 판단하려고 할 때 그 보려고 하는 방법이 보인 사물에 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고 싶어야 보이기도 합니다.
뭘 보려고 하는지 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보일 수 있습니다.
책을 읽어도 책에서 뭘 찾을지 알고 보면 그것이 찾아지겠지만 그냥 책을 보면 다르게 읽히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뭘 할지 그 목적을 확실히 할수록 대상이 잘 보입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그냥 다 보인다고 생각하니까 목적을 두고 보는 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습니다. 아는 사람만 이걸 쓰겠죠 인터넷에선 검색어를 써야 검색이 되는 것인데 일상에서도 어떤 검색어를 쓸지 어떤 개념을 검색할지 보면 그것이 보일 것입니다.
이걸 안 하면 그냥 어제 같은 눈앞 풍경이고 그다지 다를 게 없는 일상이 지속되겠죠
왜 보려고 하는지는 보는 거 자체에 대한 의문입니다. 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목적성인데 이게 정해져야 뭘 볼지가 되고 어떻게 볼지가 되기도 하죠
대개는 이게 없을 것입니다. 보이니 보는 거라고 하는 거면 상식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나만의 안목을 기르려면 보는 이유를 정해야 합니다. 자기 세계관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냥 난 이걸 원해서 본다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왜 그걸 원하는지에 대한 장대한 설명이 있어야 하니까요
단기간에선 가능할 것입니다. 이걸 하고 싶어서 이게 좋아서 그렇게요
이런 것이 뒤엉켜서 뭔가를 봅니다.
그러다 보니 보는 것에 실수를 많이 합니다.
뭔가 보인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마다 다른 걸 보았다고 합니다.
매일 우린 사람을 보지만 사람마다 사람에 대한 정의가 다릅니다. 내일 가족을 보지만 가족에 대한 정의도 다르고요
내가 생각한 엄마가 엄마가 생각하는 엄마와 얼마다 같고 다를까요? 동생이 생각하는 엄마가 내가 생각하는 엄마와 같을까요? 나와 다르게 보는 동생의 말에 당황한 적은 없나요?
대개 우린 상대를 모릅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위주에서 판단한 것이지 상대를 진심으로 보지도 않고 보려고도 않고 보는 방법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천하는 곳이니 영적인 것을 말하면서 뭔가 본다고 하면
이때 내가 보는 것이 있고 그 대상이 나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뭔가도 있습니다.
나에겐 동물로 보이는데 상대가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보는 것과 상대가 보여주려는 것이 다를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내가 동물로 보려는 이유가 뭔지 우선 따져야 합니다.
즉 내가 보는 것, 상대가 보여주려는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인 것
이렇게 됩니다.
거기에 내가 허영이 좀 있다면 그 동물이 우리나라의 무엇과 연관된다고 생각되어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어딜 다니거나 뭔가 한다고 이상한 행동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린 사물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과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이 그 사물과의 만남에서 중간에 그 보여 주려는 것과 보려는 것이 만나서 제3의 다른 사물을 보고 있기도 합니다.
내게 보이는 대로도 아니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대로도 아닌 그 두 개가 뒤섞인 무엇이 남에게 보일 거라는 거죠
그래서 누누이 말합니다. 그대가 보는 대로가 아니고 내가 보는 대로도 아니며 그러니 그대가 보는 것을 강요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것도 너무 사실로 듣지 말라고요
이생에서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에 내가 살게 되는 것이 합쳐 저서 이루어지는데 사후엔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더 영향이 큽니다. 사후엔 삶이 없어서 그것이 날 이루는데 그다지 영향이 적은 겁니다. 삶이 없어서 과정이 없죠 그건 시간의 경과가 없다는 것이 되는데 그래서 물질 구성이 자유롭게 됩니다. 사후에선 상대와의 관계가 쉽지 않고 흔하지도 않아서 이게 별로 없는데 내가 영혼을 본다면 내가 그 영혼에게 영향을 줍니다.
이러면 그 영혼은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에 상대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주는 영향을 감안해서 자기 모습을 정하는 것이 수월한데도 사실 대개의 영혼들이 이것을 못합니다. 음~ 신관들은 이걸 이용해서 하는데 대개는 못합니다.
그래서 자천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향이 주는 것을 최소화해서 상대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대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게 마음 비워야 하는 것인데 이걸 잘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별다른 생각이 없으면 좋지만 사람은 욕심이 생기는 때가 있습니다.
무당을 예로 들면 처음 공수받을 땐 잘하는데 점차 생계가 걸리고 돈벌이가 걱정이고 가족이 있고 하면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심이 들어갑니다. 잘 봐야 하고 돈이 되는 방법대로 봐야 하고 이것이 의식이 아니라 심층에서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본인은 객관적으로 진실만을 말한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심층의 원리를 모르니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자천하는 사람도 이렇게 됩니다. 혼자 공부하거나 아직 미숙한 시절엔 그냥 보거나 느끼는데 다른 생각이 생기고 살다 보니 이런저런 것이 있게 되면 그에 따른 선입견이 파고 들어갑니다. 심층에요
그래서 자천한지 수년이 흘러가면 심층과 의식 사이에 뒤틀린 교류를 합니다. 알아서 무시하기도 하고 이미 들어본 거라서 대충하고 그러면서 대하는 자세에서 처음과는 달라진 굽음이 있습니다. 새롭지 않죠 새로움은 수천 년의 중요 화두이지만 이걸 실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죠 익숙한 것에 새로움이 다시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익숙함이 제일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심층에 들어간 이러한 편견을 알아채지 못하면 그것이 뭔가를 보고 판단하는 것에 영향을 주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진짜인지 알게 됩니다.
단순히 영적인 것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의 판단에서 선입견이란 자기가 모르는 생각입니다. 어떤 개념이 관념이 생각이 심층에 어떻게 영향을 주어서 이런 생각 판단을 하게 하는지 일일이 알지 못하는 것인데 이걸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니 항상 내가 뭘 보려고 하는지 왜 보려고 하는지 어떻게 보고 있는지 따지고 있어야 하고
상대가 무엇인지 무엇으로인지 무엇 일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부 영향입니다.
이건 크게는 이승과 저승처럼 아주 큰 외부 환경으로 인한 보여주고 보려는 것이 의도와 얼마나 같을지 다를지가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과 죽어서의 모습은 같은 사람인데도 상당히 다른 형상이기도 합니다.
이건 시간의 경과가 있어서인데
어떤 사람이 이승에서는 젊잖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이 실재 가까운 곳에 오래 보면 전혀 골치 아프고 고집스러우며 별난 취미도 있으며 가까이하기엔 어려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행동과 사회에서의 행동이 다른 사람이 의외로 꾀 됩니다.
그래서 이승에서 보면 그저 그런 사람인데 이분이 사후에 보면 저 성향이 바로 드러나서 불편함을 풍기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승에선 육체가 성향을 반영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사회라는 것이 있어서 스스로 감찰도 하고요
그런데 사후에선 성향이 바로 드러나고 사회가 없어서 눈치 보지 않으니 본래의 성향이 직접 드러납니다.
이런 것이 외부에 따른 영향인데
일상에선 집에서 다르고 나가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집 근처에서는 단정하게 사는데 객지에 나가서 살면 불법적인 것도 마구 저지리며 사는 것도 있습니다.
객지 생활을 하면 어딘가에서 해방된듯해서 뭐든 해도 될 거 같이 윤리감이 풀어지는 효과가 좀 있어서요(내가 그런 감정이 들어봐서 ㅎㅎㅎ)
한국에 살 때와 미국에서 살때 행동이나 감정의 자세가 다르고,
태국이나 베트남에 가면 또 다르고 유럽으로 가서도 다를 것입니다. 그건 그 나라를 대하는 마음이고 욕망일 겁니다.
만만하거나 약한 나라에선 더 거칠 것이 없듯이 우월감을 느끼면서 살겠죠 그게 오리엔탈리즘이 되어 온 것이니까요
이런 건 큰 환경변화입니다. 한국인이 미국 가면 눈이 찢어지더군요 정말 찢어지는 건지 찢어져 보이는 건지 이상한데 사는 곳에 따라 관상이 변하고 생각 따라서도 달라지고 그 생각을 다르게 하는 것은 타인이나 외부의 암시입니다.
내가 날 암시하는 것보다 타인의 한마디가 더 효과가 커서 외부의 달라짐은 상당히 큰 변화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과 버려는 것이 다 변합니다.
똑같은 것을 봐도 어디서 보느냐로 다르게 보게 되고 인지하게 됩니다.